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왜곡 현장에 관한 사례 분석 - 발표논문

중국의 역사왜곡 현장에 관한 사례 분석
  - ‘오녀산산성사적진열관’과 ‘집안박물관’을 중심으로

                                          서길수(서경대, 고구려연구회)


Ⅰ. 머리말
Ⅱ. 요령성 환인현 「오녀산산성사적진열관」에 전시된 고구려사 왜곡 사례
Ⅲ. 길림성 집안시 「집안시박물관」에 전시된 고구려사 왜곡 사례
Ⅴ. 맺는말


Ⅰ. 머리말

중국 고구려사 왜곡을 단계별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1단계 (1980-1995, 15년) : 학자들에 의한 역사왜곡 준비기
  1) 1980-1985 : 통일적다민족국가론의 신 해석과 고구려 연구의 시작
  2) 1985-1995 : 고구려 연구의 팽창·중흥기 
2단계 (1995-2001, 6년) : 국책에 의한 역사왜곡 추진과 1차 왜곡의 완성기
  1) 1995-1997 : 국책 연구 추진기
  2) 1997-2001 : 국책 연구의 완성과 1차 왜곡의 완성기(㰡”고대 중국고구려역사 총론㰡•)
3단계 (2002-2003, 2년) : 2차 왜곡의 실시(동북공정)와 완성기
  1) 2002년 2월 : 동북공정 시작
  2) 2003년 2월~9월 :  고구려 유적 정비(세계유산 등록 목적)를 통한 2차 왜곡의 완성
        (‘오녀산산성사적진열관’ 과 ‘집안박물관’의 전시 내용)
4단계 (2004년~ ????) : 3차 왜곡의 시작 - 정부 홈페이지·사전·교과서의 완전 개정
    1) 2004년 2월 - 한중 양국, 외교 교섭을 통해 학술적으로 해결하기로 합의
    2) 2004년 4월 - 중국 외교부 홈페이지에서 고구려 삭제
    3) 2004년 7월 - 고구려 유적의 세계유산 등록과 중국의 역사왜곡 재발 
    4) 2004년 8월 - 한중 양국, 구두양해를 통해 일단 휴전

필자는 이미 2003년 12월,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의 시작단계에서 3단계인 동북공정 추진 과정까지에 대해서 자세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 논문에서는 그 다음 단계인 2차 왜곡(3단계의 2차)의 현장을 분석하고 중국이 어떻게 2차 왜곡을 완성했는가를 분석하는 것이 목적이다.
2001년 북한이 고구려 유적을 세계유산에 등록하기 위해 신청하자, 중국은 2002년 늦게 서둘러서 중국 땅에 있는 고구려유적을 신청한다. 그리고 2003년 봄부터 불과 6개월 사이에 국가적인 지원과 천문학적 예산을 투입하여 고구려 유적을 발굴·정비·복원한다. 불과 6개월 사이에 1000호가 넘는 민가를 이주시키고, 지난 50년 동안 한 발굴보다 더 많은 발굴을 하였으며, 복원과 정비를 마쳤다.
이렇게 빠른 시일 안에 공사를 마치면서도 그 광정에서 2차 고구려사 왜곡작업을 철저하게 진행시켰다. 본 논문은 바로 왜곡의 현장인 고구려의 첫 수도 홀본(요령성 환인현 오녀산산성)의 ‘오녀산산성 사적진열관’과 두 번째 수도 국내성(길림성 집안시)의 ‘집안시박물관’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필자는 세계유산 등록을 위해 유네스코 전문가의 심사를 마친 작년 9월 이후 8번의 현장방문을 통해 왜곡의 현장을 자세히 살피고 그 내용을 메모하였다. 진열관과 박물관에서는 촬영을 허가하지 않기 때문에 메모에 의존할 수밖에 없어 처음에는 상당히 어려움이 많았다. 다행히 수많은 한국 관광객들 왜곡된 내용을 촬영해 사진을 제공해 주어 완벽한 복원이 가능했다.

오녀산산성 사적진열관 바깥 모습

Ⅱ. 요령성 환인현 「오녀산산성사적진열관(五女山山城史迹陳列館)」에 전시된 고구려 왜곡 사례

오녀산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뒤 우리나라의 읍에 해당하는 환인현이 마치 새롭게 태어난 도시처럼 바뀌었다. 거리와 주요 건물에는 「고구려 수도의 유적을 보호하고, 중화민족의 찬란한 역사를 전시하자(保護高句麗都城遺迹 展示中華民族輝煌歷史)」, 「오녀산산성 세계문화유산 등록 성공을 열렬히 경축한다(熱烈慶祝五女山山城申報世界文化遺産成功)」는 현수막들이 걸려 있어 고구려 유적의 세계유산 등록에 대한 이곳 현지의 열기를 바로 느낄 수 있다.
환인에서는 세계유산 등재가 확정되기 이전인 6월15일부터 이미 경축행사가 시작되어 7월15일까지 계속되었다고 한다. 행사를 위해 정부에서 200만 위안(3억원)이 지원되었다. 이 지원금으로 환인현에서는 고구려와 오녀산성을 주제로 한 그림전시회와 춤·노래공연이 한 달간이나 계속되었다. 농촌 각 마을에서 참석한 공연팀과 랴오닝(요령)성에서 파견된 공연팀들이 한 달 내내 대축제를 벌인 것이다. 조선족들도 우리 춤을 추며 참가했다고 한다.“순리대로 한다면 환인이 고구려 첫 수도이니 평양보다 먼저 신청해야 되는 것 아닌가?㰡“ 순진한 한 조선족 노인의 질문이 가슴을 때린다.
혼강 가의 축하 행사장에는 ‘고구려 문화예술 주(周) 오녀산의 여름-고구려 첫 왕도 환인 오녀산성’(주최 : 중국 환인만족자치현 위원회, 중국 환인만족자치현; 후원 : 중국환인만족자치현 위원회 선전부,중국환인만족자치현 문화국)이라 쓰여 있었다. 세계유산에 등록된 뒤 환인현의 현장, 부현장 등 3명은 1등 공(功), 선장부장, 문화국장 등 3명은 2등 공, 부선전부장 등 3명은 3등 공으로 9명이 표창을 받았다고 한다. 중국이 세계유산 등록에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심각한 역사왜곡은 환인현이 세계유산을 신청하면서 만든 「오녀산산성 사적진열관(史迹陳列館)」에서 볼 수 있었다. 진열관은 세계유산 심사를 받기 한 달 전인 2003년 7월초에 시작하여 8월11일까지 급조, 같은 달 30일 개관하였다. 전시 출토유물 202점과 복제유물 145점을 전시하였는데 화살촉 같은 유물을 빼놓고는 대부분 복제유물이다. 그러나 발굴 당시의 평면도와 시대별로 분류한 유물 전시를 통해 오녀산성의 발굴결과를 입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이 진열관에는 고구려가 중국 땅에서 건국되었음을 집중 부각시키기 위한 노력이 곳곳에 보였다.

