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증에서 해석으로, 중국 '촉한공정'과의 싸움

김운회 교수의 역저 <삼국지 바로읽기 1ㆍ2>는 나관중 <삼국지> 독자라면 필독해야 할 책일 뿐 아니라, 고구려 역사 귀속 문제를 놓고 중국의 역사왜곡이 심화되고 있는 이때, 새삼 역사에 관심을 기울이기로 한 일반인들에게 역시 크게 권할 만한 책이다.
  
이 책에 대한 좀 더 자세한 논의가 반드시 있을 줄로 알지만, 김운회 교수의 이 책은 한 마디로 충격적이면서도 참신하다. 솔직히 말해 나관중 <삼국지>의 신화를 벌거벗기는 책이라면 이미 여러 종류가 나와 있지만, 김운회 교수의 이 책을 따라 오지는 못한다. 예를 들어 일찌감치 번역된 바 있는 중국학자 이전원ㆍ이소선의 <삼국지 고증학>은 나관중 <삼국지>의 허구를 낱낱이 밝혀주고 있다. 하지만 이전원ㆍ이소선의 책은 한마디로 고증에만 머물렀다.
  
두 중국학자가 고증에만 충실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뻔하다. 먼저 그들에게는 평생 나관중 <삼국지> 고증에만 묻혀 살아도 재료가 떨어지지 않을 만큼 무수한 역사 문헌과 지방민담과 유적지가 주어져 있다. 때문에 굳이 고증 이상의 작업으로 '삼국지학'을 넓혀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이유는 따로 은닉되어 있다. 흔히 '보편적인 것', 또는 '인류의 공통 유산'이라고 추앙되는 고전이 전혀 보편적이지 않다는 것. 다시 말해 나관중 <삼국지>는 동아시아의 고전이기에 앞서, 중국인의 정체성과 통합성을 도모하는 중국인의 고전이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때문에 현지 학자들에게 고증 이상의 '불필요한' 해석은 봉인될 수밖에 없다. 실제로 두 중국학자는 제갈량이 가장 서둘렀던 일은 "북쪽의 위를 치는 일"이었기 때문에 맹획을 "누차 풀어 주었다가 다시 사로잡을 정도로 시간을 헛되이 보낼 여유가 없었다"는 것까지는 잘 지적하면서도, 나관중이 얼토당토않은 칠종칠금 일화를 공들여 묘사하고 삽입했던 속내는 파헤치지 않는다.
  
중국학자들은 의뭉하게 입을 다물고 있지만, 확실히 그 일화는 제갈량의 재기와 인덕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단순한 목적 이상의 것을 위해 고안되었다. 김운회 교수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나관중은 칠종칠금의 고사를 통해 "상대적으로 제갈량으로 상징되는 중화민족의 어진 품성과 도덕적 감화"를 찬양하고 나아가 "중화주의에 귀속되는 것이야말로 선과 도덕의 길인 양" 동아시아의 소수 민족들에게 훈시를 내린 것이다. 마치 오늘날의 미국이 비미국적 세계를 향해 '미국식 이데올로기만 받아들이면 세계 평화와 발전을 이룰 수 있다'고 강요하듯이.
  
옹유반조로 기술된 나관중 <삼국지>에 '촉한공정'이란 재미난 명칭을 붙여 준 김운회 교수는, 그의 책 1권 어디에(pp.23~24) 나관중의 텍스트만이 문제가 아니라 진수의 정사 <삼국지>, 또한 촉한정통론을 조작하기 위해 쓰여졌다고 말함으로써, 나관중 <삼국지>의 독자가 사실을 조회하기 위해 번번이 찾아보곤 하던 '조회의 원천'마저 부정한다. 이 과격한 주장은 그러나 2권 어디에(pp.309~322) 나오는 손호와 동탁에 대한 자세한 고증 작업 끝에 상당한 개연성을 부여 받는다. 김운회 교수는 이 책의 여러 대목을 통해 모든 역사 기술의 진실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해석학의 정신을 보여주는 한편, 우리가 간과하고 있던 중국인의 유구한 '자민족 중심주의'를 누설한다.
  
'개그는 개그이니 따라하지 말자'라는 개그맨들의 재미난 구호처럼, '소설은 그냥 소설로 읽자'라고 말할 나관중 <삼국지>의 순수한 독자도 꽤 있을 줄로 안다. 하지만 나관중 <삼국지>가 우리나라에서 꼭 소설로만 읽히던가? 존 킹 페어뱅크나 레이 황과 같은 중국사의 거장들이 한 왕조의 몰락 원인을 지금 우리나라 강남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과 같은 지방 호족들의 '조세저항'에서 찾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환관ㆍ외척ㆍ황건난 때문에 망했다고 잘못 알고 있는 것은 모두 나관중의 <삼국지> 때문이다. 나관중의 이 텍스트는 이미 소설을 넘어 '의사 역사'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유비를 높이고 조조를 폄하'하는 옹유반조의 시각으로 씌어진 나관중의 <삼국지>는 기본적으로 역사소설이다. 때문에 나관중이 <삼국지>를 쓴 이래로 약 6백여 년간, 또 나관중이 다루었던 삼국시대로부터 1800여 년간 새로 축적된 역사 연구의 성과와 현재의 시각으로 나관중 <삼국지>를 바로 읽는 일이 결코 무용한 일은 아니다. 김운회 교수는 나관중의 옹유반조가 왕조시대에 집필을 했던 그 시절의 한계가 아니라, 동아시아 미래의 재앙으로 반복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고구려인을 현재 한반도에 살고 있는 한국인으로 한정을 하면 할수록, 중국 정부의 동북공정에 제대로 대항할 길이 없다는 김운회 교수의 주장은 동아시아 역사를 어떻게 재구성해야 하는지에 대한 귀중한 제언이라고 여겨진다. 한국인ㆍ몽고인(元)ㆍ만주인(淸)을 '주신족 벨트'라는 동일한 인종과 역사로 묶자는 주장은 중국의 역사 왜곡에 대항하는 방법론이면서, 김운회 교수가 결코 의도하지 않았던 '국사해체'의 이점과 가능성마저 제공해주고 있어 무척 흥미롭다.

<장정일 / 소설가>

(프레시안 2005-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