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교수와 고구려

몇 해 전 새 천년을 광활한 대지 위에 펼쳐져 있는 만주의 옛 고구려 토성 위에서 맞이한 적이 있다.

그 토성은 오랜 세월의 풍파에 모양이 허물어져 볼품 없는 형상으로 남아 있었으며, 주위에는 이름 모를 민묘들이 즐비하게 널려 있었다.

마침 하염없이 펑펑 내리는 눈과 섭씨 영하 45도 안팎의 혹독한 추위를 피부로 느끼면서 본 눈앞의 광경은 시공을 초월한 벅찬 감동 그 자체였다.

중국 현지에서 한국고대사, 특히 고구려 유적지를 찾아 헤매며 고구려사 연구에 한평생을 바쳐온 백발이 성성한 노교수와 함께 한 자리(답사)이기에 제자들로서는 어떤 교육의 장보다도 감회가 새로웠다.

박진석 교수님은 여든이 넘은 나이와 중국문화혁명 당시 농촌으로 끌려가 오랜 가난과 노동의 고통 속에서도 한국고대사 연구를 끊임없이 연구한 분으로 현지 학계에서는 현존 최고의 학자, 마지막 선비, 이 시대의 퇴계 이황 등으로 부르고 있다.

고구려사의 역사왜곡이 한·중 관계의 정치적 쟁점으로 떠오르기 이전부터 중국에서는 고구려사 연구의 중심에 있는 그 분의 주위에 늘 공안들이 학술활동을 예의주시하여 왔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현지 학계에서는 고구려사 분쟁을 예견하고 있었다.

당대 최고 학자인 그분이 살고 있는 집은 누가 보아도 낡고 초라한 사택으로 수많은 책들과 케케묵은 소파 하나가 전부일 정도이다.

그러면서도 찾는 제자들에게 꼭 3원(우리 돈 450원 정도)짜리 국수 한 그릇값과 5원짜리 택시비를 애써 던져 주셨으며, 언젠가 한국을 방문하였을 때 단재 신채호 선생 묘소를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고속도로를 바라보시며 "대한민국의 심장이다"라며 조국의 발전상에 눈물을 글썽이신 분이다.

그분의 끊임없는 외길인생과 집념은 고구려사 분쟁과 광복 60주년을 맞이한 오늘날 우리에게 조국에 대한 역사의식과 민족에 대한 애정을 새삼 돌이켜 보게 한다.

<황연화 화가·미술사학 박사>

(매일신문 20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