1. 머리말(前言)에 나타난 고구려사 왜곡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웅장한 오녀산성의 대형 사진이 시원하게 장식되어 있고 오른쪽에 머리말이 걸려 있다.

“문헌에 흘승골성이라고 기재된 오녀산성은 요령성 환인현 오녀산 위에 자리잡고 있는 중국 동북지구의 고대 소수민족 고구려가 창건한 초기의 수도이다.
… 오녀산성은 중국 북방 선주민들이 구축한 산성의 전통을 계승하고, 성터의 선택, 성 지역의 포국, 성벽 쌓는 방법 및 석재 가공 같은 방면에서는 위대한 창조력을 발휘하여 일종의 아주 특수한 산성 건축형식을 형성하였다. 중국 고대 성(城)건축사에서 찬란한 한 페이지를 남겼다.
(五女山山城卽文獻記載的紇升骨城, 位于遼寧省桓仁縣五女山上, 是中國東北地區古代少數民族高句麗創建的早期王都
…五女山城繼承了中國北方先民構築山城的傳統, 在城址選擇, 城區布局, 墻體砌築方法以及石料加工等方面又有很大的創新, 形成了一種十分特殊的山城建築形式, 在中國古代城建史上留下了光輝的一項)”

주된 내용은
① 오녀산산성은 중국 동북지구 고대 소수민족 고구려가 창건한 초기 왕도이다.
② 오녀산성은 중국 북방 민족의 축성법을 이어받았고, 중국 고대 성곽건축사에 빛나는 한 페이지를 남겼다.
는 것으로, 고구려를 세운 고구려가 중국의 소수민족이었고, 오녀산성은 중국의 축성법을 이어받았으며, 결국 중국 건축사를 빛냈다는 내용으로 이 글을 보는 관람객들은 처음부터 고구려가 중국의 역사로 인식하도록 한 것이다. 

2. 연표에 나타난 고구려사 왜곡

바로 옆에 있는 고구려사 연표는 중원왕조기년/고구려 왕계 및 재위기간/중요 사실로 나누어 만든 표인데, 맨 앞 머리에 중국의 왕조에 따라 고구려사를 분류하고, 그 중국사에 따라 고구려의 왕과 재위기간을 쓴 뒤, 중요사실은 중국과 관련된 사실만 뽑아 적었다.

먼저 BC 108년 한나라가 현토를 세웠다는 사실을 쓰고, 이어서 BC 82년에 현토를 고구려현으로 옮겼으며, 바로 그 한나라 현토에 BC 37년 주몽이 고구려를 세웠다는 것을 강조하여 고구려가 한나라 현토군에서 세워진 것으로 되어 있다. 그 뒤 시대에는 주로 주변국과 전쟁한 기록과 고구려 왕이 시조사당에 와서 제사지냈던 기록을 다루었고 특히 고구려가 조공한 사실과 책봉 받은 사실을 주로 기록하여 보는 사람들이 바로 ‘고구려는 중국에 조공을 바쳤고, 벼슬을 받아 통치한 지방정권’이라는 사실로 오인하도록 표를 작성하였다. 

<표 1>  고구려사 연포

중원왕조 기년 고구려 왕계 및 재위 기간

(서기) 중요 사실 1 한(漢) 武帝 (元封) 3년 서기전 108년 한나라 현토, 낙랑, 진번, 임둔 사군 설치. 현토군 아래 고구려현 설치. 2 한(漢) 昭帝 始元 5년 서기전 82년 현토군 치소를 고구려현으로 옮김. 3 한(漢) 元帝 建昭 2년~  成帝 鴻嘉 2년 시조 동명성왕(주몽)
(서기전 37~19년) 서기전 37년 주몽이 흘승골성(지금의 오녀산산성) 도읍을 세움.
4 한(漢) 成帝 鴻嘉 2년~  王莽 天鳳 5년유리명왕(유리)
(서기전 19~서기 18년) 서기 3년, 국내성(현 길림성 집안)으로 수도 옮김. 왕망이 고구려를 ‘하구려’로 바꿈.
5 왕망(王莽) 천봉 5년~  漢 光武帝 建武 20년대무신왕(무휼)
(서기 18~44년) 서기 20년 봄, 대무신왕 동명왕 사당(廟) 세움. 32년, 한 광무제가 처음으로 고구려후를 고구려왕으로 봉함.
6 한(漢) 광무제 건무 20년~ 24년민중왕(해색주)
(서기 44~48년)
7 한(漢) 광무제 건무 24년~ 29년모본왕(해우)
(서기 48~53년)
8 한(漢) 광무제 29년~  한 質帝 本初 원년태조대왕(궁)
(서기 53~146년) 고구려가 한군(漢郡) 침입, 현토 태수 요광(姚光)이 군 이끌고 격퇴하였다.
9 한(漢) 질제 본초 원년~ 한 桓帝 延熹 8년차대왕(수성)
(서기 146~165년) 차대왕 현토군에 복속하기 위해 공물을 바쳤다¹
10 한(漢) 환제 연희 8년~  한 靈帝 光和 2년신대왕(백고)
(서기 165~179년) 167년, 신대왕 졸본(현재 요령성 환인)에서 시조사당에 제사.
11 한(漢) 영제 강화 2년~한 獻帝 建安 2년고국천왕(남무)
(서기 179~197년) 180년 가을, 고국천왕 졸본 시조사당에 제사. 고국천왕 환도산 아래 새 왕도 건설.
12 한(漢) 헌제 건안 2년~魏 명제 태화 워년산상왕(연우)
(서기 197~227년) 198년, 환도성을 쌓았다. 209년, 환도성으로 수도를 옮겼다.
13 위(魏) 明帝 太和 원년~魏  齊王 正始 9년동천왕(위궁)
(서기 227~248년) 228년, 동천왕 졸본에 도착 시조사당에 제사.
14 魏  齊王 正始 9년~진(晋) 武帝 泰始 6년중천왕(연불)
(서기 248~270년) 260년, 중천왕 졸본에 도착 시조사당에 제사.
15 진(晋) 武帝 泰始 6년~진 惠帝 元康 2년서천왕(약로)
(서기 270~292년)
16 진(晋) 혜제 원강 2년 ~ 永康 원년봉상왕(상부)
(서기 292~300년) 296년, 모용선비 고구려를 공격하여 환도에 침입.
17 진(晋) 혜제 영강 원년~진 成帝 咸和 6년미천왕(을불)
(서기 300~331년) 331년, 고구려 진(晋) 서안평 쳐서 차지함. 313년, 낙랑군을 점유하였다.
18 진(晋) 성제 咸和 6년~진 簡文帝 咸安 원년고국원왕(사유)
(서기 331~371년) 332년, 졸본에 도착 시조사당에 제사. 342년, 전연(前燕) 고구려 정벌. 353년, 진(晋) 고국원왕을 낙랑군공에 봉하였다.
19 진(晋) 간문제 함안 원년~진 孝武帝 太元 9년소수림왕(구부)
(서기 371~384년) 372년, 전진(前秦) 불법을 고구려에 보냈다. 이때부터  불교가 고구려에 들어왔다.
20 진(晋) 효무제 태원 9년~태원 17년고국양왕(이련)
(서기 384~392년) 385년, 고구려 요동·현토군 쳐서 차지함. 후연(後燕) 고구려 격퇴하고 2군 수복.
21 진(晋) 효무제 태원 17년~진 安帝 義熙 9년광개토왕(담덕)
(서기 392~413년) 404년, 고구려가 요동을 점유하였다.
22 진(晋) 안제 의희 9년~北魏 孝文帝 太和 15년장수왕(거련)
(서기 413~491년) 414년, 호태왕비 세움. 427년 평양 천도. 재위 기간 중 중원에 30차례 남짓 조공. 진 고구려왕으로 책봉
23 북위(北魏) 효문제 태화 16년~북위 孝明帝 神龜 2년문자명왕(나운)
(서기 492~519년) 북위 고구려왕 나운을 요동군공에 책봉.
24 북위(北魏) 효명제 신구 2년~북위 節閔帝 普泰 원년안장왕(흥안)
(서기 519~531년) 520년, 북위 안장왕을 고구려왕에 책봉. 521년, 안장왕 졸본에 도착 시조사당에 제사.
25 북위(北魏) 절민제 보태 원년~東魏 孝靜帝 武定 3년안원왕(보연)
(서기 531~545년) 532년, 북위 안원왕을 고구려왕에 책봉.
26 동위(東魏) 효정제 무정 3년~北齊 文宣帝 天保 10년양원왕(평성)
(서기 545~559년) 550년, 동위 양원을 고구려왕에 책봉. 552년 장안성 쌓음.
27 북제(北齊) 문선제 천보 10년~隋 文帝 開皇 10년평원왕(양성)
(서기 559~590년) 560년, 평원왕 졸본에 도착 시조사당에 제사. 586년, 평원왕 장안성으로 수도를 옮김.
28 수(隋) 문제 개황 10년~수 煬帝 大業 14년영양왕(원)
(서기 590~618년) 598년, 수나라 고구려 정벌.
29 수(隋) 양제 대업 14년~당太宗 貞觀 16년영류왕(건무)
(서기 618~642년) 619년, 영류왕 졸본에 도착 시조사당에 제사.
30 당(唐) 태종 정관 16년~당 高宗 總章 원년보장왕(장)
(서기 642~668년) 666년, 고구려 대장 천남생(천남생) 당에 투항. 668년, 당 고구려 정벌, 고구려 멸망. 당 평양에 안동도호부 설치 

