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제 신농씨, 농업·의약지식 베풀다

세계의 중앙을 다스렸던 최고신 황제에 이어 이번에는 남방을 다스렸던 불의 신 염제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염제는 신농씨라고도 하는데 소의 머리를 한 반인반수의 신이었다. 사실 그는 황제가 등장하기 전에 천하를 지배했던 큰 신이었다. 황제가 막강한 권력을 쥐고 모든 신들과 만물을 지배했던 엄격한 이미지의 신이라면 염제는 인류에게 무엇이든지 베풀기를 좋아했던 한없이 자비로운 신이었다. 그렇다면 염제는 인류를 위해 어떤 일을 했을까? 염제가 인류를 위해 봉사한 가장 큰 일 중의 하나는 그의 별명 ‘신농’(神農: 신령스러운 농부)이 의미하듯이 농업을 발명한 일이었다. 염제가 등장했을 무렵 이미 인구가 늘어나 짐승을 사냥하거나 열매를 따 먹는 일만으로는 식량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염제가 식량 문제로 고민하고 있던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곡식의 비가 내려 염제가 그것들을 심어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이보다 더 신비한 이야기도 있다. 역시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몸빛이 붉은 새 한 마리가 주둥이에 아홉 개의 이삭이 달린 벼를 물고 하늘을 날아다니다가 그 이삭을 땅에 떨어뜨렸다고 한다. 염제가 그것을 주워 밭에다 뿌려 농업이 시작되었다고도 한다.

불의 신이자 태양의 신인 염제가 농업의 신으로 숭배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초기 농업은 산과 들에 불을 질러 화전을 일구어 이루어졌고 태양은 농작물의 생장을 주관하기 때문이다.

염제의 인류에 대한 공로 가운데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의약의 지식을 전한 일이다. 원시 인류는 의약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질병에 걸려도 대책이 없었고 아무 풀이나 먹다가 목숨을 잃는 일도 많았다. 이를 불쌍히 여긴 염제는 몸소 하루에 100가지 종류의 풀을 씹어 그 맛을 보고 인체에 이로운지 해로운지, 어떤 특징이 있는지, 효능이 무엇인지를 가려내어 사람들에게 알려 줬다고 한다. 때때로 염제는 독초에 중독돼 목숨이 위태롭기도 했지만 인류를 위한 고귀한 일을 멈추지 않았다. 이 덕분에 사람들은 병에 걸리면 약초를 달여 먹고 나을 수 있었다. 이렇게 보면 염제는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동양의학, 즉 한의학의 시조인 셈이다.

염제는 원래 동방 민족의 신으로 대륙을 다스렸다가 황제에게 패해 남쪽으로 쫓겨 갔다. 이 때문에 염제는 중국의 동방과 남방의 민족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는 염제의 모습이 자주 나타나며 월남에서는 그를 시조신으로 숭배한다. 특히 고구려 고분 벽화에 나타난, 오른손에 벼 이삭을 들고 왼손에 풀을 움켜쥔 염제의 모습은 신화 이야기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생동감 있는 염제 그림은 중국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이화여대 교수>

(한겨레신문 2005-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