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혼,고구려는 지금 ⑶] 한강유역 고분의 의미

삼국시대 최대의 접전지였던 한강 유역에는 고구려 고분을 찾아보기 어렵다. 한성백제를 멸망시킨 고구려가 한강 일대를 지배하기는 했으나 신라와 백제를 견제하는 군사 요충지로 활용했을 뿐 행정구역 설정이나 주민 정착을 목적으로 삼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구려 고분군이 좀처럼 발견되지 않는 것은 이곳을 지키는 군사나 행정 관료들이 사망하면 시신을 본국으로 송환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휴전선 이남에 남아 있는 고구려 고분은 연천군 신답리,춘천의 천전리,방동리,신매리 등 몇 곳에 불과하다. 이들 고분은 고구려의 전형적인 석실묘를 충실히 따르고 있어 고구려 고분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연천 신답리 고분은 현무암으로 석실을 축조하고 바닥에는 반듯한 대형 판상석을 깐 다음 그 위에 벽을 만들었다. 천장은 삼각 고임식으로 중심을 잡는 축조기법이 활용됐다.

춘천 천전리나 방동리 역시 석회로 벽돌의 틈새를 메우고 삼각 고임식 천장으로 중심을 잡았다. 이런 구조는 고구려의 수도였던 중국 지안에 분포된 태왕릉 등 고분과 유사한 형태를 띤다. 중국 지안에는 고구려 고분 1만 2000기가 산재해 있다. 삼국지 동이전 편을 보면 고구려인은 무덤 속에 그릇과 식량,금 등 장식품을 넣고 다양한 벽화를 그릴 정도로 무덤을 중요시했다고 기록돼 있다.

한강 유역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고구려 고분이 연천과 춘천 일대에서 발굴됐다는 사실은 백제를 물리치면서 남하한 고구려가 이 지역을 안정적인 지배권에 두었다는 것을 뜻한다. 심재연 강원문화재연구소 조사팀장은 “삼국사기에 따르면 춘천은 당초 백제의 영토였으나 개로왕의 죽음으로 패퇴한 이후 고구려 지명인 ‘우수주’ 또는 ‘우두주’라고 부른 것으로 보아 이 지역을 중요시했음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곳의 고분은 5세기 중엽에서 6세기 초까지 광개토왕과 장수왕이 지배하던 고구려 제2기 시대에 축조된 석실묘로 생활 풍속을 나타낸 그림과 기와편 등 출토품으로 비교해보면 중국과 북한에 산재해 있는 고구려 고분의 모습 그대로이다. 심 팀장은 “연천과 춘천 외에도 철원지역 및 북한강 유역에도 고구려 유적이 있을 가능성이 높아 지표조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국민일보 / 이광형 기자 2005-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