자료 : 중국 요령성 환인현 ‘오녀산산성 사적진열관’에 진열된 표를 옮김(2004년 8월 29일 작성)
  주 : 정리번호는 필자가 붙인 것임
  1) : 삼국사기에는 태조대왕 때 기사로 나온다(遣使如漢 貢獻方物 求屬玄菟). 그러나 그 주에 통감에는 ‘그 해 3월 고구려 왕이 예맥과 함께 현토를 쳤다’고 하였으므로, 복속하기를 구하였는지 침략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하나는 잘못이다고 하였다. 이 기록은 우선 연대를 잘못하였고, 그 내용 또한 불분명하다. 

3. 전시장 안의 고구려사 왜곡 - 고구려는 한나라 영토에 세워졌다.

전시장 안에 걸려 있는 「고구려 건국」과 「현토군과 고구려 건국」이라는 두 설명문을 보면 고구려는 한나라 땅에서 건국된 것으로 되어 있다.

고구려 건국

고고학 발굴은 일찍이 신석기 후기에 오녀산 위에 이미 인류의 활동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전국시대 후기에서 한나라 초기에 이르는 시기 이 지대는 차츰 번영하기 시작하였다. 한 무제 원봉 3년(서기전 108년) 현토, 낙랑, 진번, 임둔 4군을 설립하였는데, 그 가운데 현토군 아래 고구려현이 설립되었다. 오녀산 주위 땅은 바로 고구려현에 속했다. 선진적인 한나라 문화의 영향을 받아 곳에 사는 사람들이 생산력 수준이 빠르게 높아졌다. 서기전 37년 부여왕자 주몽이 졸본지구(지금의 요령성 환인현)에서 고구려를 세우고 오녀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정하였다.
高句麗建國.
考古發現證明 早在新石器時代晩期 五女山上就了人類活動. 戰國晩期至漢代初期 這一地帶漸趨繁榮. 漢武帝元封三年(公元前108年) 設立了玄菟, 樂浪, 眞番, 臨屯四郡 其中 玄菟郡下設有高句麗縣. 五女山周圍卽地屬高句麗縣. 受到先進的漢文化影響 當地居民的生産力水平迅速提高. 公元前37年 扶餘王子朱蒙在卒本地區(今遼寧省桓仁縣 建高句麗國 築城立都于五女山上

현토군과 고구려의 건국

“현토군은 한나라 무제 3년(서기전 108년) 설치되었다. (현토)군의 치소는 처음 옥저성에 두었다가 한나라 소제 시원 5년(서기전 82년) 고구려현(현재 신빈현 영릉진 영릉남성터)으로 옮겼다. 서한의 정치, 경제, 문화, 군사 같은 여러 가지 강렬한 영향 아래 주몽이 현토군 경내에다 고구려 나라를 세웠다. 고구려 왕은 (중국의)중앙정권이 내린 조복(朝服)을 받고 그 호적을 고구려 현령이 관장하였다. 여기서 고구려 민족정권과 중앙 왕조의 예속관계가 확립되었다.㰡“
玄菟郡與高句麗建國
玄菟郡設于漢武帝三年(公元前108年). 郡治初置于沃沮城 漢昭帝始元五年(公元前82年) 西遷至高句麗縣(今新賓縣永陵鎭永陵南城址). 在西漢政治, 經濟, 文化, 軍事等諸多因素的强烈影響下 朱蒙在玄菟郡境內建立了高句麗國. 高句麗王接受中央政權賜予的朝服 其戶籍由高句麗縣令掌管 由此確立了高句麗民族政權與中央王朝的隸屬關係

이 내용에서 고구려와 중국의 중앙왕조가 예속관계가 확립된 이유를 두 가지로 간추릴 수 있다. 첫째 서기전 108년 한나라 현토군에 고구려현이 설치되었는데, 서기전 82년 현토군의 치소가 옥저성에서 고구려현 옮겼다. 바로 이 고구려현에서 주몽이 고구려를 세웠다는 것이다. 이 논리가 바로 「고구려는 중국 땅에 건국되었기 때문에 중국의 역사」라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이 논리는 아주 교묘하게 연결해 놓았기 때문에 아무 역사적 지식이 없는 중국인은 물론 역사를 아주 깊이 알지 못하는 한국 관광객들로 그대로 믿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 왜곡되어 있다. 즉 ‘고구려는 부여 땅에 세웠다’는 것이다.  중국에서 주장하고 있는 이러한 논리의 바탕은 다음과 같은 기록에서 온 것이다. 

