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부시와 대화하기

지난해 한.미 관계가 삐걱댄다는 말이 많을 때 워싱턴의 유력한 한국 전문가를 만난 적이 있다. 클린턴 행정부에서도 일했던 그는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된 게 한.미 관계를 위해서는 참 잘됐다"고 말했다. 반미 성향 발언을 서슴지 않던 노 대통령의 집권으로 한.미 관계가 거북해졌다는 일반의 평가와는 정반대였다.

그는 "미국은 한국에서 반미 정서가 그렇게까지 넓게 퍼져있는지 정말 몰랐다"고 자책하면서 "더 늦기 전에 변화된 한국을 알게 된 건 양국 관계를 위해 장기적으로 잘된 일"이라고 진단했다. 한국에서 반미 운동을 하던 사람들은 이런 얘기를 들으면 "거봐, 우리가 밀어붙이면 미국도 꼼짝 못하잖아"라고 어깨가 으쓱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뒤 미국이 주한 미군을 감축하겠다고 나왔을 때 우리 정부는 "무작정 미군을 빼면 우린 어쩌란 말이냐"며 감축 미군의 숫자를 줄이려고 안간힘을 써야했다. 주한 미군이 빠져나가면 일본이 그걸 기화로 재무장을 시도할 게 뻔하다. 게다가 우리가 메워야 할 천문학적 국방비를 감안하면 너무나 당연한 대응이었다. 북한을 내세우지 않더라도 주한미군은 밉든 곱든 간에 중국과 러시아.일본이라는 강대국에 둘러싸인 한반도에서 힘의 균형추 역할을 해 온 게 사실이다.

그런 게 한.미 관계의 역사였고 지금의 현실이다. "그동안 미국이 우리를 6.25 전쟁 이후 자기네 구호물자로 살아가는 나라처럼 함부로 대하지 않았느냐. 정부는 미국에 왜 그리 저자세냐"라는 한국 젊은이들의 항변은 경청해야 한다. 동시에 "수만명의 미군이 6.25 때 생전 듣도 보도 못한 한반도에서 숨졌다. 그리고 미국이라는 시장이 있었으니 한국의 경제성장도 가능했던 게 아니냐"는 미국 측의 불만도 이해할 만하다. 인간 관계에선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게 갈등 해소의 첫걸음이다. 국가 관계도 마찬가지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20일 재선 취임식을 했다. 부시 2기 정부는 1기 때와는 달리 힘이 아니라 대화, 군사력이 아니라 외교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한다. 한번 지켜볼 일이다. 한.미 관계가 당장에 더 좋아지거나 나빠지거나 하진 않을 것이다. 어차피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이와는 별도로 우리가 염두에 둬야 할 몇 가지가 있다.

무엇보다 '대통령=그 나라 전부'는 아니라는 점이다. "나는 부시가 싫어서 미국도 싫다"는 건 이해는 하지만 현명치는 않아 보인다. 미국인들 중에는 부시를 싫어하는 사람도 많기 때문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어떤 외국인이 "나는 노무현이 싫어서 한국인도 싫다"라고 말하면 한국인 입장에서 그걸 받아들이긴 쉽지 않다. 부시든 노무현이든 몇 년 뒤에는 바뀔 사람들이다.

국제정치의 현실을 감정적이고 낭만적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도 경계해야 한다. 노 대통령 취임 초기에는 "미국이 아니라 중국과 동맹하자"는 분위기가 정치인들 가운데 적지 않았다. 중국에 대한 짝사랑은 한방에 날아가 버렸다. 중국의 고구려 역사 왜곡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영악한 친구보다는 어수룩한 친구가 좋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약소국에서 정치 지도자들이 어리숙하면 국민을 종살이하게 만들기 십상이다.

이제 부시 정부는 집권 2기를 맞았고, 노무현 정부는 후반기를 시작한다. 양국 대통령은 뭐가 서로의 국익에 도움이 되고, 상생할 수 있는 길인지를 더 많이 고민해야 한다. 지난 2년간 서로 신경전을 펴고, 밀고 당기면서 한.미 양국은 얻은 것도 있겠지만 잃어버린 게 적지 않다.

(중앙일보 / 김종혁 특파원 2005-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