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 문화전망

올해 학계 최대의 이슈는 지난해에 이어 ‘역사’와 ‘민족’이다.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으로 한껏 달아올랐다가 잠시 수굿해진 민족감정은 올해 일본 우익의 역사교과서문제로 재점화 될 전망이다. 하지만 민족주의와 국가주의가 강해지는 한편에서, 탈민족ㆍ탈근대를 표방하는 지식인들의 목소리도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올해는 제국주의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조약 100주년이면서 광복 60주년, 한국과 일본이 국교를 정상화한 한일기본조약 체결 40주년이다. 이에 맞춰 여러 학회, 연구소들이 한일 과거사를 되돌아보는 학술행사를 다채롭게 준비하고 있다.

서울대 한국문화연구소는 일본 국제기독대학, 하와이대 한국학연구센터와 함께 1월 30일부터 2월 1일까지 하와이 카우아이섬에서 ‘한국 병합의 역사적ㆍ국제법적 재검토’를 주제로 한ㆍ미ㆍ일 공동학술회의를 연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도 2월 18일 서울 역사박물관에서 ‘을사늑약, 그 100년의 기억’를 주제로 을사조약 100주년 심포지엄을 연다. 연구소는 또 8월 11, 12일에 국가보훈처와 공동으로 ‘세계 식민지 해방운동과 한국독립운동’을 주제로 국제학술대회를 연다.

식민지 경험이 있는 해외 각국의 사례를 현지 학자들을 통해 직접 듣는 자리여서 이집트 베트남 필리핀 대만 등 해외 학자들이 다수 참여한다. 역사학회가 주도하고 국내 역사학 관련 학회들이 대거 참가해 5월에 여는 전국역사학대회의 올해 주제도 ‘을사조약’. 대회에서 한국사연구회는 분과 주제로 ‘1965년 한일회담의 성격’을 놓고 토론할 계획이다.

국사편찬위원회가 8월 15일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 하얼빈(哈爾濱)에서 여는 광복 60주년 기념 남북학술대회는 북한과 재중동포학자들이 참가해 의미가 깊다.

동북아지역의 반일 공동투쟁과 광복의 의미, 일본 패전 이후 동북아 지역의 평화체제 구축과정을 재조명한다. 국사편찬위는 또 10월에 역사 관련학회들과 함께 광복 6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를 연다.

광복 이후 한국 현대사를 입체적으로 되짚어 보는 작업이다. 이밖에 한국일본학회, 현대일본학회, 한일관계사학회 등이 한일 수교나 한일관계 재정립 관련 학술대회를 준비중이다.

중국의 역사왜곡을 둘러싼 한ㆍ중 갈등은 지난해 ‘열전’에서 올해는 ‘냉전’의 형태로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연구재단은 지난해 말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중국 사회과학원과 처음으로 고구려 관련 학술대회를 연데 이어 올해 서울에서 제2회 학술대회를 연다.

고구려연구회는 11월 말에 칭화(淸華)대 한중역사문화연구소와 공동으로 한ㆍ중ㆍ일 3국 학자들이 참여하는 ‘동아시아 세계 속의 고구려와 발해’ 국제학술대회를 연다. 북한 사회과학원의 고구려연구실장과 발해연구실장도 초청할 예정이어서 주목된다.

민족주의가 거세질수록 탈민족을 부르짖는 학자들의 목소리도 높아질 전망이다. 사실을 존중하고, 자민족이나 자국중심주의이라는 편협한 사고의 틀을 넘어선다는 점에서 이들의 주장은 충분히 귀 기울일 만하다.

‘역사 해체’ ‘탈국경’ 등을 주장하며 화제를 모아온 한양대 임지현 교수는 4월 23, 24일 한양대에서 ‘과거사 짚어보기(Mastering Past)’를 주제로 프랑스의 나치 협력자 청산과 남북한 친일파 청산의 담론을 비교하는 국제학술대회를 연다.

경제사의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일제의 한국 근대화 기여에 무게를 실어온 낙성대경제연구소는 10월쯤 미국에서 그동안의 연구성과를 알리는 학술대회를 열 예정이다.

최근의 연구성과를 통해 해방 이후의 역사를 새롭게 조명하자는 뜻으로 진행하는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간행 작업도 주목할만하다. 서울대 박지향(서양사학) 이영훈(경제학) 교수 등이 주도하는 이 작업은 1980년대 이후 대학생 필독서로 자리잡은 ‘해방 전후사의 인식’을 교정하겠다는 의지도 담고 있어 현대사는 물론 정치ㆍ경제학계에 적잖은 논쟁을 불러일으킬 전망이다.

임지현 교수는 “올해도 전통적인 민족주의 흐름이 강화돼 한ㆍ중ㆍ일 3국에서 적대적인 민족주의가 증폭되겠지만, 이런 구도를 무너뜨리려는 각국의 비판적 지식인들의 연대도 활발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일보 / 김범수 기자 2005-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