<후한서> (한나라) 무제가 조선을 멸망시키고 고구려를 현으로 만들어서 현토에 속하게 하고 북 치고 피리 부는 악공을 하사하였다.
  (武帝 滅朝鮮 □高句麗爲縣 使屬玄菟 賜鼓吹伎人)

<삼국지>
한나라 때 북 치고 피리 부는 악공을 하사하였고, (고구려는) 항상 현토군에 나아가 (한나라의) 조복(朝服)과 의책(衣幘)을 받아갔는데, 그에 따른 명단은 (현토군의) 고구려현 현령이  문서를 관장하였다. 그 뒤에 차츰 교만 방자해져서 다시는 (현토)군에 오지 않았다. 이에 동쪽 경계에 작은 성을 쌓고 조복과 의책을 그 안에 놔두면, 해마다 와서 가져갔다. 지금도 오랑캐들은 이 성을 책구루(幘溝漊)라 부른다. 구루(溝漊)란 (고)구려 사람들이 성(城)을 일컫는 말이다.
漢時 賜鼓吹技人 常從玄菟郡 受朝服衣幘 高句麗令主其名籍(元本, 令主 作今王 誤) 後稍驕恣 不復詣郡(元本 詣 作諸 誤) 於東界築小城 置朝服衣幘其中 歲時來取之 今 胡猶名此城爲幘溝漊 溝漊者 句麗名城也

원문을 잘 살펴보면 중국측이 자의적인 해석이나 아전인수격인 해석으로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 한 무제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고구려를 현으로 편입시켰다는 것은 한나라가 침입해 점령하기 전에는 고조선의 땅이었고, 그 고조선 안에 이미 고구려가 있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한 무제의 고구려현 편입 사실이 고구려가 중국사라는 것을 증명하기 보다는 오히려 고구려의 정체성을 더 강화시켜주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고구려는 한나라 현토 땅에 세워졌다는 문제

추모(주몽)가 고구려를 세운 서기전 37년 전 홀본(졸본) 땅은 한나라 현토가 아니라 이미 부여의 땅이 되어 있었다. 삼국사기에 보면 ‘주몽이 졸본부여에 이르렀다. (그 졸본부여의) 왕에게 아들이 없었는데 주몽을 보고는 범상치 않은 사람인 것을 알고 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왕이 죽자 주몽은 왕위를 이었다’고 해서 추모가 고구려를 세운 것은 현토 땅이 아니라 졸본부여 땅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여에서 온 추모가 만일 현토 땅에 나라를 세웠다면 한나라가 그것을 그대로 두지 않았을 것이고, 기록에도 한나라 현토 땅이라고 했을 것이다. 여기서 현토군 아래 있던 고구려현과 새로 세운 고구려국과는 전혀 다른 나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새로 세운 고구려국이 이전 현토군 고구려현에 속했던 고구려인들을 대거 받아들였을 가능성은 크다. 하나 확실한 것은 고구려가 나라를 세운 지역은 이미 한나라의 지배를 벗어나 부여의 영역 안에 편입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BC 108년 고조선이 멸망하고 현토가 들어섰을 때는 현토군의 치소가 동옥저에 있었는데 고구려인들이 그들은 고구려현 서쪽으로 몰아낸다. 㰡”삼국지㰡• 「동옥저」에 보면 “뒤에 이·맥의 침략을 받아 군을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기니 지금의 이른바 현토의 고부(古府)라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後爲夷貊所侵 徙郡句麗西北 今所謂玄菟古府是也)”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이맥(夷貊)이란 고구려의 종족을 말하는 것으로 이 때 이미 현토의 중심지는 고구려를 벗어난 것이다. 이 기사는 BC 75년(원봉 6년)이므로 33년 뒤 현토는 사실상 크게 축소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뒤 고구려는 한나라의 명령을 잘 따르지 않은 것으로 나타난다.
앞에서 인용한 삼국지를 보면, 「그 뒤에 차츰 교만 방자해져서 다시는 (현토)군에 오지 않았다」고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고. 한나라는 할 수 없이 “동쪽 경계에 작은 성을 쌓고 조복과 의책을 그 안에 놔두면, 해마다 와서 가져갔다”고 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BC 75년 이후에는 고구려현이 자치를 행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이 때는 한나라보다는 오히려 부여의 관할하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런 지역에서 추모는 서기전 37년 정식으로 개국하게 된 것이다.

중국 학자들의 연구도 현토의 고구려현과 추모가 세운 고구려는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과거 일반인들은 고구려는 모두 주몽이 세운 고구려를 가리킨다고 했다. 그러나 주몽의 고구려는 한 원제 소건 2년(서기전 37년)에 세운 것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한무제 원봉 4년(서기전 108년)에 이미 존재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최초로 출현한 고구려는 주몽이 세운 고구려가 아니다.」
이처럼 대부분의 중국 학자들은 고구려가 부여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런데 환인의 진열관에서는 고구려가 건국한 땅이 한나라 땅이었고 고구려는 바로 이 한나라 현토 땅에서 것처럼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이 진열관에서 이 문제를 더욱 부각시키기 위해 현토군에서 출토된 유물들까지 전시하고 있어 그 심각성이 한층 더하다.

