[코드로 읽는책] 발해 제국사

발해사 만큼이나 국가적 정체성에 대한 주변국가들의 시각이 엇갈리는 것도 드물다. 우리는 고구려를 계승한 제국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중국은 당나라 변방 소수민족인 말갈족이 세운 지방정권이라고 주장한다.

러시아는 발해를 말갈족이 세운 국가이긴 하나 당나라와는 무관한 독립국가로 보고 있으며, 일본 학계에선 발해가 독립국가이긴 하나 지배층은 고구려 유민이며 피지배층은 말갈이라는 이중구조설이 주류를 이룬다.

특히 중국은 이른바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이란 이론적 지침 아래 1970년대부터 발해가 당나라에 속한 지방정권이라는 데 초점을 맞추어 본격적인 정지작업을 해왔으며, 지금도 ‘동북공정’을 통해 이를 굳히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발해제국사’(서병국 지음, 서해문집 펴냄)는 부제 ‘발해가 고구려의 계승국인 34가지 이유’가 말해주듯 발해와 고구려와의 연관성을 다양한 각도에서 면밀히 살펴봄으로써 발해사가 우리 역사임을 밝히고자 한다.

최종 결론은 발해국이 고구려계와 말갈계의 공조로 세워졌으나, 그 발전을 주도한 것은 고구려계 사람이었다는 사실이다. 이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발해국 주민이 대부분 고구려계라는 주장이다. 지배층은 고구려인, 피지배층은 말갈인이라는 기존의 통념과 달리 주민의 대부분, 즉 총인구의 70∼80%가 고구려 유민이었다는 점이다.

책에 따르면 말갈 사람들은 사냥터를 찾아 옮겨 다니는 수렵·유목민었던 반면, 고구려인은 대부분 정착해 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낙후한 문화를 가진 말갈계는 결국 고구려의 문화에 흡수·동화됨으로써 계속 남지 못하고 고구려계의 옷으로 갈아입었다는 점이 조목조목 제시된다.

고구려계 사람들이 발해국을 주도하게 되면서 말갈의 풍속 또한 고구려 풍속에 완전히 압도되거나 동화되었으며, 발해의 문화는 ‘해동성국’이란 별칭을 얻었듯이 높은 문화수준을 자랑했다. 또 발해의 공예예술이 고구려의 것과 동일한 점, 발해국 문화에서 예술성·서정성·서사성 등이 강하게 묘사되고 있는 점도 고구려를 그대로 계승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다. 이밖에 농업기술이나 매 사냥, 스포츠인 격구 등 농업기술과 수렵, 여가문화까지도 고구려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도 제시된다.

이로 인해 발해국은 초기에 고구려와 말갈계 양면성을 띠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고구려계의 단일성으로 바뀌었다고 지은이는 설명한다.

신라와 고려도 이같은 점을 인정해 발해국을 고구려 계승국가로 보았으며, 발해국 멸망 이후 발해국 사람들이 지도급 인물의 인솔하에 다수가 고려에 망명·이주한 것도 이같은 주장을 뒷받침해준다고 강조하고 있다.

지은이는 머리말에서 지난 1990년 중국 옌볜대학에서 조선족 학자들 또한 발해국이 고구려 유민들을 중심으로 세운 나라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당국의 압력으로 이를 말이나 글로 표현하지 못한다는 귀띔을 받았다고 전한다. 결국 중국의 ‘화이사관’(華夷史觀)에 따라 발해국이 동북아시아의 오랜 이적(夷狄)을 대표하는 말갈족이 세운 국가로 둔갑됐다는 것이다.1만 4900원.

(서울신문 / 임창용 기자 2005-2-6)

발해는 고구려 계승 “증거 보여주마”

발해왕조가 고구려를 계승한 민족사 일부분이라는 것은 한국인만의 상식이다. 동북공정을 진행중인 중국은 지방정권으로 격하시키고 있고, 연해주가 발해강역이던 러시아나 사신교류 기록이 많이 남아있는 일본쪽 학계도 다민족 국가로만 이해한다. 그네들이 사료를 빌어 제기하는 근거들 가운데 제일 약한 고리가 발해의 민족구성은 말갈+고구려계란 등식이다. 당나라 사서인 <신당서>에 건국자 대조영이 말갈인이라고 쓴 기록이 있고, 당대 외국인 방문기록에 발해 촌락인구의 대다수를 말갈인이 점하고 있다는 기록 등이 그러하다.

북방민족사 연구자가 쓴 이 책은 역시 당대 문헌기록들로 이런 내용들을 반박한다. <구·신당서> <삼국사기> 등 당대 문헌자료에서 발해가 고구려 계승국임을 언급한 단편 자료들을 추적해 34개 항목에 걸쳐 정리했다. 항목들은 발해 건국과정과 중국의 발해국왕 책봉과정, 국호의 의미, 해외교류관계, 정치·경제·문화상에서 고구려와의 친연성 등을 다룬다. 그물망같은 사실관계 속에서 발해사를 고구려 적자로서 자리매김하려는 의도다.

글의 목청이 높아지는 대목은 발해국의 말갈족 다수설이다. 발해 멸망 뒤 여진족 분포나 고구려 말 자료만으로 파악한데서 비롯된 편견이라는 견해다. 발해 총인구의 70~80%이상이 고구려계였으며 말갈 사람들은 별로 많지않았다는 말이다. 발해국의 지방통치기구로 정착농경민을 위한 주현제만 있었고 말갈 같은 유목민을 위한 부족제는 없었다는 점이 이를 입증한다고 한다. 고구려 멸망 뒤 말갈인은 당나라의 박해로 흩어졌으며 많은 이들은 고구려 인에 동화되어 말갈적 혈통을 자처한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면서 “말갈 7부의 대부분이 흩어져 행방을 알 수 없다”는 <신당서>의 기록을 거꾸로 인용했다. 2대 무왕이 727년 일본 쇼무천황에게 보낸 국서에서 발해가 고구려 옛땅을 회복하고 부여풍속을 지킨다고 알린 점, <속일본기> 등의 사서가 발해사신을 고려사신으로 적은 점, <구당서>, 유학생 최치원의 편지 등 곳곳에서 발해 건국의 주체가 고구려계임을 일러주는 증거가 보인다는 점도 들고있다. 도읍터가 옛 말갈인의 땅이어서 말갈국가라는 중국사서의 논리는 국가건립 주체를 왜곡하려는 의도라고 일갈한다. 민족주의 시각을 견지하되 생소한 문헌비교를 통해 논의의 근거를 이끌려는 노력이 보이는 책이다. 발해멸망 뒤 유민 반란과 관직 진출상을 소개한 요, 금나라 사서의 유민열전, 발해 건국자 대조영의 아버지 대중상이 세운 소국인 진국이 발해로 발전했다는 북한학계의 연구성과 등도 나와있다. 발해 사료문헌에 대한 해제글이 말미에 있다.

(한겨레 / 노형석 기자 200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