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격·전차바퀴에 뭉개지는 세계 문화유산

유적 옆에 기지 세우기도

이라크에 주둔 중인 미군이 고대 바빌론 유적을 일부 파손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 전부터 전 세계 고고학자들이 우려한 것. 전쟁이 세계문화유산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대영박물관은 최근 이라크 정부의 의뢰를 받아 고도(古都) 바빌론의 유적 훼손 상태를 점검, 보고서를 제출했다. AP 등이 보도한 이 보고서에 따르면 바빌론에 주둔한 미군과 폴란드군은 2500년 전 유적인 보도블록 등을 군용차량으로 깔아뭉갰다. 바빌론의 왕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인장(印章)이 찍힌 벽돌들이 군기지 내에 깨진 채 흩어져 있고, 이슈타르 문(門)의 용 조각도 심하게 훼손됐다고 보고서는 지적했다. 이 유적들은 대부분 2500년이 넘은 세계적 문화유산이다. 2003년 이곳에 진주한 미군은 바빌론 시내 전역에 자갈을 깔아 주차장과 헬기 착륙장, 숙소를 건설했다. 이 기지는 폴란드를 비롯한 다국적군에 넘어갔다.

대영박물관의 존 커티스는 “어떻게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고대 유적 중 한 곳에 이런 대규모 기지를 세울 수 있느냐”면서 “이집트의 피라미드 옆에 기지를 세운 것과 똑같다”고 말했다. 전쟁에 의한 문화 파괴 역사는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최근 수십년 사이에도 귀중한 문화유산들이 포탄에 맞아 파괴되거나 유실됐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1970년대 크메르루주에 의해 파괴된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유적이다. 전체 유적의 70%가 복구불능 상태다. 2001년 3월엔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이 세계문화유산의 하나인 바미안 석불을 로켓포로 산산조각내는 만행을 저질렀다. 2세기에 제작된 이 55m 높이 석불이 파괴된 모습은 전 세계에 충격을 줬다. 바그다드 박물관도 이라크전에서 포탄을 맞았다. 이 박물관은 전쟁 초기에 1만4000점의 유물을 약탈당했다가 5000여점을 회수했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보스니아의 페르하디아 사원은 1597년에 세워진 발칸반도 최고의 이슬람 사원이었으나, 1993년 세르비아에 의해 완전히 파괴됐다.

(조선일보 / 한현우, 최재혁 기자 2005-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