셋째, 호적을 고구려 현령이 관리하였다는 문제

한나라의 현토군에 점령당하고 있던 고구려현은 당연히 한나라의 신하로서 예를 차렸다. 그 대표적인 것이 한나라의 음악을 받아들이고, 한나라의 조복과 의책(옷과 갓)을 하사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신하로서의 예는 얼마 가지 않고 중단되었다. 원문에 보면 「차츰 교만 방자해져서 다시는 (현토)군에 오지 않았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진열관에는 이 부분이 삭제되어 마치 그러한 활동이 계속된 것처럼 하였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기사는 한나라 현토군에 속한 고구려현의 일이지 추모(주몽)가 세운 고구려국이 악공을 받고 조복을 받았다는 것은 아니다. 이 점은 이미 앞에서도 보았듯이 중국학자들도 인정하는 것인데 이 진열관에서는 교묘하게 묶어서 보는 사람들이 고구려가 한나라 땅에서 세워졌다고 인식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호적을 고구려 현령이 관리하였다는 문제」는 정말 놀라운 발상이다. 이 문장을 잘못 보면 마치 중국이 고구려의 호적까지 관리하였다는 것처럼 오해하도록 하였다.  더구나 「여기서 고구려 민족정권과 중앙 왕조의 예속관계가 확립되었다」고 해서 이 기록이 고구려가 지방정권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왜곡하였다. 그러나 이 문구는 「한나라 때 북 치고 피리 부는 악공을 하사하였고, (고구려는) 항상 현토군에 나아가 (한나라의) 조복(朝服)과 의책(衣幘)을 받아갔는데, 그에 따른 명단(名籍)는 (현토군의) 고구려현 현령이 관장하였다」고 했듯이 호적이 아니라 하사품에 대한 목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명적’이란 단어는 호적이라는 뜻으로 많이 쓰인다. 그러나 이 문장의 문맥을 따져 보면 「그 명단(其名籍)」이라고 해서 「하사품」이라는 앞의 문장을 받는 문장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더구나 그것을 현토군에서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고구려 현령이 주관하는데 이것이 왜 고구려와 중국 중앙 왕조 사이의 예속관계를 나타내는 것인지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결론이다.
앞으로 박물관이 될 이 진열관은 고구려 역사의 중국역사임을 국내외 관광객에게 주입하는 교육장용으로 개발했음을 쉽게 알 수 있었다. 현지 안내인의 말에 따르면 진열관에 쓰인 모든 설명서는 요령성 문화국에서 내려온 것이라고 한다. 

4. 중국의 지방정권을 다시 한 번 강조한 ‘맺는말(結束語)’

전시장 입구에서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한 전시장은 전시를 마감하는 맺는말에서도 다시 한 번 고구려가 중국의 소수민족이고 지방정권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전문을 복원하여 우리말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고구려는 중국 역사상 한나라부터 당나라 때까지 활략한 동북 소수민족이다(Koguryo is an ethnic minority that thrived in the northeast area of China from the Han through Tang Dynasties). 그 민족이 건립해 중앙왕조에 예속하였던 고구려 지방정권은 700년 남짓 존속하며 중국과 동북아 역사에서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 민족은 중원문화의 끊임없이 흡수한 바탕 위에 홀로 특색 있는 고구려 민족문화를 창조하였다. 이 민족과 그 민족이 창건한 왕국은 이미 역사적 긴 강으로 사라졌으나 동북 각지의 성터, 무덤 같은 역사 유적에 남은 고구려 문화는 변함없는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 고구려의 조기 왕도와 조기 산성을 대표하는 오녀산산성은 그 높고 큰 성벽, 완비된 방어체계와 풍부한 문화 내용 때문에 고구려 정권 초창기 역사를 보여주는 사진이며, 우리가 이 오랜 민족의 조기 역사와 문화를 인식하는데 의심할 수 없는 존재이며 영원한 매력이다.   
高句麗是中國歷史上活躍于漢唐時期的東北少數民族 它建立的隸屬于中央王朝的高句麗地方政權存續了700餘年 在中國乃至東北亞歷史上都産生了重要影響 它在不斷吸收中原文化的基礎上 創造了獨具特色的高句麗民族文化 這個民族和它創建的王國已湮沒在歷史的長河中 但高句麗文化在東北各地高句麗城址, 墓葬等歷史遺存中仍然得到體現 作爲高句麗的早期王都和早期山城代表的五女山山城 其高大的城牆, 完備的防禦體系和豊富的文化內涵 是高句麗政權草創期的歷史寫眞 對于我們認識這個古老民族的早期歷史和文化无疑存在着永恒的魅力


Ⅲ. 집안박물관에 전시된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집안박물관은 전시물의 90%가 바뀔 정도로 완전히 새 단장을 하였다. 전시물 뿐 아니라 전시장도 새로워졌다. 한쪽에 있던 상점을 없애고 전시장을 넓혔을 뿐 아니라 전시도 깔끔하게 하였고 벽 한 면은 대형 위성사진을 이용하여 집안 사람은 자기 집을 짚어낼 수 있을 정도이다. 집안박물관이 새 단장을 한 것은 유물만이 아니고 모든 설명문도 완전해 새로 바꾸었는데 그 내용이 모두 고구려사가 중국사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작성한 것들이다. 

1. 박물관 머리말과 유물의 연대

박물관 가운데에 있는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천장까지 닿는 대형 광개토태왕비 탁본이 걸려있고 그 앞에는 1.5m쯤 되는 돌모양의 표지판에다 박물관을 안내하는 첫 인사인 머리말(前言)이 쓰여 있다.

「고구려는 중국 동북지방의 고대문명 발전과 생산과정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중국 동북지방의 소수민족이며 지방정권 가운데 하나이다」
高句麗是對東北亞地區古代文明發展進程産生過重要影響的中國東北少數民族與地方政權之一.

이 한마디로 박물관에 들어서는 관람객에게 핵심적인 메시지를 전한다. 물론 중국어를 모르는 한국인 관람객(금년만 1만명이 넘었다고 한다)들은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갈 수 있다. 그러나 이 문구는 한국인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 바로 중국인을 목표로 한 것이다.
고구려가 한국사라고 알고 있는 극히 일부분의 학자나 역사를 알고 있는 조선족들은 의아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일반 중국인에게는 입구부터 고구려를 자기 역사로 알도록 역사왜곡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동쪽 방에 들어가면 그 강도는 더욱 심해진다. 먼저 나타난 「고구려 조공·책봉 조견표(高句麗朝貢受封簡表)」에는 고구려가 중원의 각국에 조공을 바치고 벼슬을 받았던 14번을 표로 만들어 쉽게 볼 수 있도록 해 놓았다. 고구려 705년 동안 외교적 관례로 그것도 50년 만에 한 번 정도 있던 행사를 가지고 마치 고구려는 항상 고구려의 벼슬을 받아 행세한 중국의 지방정권처럼 왜곡해 놓았다.
고구려 705년 동안 중국에서는 35개 나라가 망했으며 그 가운데 50년도 못 가고 망한 나라가 절반이 넘는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말도 안 되는 왜곡인 것이다. 도대체 705년이나 간 고구려가 35개 나라 가운데 어떤 나라의 지방정권이란 말인가?
한 가지 더 있다. 바로 「고구려 유민 천도 정황(高句麗流民遷度情況)」이라는 표이다. 이것은 고구려가 멸망하고 대부분의 고구려인들이 중국 땅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여러 가지 기록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그러나 이런 기록과 통계들은 고구려 땅에 그대로 남아 고구려를 이은 발해의 주민이 된 주민의 10분의 1밖에 되지 않은 수를 교묘하게 이용한 것이다.
유물을 관람하면서도 끊임없이 중국 연대를 생각하도록 해 놓았다. 고구려 유물을 이야기 할 때는 그 유물이 고구려의 초기라던가 후기, 또는 무슨 왕대의 것이라고 고구려 연대로 표기해야 하는데 모두 한-왕망-후한-위-진-제-양-진-수-당 식으로 중국의 왕조로 설명하고 있어 이곳에 들어서는 중국인은 고구려가 중국의 소수민족사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인지하도록 했다.

