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적 없는 국사 교과서

필자는 성장하면서 ‘국적(國籍) 있는 교육’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왔다. 요즘 흔히 쓰는 용어를 빌린다면 정체성있는 교육을 가리킨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국적 있는 교육을 시키고 있는지 반문하고 싶을 때가 적지 않다. 비근한 예를 한 가지만 들어 본다.

현행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를 보면 한반도를 중심한 지도가 숱하게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한결같이 삼면이 바다로 에워싸인 한반도 바깥의 바다를 ‘동해’와 ‘황해’로 각각 표기했다. 눈 씻고 보아도 ‘남해’는 아예 표기하지도 않았다.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책인 삼국사기를 보면 대륙국가인 고구려에서도 자국을 중심으로 ‘동해’ ‘서해’ ‘남해’를 설정하였다. 백제와 신라의 경우도 이와 동일한 바다 이름을 각각 부여했다.

현재 우리 나라는 ‘동해’를 외국에서 ‘일본해’로 표기하고 있는 관계로 시정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현행 국사 교과서에서는 우리나라의 서쪽 바다를 ‘서해’가 아닌 ‘황해’로 표기하였다. 중국인들이 표기하는 방식대로 서해를 황해로 적고 있는 것이다. ‘동해’ ‘서해’ ‘남해’라는 바다 이름은 우리 영토를 기준으로 한 우리 바다에 대한 명칭임은 두말할나위 없다. 그런데 ‘황해’라는 표기는 황하에서 연원한 바다라는 의미를 지닌 중국의 바다라는 개념을 당초부터 지니고 있다. 실제 중국에서는 자국과 한반도 사이의 바다를 ‘황해’로 표기한다.

‘동해’니 ‘일본해’니 하는 표기를 놓고서 일본과 국제적으로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다른 책도 아니고 민족의 정신적 유산까지 수록된 국정 국사 교과서에서 ‘서해’를 ‘황해’로 표기했다는 자체는 우리 스스로 나라의 서쪽 바다를 중국에 넘겨버린 꼴이 되고 만 것이다. 이런 국적 없는 교육이 작금의 동북공정을 초래한 원인(遠因)으로 진단한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며칠 전이었다. 지금은 작고했지만 한국 사학계의 태두이신 분이 집필한 책을 넘기다가 뜻밖의 표현을 발견하게 되었다. 고구려 광개토왕대에 경략한 영토와 관련한 다음과 같은 서술이었다. “남으론 예성강 유역에 이르고,서으론 요하,북으론 송화강,동으론 일본해에 극(極)하였으니 고구려의 세력이 이 때 이만큼 강대하였던 것은 속일 수 없는 사실이다.” 고구려가 강대했음을 알리는 서술이야 나무랄 게 없겠지만, 동해를 ‘일본해’로 적고 있는 것이다. 순간 쇠뭉치로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우리의 동녘 바다인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하고 있는 필치에서 광개토왕대의 영역이 아무리 넓었음을 강조해보았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그와 더불어 몇 해 전 제7차 교육과정에 따라 개정된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를 검토하는 세미나에서 필자가 이 문제를 질문했던 순간이 상기되었다. 그러자 당시 어떤 학자는 황해는 세계 공용어라며 즉각 반론을 제기하였다. 필자는 그러면 ‘서해 교전’도 ‘황해 교전’으로 바꾸고 ‘서해안 고속도로’도 ‘황해안 고속도로’로 바꾸어야 되냐고 반문했다. 그러자 국내와 관련된 것은 ‘서해’로 하고, 다른 나라와 관련된 것은 ‘황해’로 표기해야 마땅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렇다면 한국의 국사 교과서에서 자국 영역을 중심으로 한 서쪽 바다를 서해가 아닌 황해로 표기한 것은 누구를 위한, 누구에게 읽히기 위한 국사 교과서란 말인가.

내륙에서 출발한 고구려인들도 자국의 서쪽 바다를 서해라고 일컬었다. 자국 중심의 세계 인식이 확립되었음을 뜻한다. 달리 말해 무게 중심이 잡힌 나라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고구려가 동북 아시아의 강대국으로 오랫 동안 번성하게 된 배경은 이런 데 있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민족의 얼을 깨우쳐주어야 할 국사 교과서에서는 우리의 서쪽 바다를 서해가 아닌 황해로 표기하고 있다. 정체성이라는 말이 유행어처럼 쓰이는 세상에 정작 정체성이 증발한 것 같아 씁쓸하다.

<이도학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한국사>

(국민일보 2005-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