2. 고구려 역사에 대한 중요한 기술

박물관과 광개토태왕비에 대한 설명은 반드시 훈련된 박물관 직원이 하도록 되어 있다. 먼저 서쪽에 있는 방부터 관람을 시작하면 맨 먼저 시작되는 것이 「고구려 역사에 대한 중요한 기술(高句麗歷史重要記述)」이다. 이 내용을 좀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제목은 고구려 역사이지만 모두가 고구려 건국에 관한 내용이다. 한서, 후한서, 삼국지, 태왕비, 위서 같은 사서들을 인용하여 「고구려는 한나라가 세운 현토에서 일어났으므로 중국 역사라는 것」을 부각시키는 말만 교묘하게 엮어 놓았다. 현토군의 고구려현은 아직 추모(주몽)의 고구려가 성립되기 이전의 역사인데 마치 고구려가 한나라의 한 개의 현인 것처럼 왜곡하고 있으며 모르는 사람은 마치 고구려 전체가 중원의 한 현인 것처럼 오해할 수 있도록 했다. 이 문제는 「오녀산산성사적진열관」을 설명하면서 자세하게 설명하였기 때문에 여기서는 전시된 내용만 밝혀 둔다.

1. 현토·낙랑은 (한나라) 무제 때 설치 …. <한서 지리지>
    玄菟·樂浪武帝時置 … 

2. 무제 … 조선을 멸하고 … 고구려를 현으로 만들어 현토에 딸리게 하였다. <후한서 고구려전>
  武帝 …(滅朝鮮)… 以高句驪爲縣 使屬玄菟

3. 고구려는 요동 동쪽 1000리에 있고, 남으로 조선과 예맥, 동으로 옥저, 북으로 부여와 이어져 있으며, 환도 아래 도읍을 세우웠다. 사방이 2000리가 되고 3만호이다. … 한나라 때 한나라 때 북 치고 피리 부는 악공을 하사하였고, (고구려는) 항상 현토군에 나아가 (한나라의) 조복(朝服)과 의책(衣幘)을 받아갔는데, 그 명단은 (현토군의) 고구려현 현령이  문서를 관장하였다.  <삼국지 고구려전>
高句麗在遼東之東千里 南與朝鮮·濊貊 東與沃沮 北與夫餘接 都於丸都之下 方可二千里 戶三萬 … 漢時賜鼓吹技人 常從玄菟郡 受朝服衣幘 高句麗令主其名籍

4. 예날 시조 추모왕이 그 기틀을 마련하였다. 북부여에서 나왔고 천제의 아들이며 어머니하백녀의 아들이다. <호태왕비>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天帝之子, 母河伯女郞

5. 주몽이 흘승골서에 이르러 거주지를 정하고 (국호를) 고구려라  부르고, 이로써 성씨를 삼았다. <위서 고구려전>
朱蒙至紇升骨城 遂居焉 號曰高句麗 因以爲氏焉

3. 고구려 조공·책봉 조견표(高句麗朝貢受封簡表)

조공과 책봉문제는 한중간의 역사인식에서 가장 크게 차이나는 사실이다. 중국은 고구려 705년 동안 계속 중국의 중원왕조에 조공을 받치고 벼슬은 받아(冊封) 고구려를 다스렸기 때문에 국가가 아니고 중국 변방의 소수민족 지장정권이라는 주장이다. 집안박물관에도 이와 똑 같은 이유에서 동쪽 전시실 바로 첫 입구에 이 표를 전시하고 있다.

<표 2> 고구려 조공·책봉 조견표(高句麗朝貢受封簡表)

서기왕호중원왕조조공 정황 12 유리왕 왕망신정권고구려 왕의 이름을 하구려(下句麗) 후로 바꾸었다. 32 대무신왕 동한 사신을 보내 조공하자 광무제가 그 왕호를 복원하였다. 111 태조대왕 동한 한나라에 사신을 보내 현토에 속하기를 구했다. 233 동천왕 삼국·위 사신을 보내 위(魏) 명제가 연호를 바꾼 것을 축하했다. 355 고국원왕  전연인질과 공물을 바치고,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 영주자사(營州刺史) 낙랑공(樂浪公) 고구려왕을 책봉 받았다. 415 장수왕 동진  사지절도독(使持節都督) 영주제군사(營州諸軍事) 정동장군 고구려왕 낙랑공을 책봉 받았다. 420 장수왕 남조 송 정동대장군을 책봉받았다. 492 문자왕 북위 사지절도독 요해제군사(遼海諸軍事) 정동장군 영호동이중랑장(領護東夷中郞將) 요동군개국공(遼東郡開國公) 고구려왕을 책봉받았다. 494 문자왕 남조 제 사지정산기상시(使持節散騎尙侍) 도독영주이주제군사(都督營平二州諸軍事) 정동장군 고구려왕 낙랑공을 책봉 받았다. 520 안장왕 남조 양영동장군 도독영평이주제군사 고구려왕를 책봉받았다. 550 양원왕 북제 사지절시중(使持節侍中)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영호동이교위(領護東夷校尉)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을 책봉받음. 562 평원왕 남조 진영동장군을 책봉받았다. 590 영양왕 수 상개부의동삼사(上開府儀同三司) 습작요동군공(襲爵遼東郡公) 그리고 다음해 고구려왕을 책봉받았다. 624 영류왕 당 상주국(上柱國) 요동군공 고구려왕을 책봉받았다   
   
자료 : 중국 길림성 집안시  ‘집안박물관’에 진열된 표를 옮김(2004년 8월 29일 작성)

<표 2>만 보는 입장객들은 마치 고구려가 705년간 계속 조공과 책봉으로 이어진 것처럼 오해할 수 있다. 조공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한 일반 관람객에게는 그렇게 이해할 수밖에 없도록 유도한 것이다. 그러나
조공과 책봉이란 당시 동아시아의 국제관계에서 중·외관계를 잇기 위해 주고받는 외교적 관례였다. 만일 조공과 책봉이라는 고대의 외교 관례를 가지고 고구려사가 중국사라면 신라, 백제, 고려, 조선, 왜, 일본, 월남, 터키 같은 모든 역사가 중국 역사가 되는 것이다.
<표 3>을 보면 중국의 주장이 얼마나 단순하며 아전인수 격인 것인지 알 수 있다. 고구려는 한 나라가 705년 동안 안정적인 지속을 한 반면 소위 중국에서는 35개의 나라가 이합집산을 계속하는 혼란기였다. 중국의 주장대로라면 소수민족 지방정권은 705년이란 긴 세월동안 한 나라로서 태평성대를 누리고, 중앙 정부인 중원은 35개의 나라로 수없이 존망을 계속했다는 우스꽝스러운 논리가 형성되며, 고구려가 도대체 35개 나라 가운데 어느 나라의 지방정권인가 하는 의문에 봉착하게 된다. 

<표 3> 고구려 시기 중국의 이합집산

고구려

28대 705년 (BC 37~ AD 668년)

중국 (지속 연수)

한(234년)전한(215년), 신(15년), 갱시제, 후한(196년) 삼국시대(60년) 촉(43년), 오(59년), 위(46년), 진(153년)진(52년), 동진 (103년) 5호16국(137년) 북방민족(흉노, 갈, 선비, 저, 강) 지배전월(22년), 북양(43년), 하(26년), 후월(34년), 전연(22년), 후연(25년), 서연(10년), 남연(13년), 서진(47년), 남양(18년), 성(46년), 전진(61년), 후양(7년), 후진(34년), 한(26년), 북연(28년), 전양(64년), 서양(22년)남북조시대(169년)남조(한족) - 송(60년), 제(24년), 양(56년), 진(33년) 북조(북방민족) - 북위(149년), 서위(22년), 동위(17년), 북제(28년), 북주(26년)수(38년) 수(38년)당(50년)당(290년)
  資料: 徐吉洙, 㰡”大陸에 남은 高句麗㰡•, 高句麗硏究會, 2003

4. 고구려 유민(遺民)의 정착 현황(高句麗流民遷度情況)

집안박물관 동쪽 방에 고구려가 멸망한 뒤 고구려 유민들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사서에 나온 내용을 뽑아서 전시하고 있다. 

1. 당 정관 19년(서기 645년) ~ 당 태종 고구려를 치고, 「요주·개주·암주 3주의 호구를 옮겨 중국으로 들어간 자가 7만 명이었다.」 <당회요>.
  唐貞觀十九年(公元六四五年) 唐太宗征高句麗, 「凡徙遼蓋巖三州戶口入內地 前後七萬餘人」 (㰡”唐會要㰡•)

2. 당 총장 2년(서기 669년) ~ 당이 고구려를 멸한 뒤 「고구려의 28,200호를 … 내지로 옮겼다. 래(萊)·영(營) 두 고을에 옮겼다가 강(江)·회(淮) 남쪽과 산남·병(幷)·양(凉) 서쪽의 비어 있는 곳에 배치하였다.」 <구당서 고종기>

唐總章二年(公元六六九) 唐滅高句麗後 「移高麗戶二萬八千二百…將入內地. 萊·營二州般次發遣 量配於江·淮以南及山南·幷·凉以西請州空閑處安置.」 㰡”舊唐書 高宗紀㰡•

3. 당 의봉 원년(서기 676년) ~ 고 장(고구려 보장왕의 이름)이 모반을 꾀하여, 「공주로 유배시키고 나머지 사람들은 하남·농우 같은 여러 주로 분산하여 옮겼는데 그 가운데 빈약한 자는 안동성 부근에 머물러 살게 하였다」

唐儀鳳元年(公元六七六年) 高藏謀叛 「配流邛州 幷分徙其人 散向河南·隴右諸州 其貧弱者 留在安東城傍」

4. 당 고종 건봉 원년(서기 666년) ~ 고구려 귀족 연정토가 12개 성, 763호, 3543명과 함께 신라로 투항해 들어갔다. 당 총장 2년(서기 669년) ~ 보장왕의 서자인 「안승이 4천 여 호를 이끌고 신라로 투항하였다. <삼국사기>     
唐 高宗 乾封 元年(公元六六六年)  高句麗貴族 淵淨土 「以城十二 戶七百六十三 口三千五百四十三」 投入新羅; 唐總章二年(公元六六九年)  寶藏王之庶子 「安勝率四千餘戶 投新羅」 <三國史記>

5. (고구려인은) 돌궐과 말갈 등지로 나누어 들어가 고씨 임금은 마침내 대가 끊어졌다. <구당서 고구려전>
唐儀鳳二年(公元六七七年) ~ 移高句麗人 「分投突厥及靺鞨等 高氏君長遂絶矣」 <㰡”舊唐書㰡• 「高麗傳」,

이 설명문의 목적은 결국 고구려가 멸망한 뒤 고구려 사람들은 대부분 중국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이 주장은 중국 학자들이 고구려가 중국사라는 것을 증명하는데 자주 사용하는 논리이다. 우선 중국의 동북공정을 주도하는 변강사지연구중심의 홈페이지에 나온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원래 고구려는 70여 만의 인구가 있었다 (高句麗原有七十餘萬人)였는데, 멸망후 1) 전체의 절반 가까운 30만 - 중원으로 이주하였다, 2) 10만 정도 - 신라(지금의 조선족), 3) 10만 정도 - 靺鞨 (渤海) - 금나라 여진 - 청나라 만주족, 4) 1만 명 정도 - 돌궐(突厥), 5) 나머지 전쟁에 죽은 사람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주장은 고구려 인구의 추정부터가 터무니없는 것이다.
㰡”구당서㰡• 「고려」전에 “지난날 고(구)려국은 176성(城), 69만 7천호(戶)였는데 …”라는 기록이 있다. 69만 호(戶)일 경우 한 호에 5명씩 잡고 약 (69만×5=)345만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고구려 인구를 고작 70만으로 본 것은 어이가 도저히 이해가 가지가 않는다. 고구려가 망하고 발해가 서는 30년 동안 많은 고구려인들이 당, 신라, 돌궐, 일본 등지로 갔지만 많아야 45만은 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머지 300만 고구려인은 다 어디로 갔는가? 발해인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요, 금, 원, 명, 청, 만주국으로 이어진 것이다.

<표 4>고구려 멸망 뒤 고구려 땅을 지배한 국가와 민족

  고구려(BC 37-668) - 고구려족
  발해(699-926, 228년) - 발해족(고구려 후예)
  요(907-1125, 210년) - 거란족
  금(1115-1234, 120년) - 여진족(발해의 후예)
  원(1206-1368, 109년) - 몽골족
  명(1368-1662, 294년) - 한족 + 여진족
  청(1616-1911, 297년) - 만주족(여진의 후예)
  만주 군벌과 일본의 각축(1911~1932, 21년)
  만주국(1932-1945, 13년) - 만주족
  중화인민공화국(1948~  ) - 56개 민족

이 가운데 명나라만이 한족의 정권이었고 나머지는 모두가 중원과는 전혀 다른 민족들이었다. 한편 명나라는 현재의 만주지역을 모두 차지하지 못했다. 현재의 압록강 입구 호산(虎山)에서 관전(寬甸), 개원(開原) 밖에는 모두 색외(塞外)로 여진족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명나라 때는 명나라와 여진족이 나누어 차지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종국에 가서는 그 여진족이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전 중국을 차지하게 된다. 이민족이 전 중국을 차지하고 통치한 것은 청나라 때만이 아니고 원나라 때도 마찬가지다. 한편 요나라 때는 북경까지 요나라 땅이었고, 금나라 때는 양자강 근처까지 금나라 땅이었던 것을 보면 중국이 얼마나 오랫동안 이민족의 통치에서 신음했는지를 알 수 있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중국’이라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대 근대에 들어와 통일적다민족국가론을 내 새우며 이런 모든 국가들은 ‘중국’이라는 말에 쓸어 넣으려고 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그 역사의 원 주인이었던 민족이나 관련이 있는 국가들과 마찰을 빗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가 멸망한 뒤 고구려인들이 대부분 중국으로 들어갔다는 주장은 성립될 수 없으며, 이번 기회를 이용하여 동아시아사에서 존재하지도 않은 「중국」이라는 별칭이 가져다 준 역사적 오류를 바로 잡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고구려 이후 중국 한족이 만주를 완전히 차지한 것은 2차대전 이후의 일이다. 따라서 중국은 현재 차지하고 있는 만주 땅에 대한 역사적 뿌리를 찾아야 하는 절실한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이것이 바로 역사왜곡과 동북공정의 가장 근본적 이유이기도 하다.


Ⅳ. 맺는말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환인과 집안에서는 작년 세계유산 등록을 위해 대대적인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이미 역사왜곡을 위한 모든 작업을 마무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박물관과 진열관에 설명된 역사왜곡은 다음 5가지로 간추릴 수 있다.

1. 머리말 - 고구려는 중국 소수민족 지방정권이다.
2. 한나라 현토군의 고구려현 기사 - 고구려는 중국 땅(현토)에 세워졌다.
3. 조공과 책봉에 관한 표 - 고구려는 중원에 조공하고 책봉을 받은 지방정권이다.
4. 고구려 멸망 이후 고구려 유민의 행방 - 고구려인들은 대부분 중국 민족이 되었다.
5. 맺는말 - 고구려는 중국 소수민족 지방정권이다.

여기에서 왜곡된 내용은 박물관에서 처음 한 것이 아니라 이미 학자들에 의해서 연구되어 책으로 나온 것이며 새로운 것은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학문적으로 왜곡된 내용을 고구려 유적이 있는 현장에서 사실로 기정사실화 하는 작업이 마무리 되었고, 학문적인 단계를 벗어나 고구려사가 중국사라는 사실을 국내외 관람객에게 심어주는 교육장으로 적극 활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중국은 이미 고구려 왜곡의 2차 작업(3단계)을 완전히 마치고 이제 마지막 단계인 3차 작업(교과서 개정 등)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위 한중역사전쟁은 사실상 마지막 단계인 ‘교과서 개정을 통한 역사왜곡’을 빼놓고는 완성을 본 것이다. 전쟁으로 말하면 수도권(교과서 개정)을 빼놓고는 모두 점령한 셈이다.
최근 이 문제가 한중 양국 정부의 외교적 노력으로 구두지만 합의를 보므로 해서 마치 상당한 진전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번 중국의 태도는 마치 전쟁에서 휴전을 선언하고 지금까지 정복한 땅은 그대로 차지하고 물러서지 않겠다는 주장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일 현장에서 왜곡된 사실들을 철수하지 않으면 그 역효과는 우리가 상상을 할 수 없을 만큼 크다. 이제 현장에서는 세계유산 등록 결과를 떠들어대지도 않고 역사왜곡을 부르짖지도 않는다. 다만 관광진흥에 최대의 힘을 쏟고 있다. 관광을 통해 지역경제도 활성화시키고 자연스럽게 고구려사를 중국사로 만드는 작업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결국 중국은 적어도 25년간 노력한 만큼의 효과는 거둔 셈이다. 이제 한국을 자극하지 않고 돈 벌면서 입장객만 늘리면 되는 것이다. 
2003년 8월 오녀산성 위에 있는 주차장은 물론 서문과 남문으로 가는 갈래길까지 차들이 꽉 들어차서 시장바닥을 방불하게 하였다. “국경절에는 하루에 5000명이 몰립니다.”는 가이드의 말이 실감난다. 세계유산 등록 이후 이제는 “관광사업”이라는 중국의 의도가 한 눈에 들어온다. 국가등급 관광지(별 4개)로 변했고 새로 세운 오녀산산성 표지판에는 유네스코와 세계유산 휘장이 선명하게 부각되어 있다.
집안박물관 바깥담에는 「중국 길림성 집안 고구려 관광주간의 성대한 개최를 열렬히 경축한다(熱烈慶祝中國吉林·集安高句麗旅游節 隆重召開)」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왜 박물관에 「세계문화유산 등재 축하」 현수막이 아닌 관광축제 개최 문구가 걸려 있는 것인가? 바로 이 현수막이 박물관의 역사왜곡을 위해 진행되는 목표를 분명히 하고 있다. 길림성정부 부비서장을 주임으로 하는 「중국 길림·집안 고구려문화관광주간(中國吉林·集安高句麗文化旅游節)은 김림성, 통화시, 집안시가 모두 참여하여 정부에서 지원하는 2백 6십만 유안(우리 돈 약4억)으로 각가지 행사를 치루었다. 그 첫 행사가 바로 「집안 중국 우수 관광도시 명명식(集安中國優秀旅游城市命名儀式)」이란 행사이다. 지난 20일 집안시에서 열린 명명식에는 전국의 유명 관광 도시에서 초청한 인사를 비롯하여 3만 명이 모인 가운데 시정부 앞에서 국가 관광국이 집안시를 중국우수관광도시로 선포하였다. 작년 일년 동안 모든 문화재의 설명을 중국사로 편입하는 작업을 하였다면 올해는 그 사실을 관광사업이라는 매력적인 방법으로 국내외인에게 알리는 사업을 거국적으로 시작한 것이다. 선포식 당일에는 전국에서 모인 관광 관계자들 때문에 호텔이 모자라 2시간이나 더 나가 통화시에서 자야 하는 성황을 이루었다.   
7월 9일 관광이 시작된 뒤 20일 만에 한국에서 학생, 교사 등 5000명이 다녀갔으며 올해는 적어도 10000명이 넘을 것이라는 관광회사 사장의 즐거운 비명을 들으며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마음이 착잡하다. 한편 손님들로 예전에는 주변 도시의 중국인들만 왔는데 지금은 남방에서도 많이 온다고 한다. 한 관광회사 사장은 “지금 일본 관광객이 1000명이나 신청이 들어왔는데, 일본사람들이 왜 고구려 유적에 관광을 오는 것입니까?” 필자에게 물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이러한 현장의 고구려사 왜곡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이미 왜곡된 것을 철수 하지 않고, “앞으로 재발을 없을 것이다”는 안이한 태도로 재검토 하지 않은 한 고구려사 왜곡의 마지막단계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고구려연구회 2005-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