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평화 제안, 함께쓰는 역사교과서

역사인식 ‘국경 허물기’ 첫단추

2005년은 러일전쟁 종전 100주년, 을사조약 100주년, 해방 60주년, 한일국교 수립 40주년 등을 맞는 해다. 이 숫자들은 ‘기억’에 대해 말한다. 전쟁의 기억, 국권상실의 기억, 치욕의 기억이다.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았는데, 동아시아엔 또한번 패권과 팽창의 기운이 번져난다.

2005년 <한겨레>는 그 악몽의 기운을 거슬러 올라 평화의 길을 제안한다. ‘공동의 역사인식’의 문을 거쳐 동아시아 평화시대로 나아가는 길이다. 한·중·일 3국의 공동역사교과서가 그 첫걸음이 될 수 있다.

한·중·일 3국의 민간단체들의 노력의 결실인 한·중·일 공동역사교과서가 사상 처음으로 오는 5월 발간된다. 공동교과서 작업에 한국 쪽 대표로 참가한 ‘아시아 평화와 역사교육연대’와 함께 <한겨레>는 그 내용의 일부와 쟁점들을 1월부터 장기연재할 계획이다.

긴장의 징후가 높아질수록 다행스럽게도 평화를 말하는 이들도 늘어간다. 기억에서 교훈을 얻는 사람들이다. 동아시아 평화공동체가 선택지라고 믿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개척할 미래의 첫자락을 한발 앞서 짚어본다.

역사교과서는 동북아 긴장의 단단한 자물쇠를 여는 작지만 강력한 열쇠다. 그 자물쇠의 결이 바로 이 열쇠의 돌기를 따라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민족이라는 개념을 확립하고, 때로는 민족적 양심을 부패시키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던 ‘교육’이 하나의 유럽을 건설하는 데도 똑같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영국인이자 프랑스인이었던 역사학자 프레데릭 들루슈의 말이다.

그는 1988년 ‘유럽 공동의 역사교과서’를 주창했다. 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아일랜드·스페인·네덜란드 등 12나라 12명의 사학자가 여기에 힘을 보탰다. 4년에 걸친 연구와 토론, 집필 끝에 선사시대부터 1990년대에 이르는 유럽 공통의 역사 교과서가 탄생했다. 이름하여 <새유럽의 역사>다.

이런 결실을 맺으려는 노력은 동북아 지역에서도 끊임없이 시도됐다. 1997년 7월, 유네스코 한국위원회가 유네스코 일본위원회에 역사교과서 공동연구를 제안한 것이 대표적인 경우다. ‘반민반관’ 차원의 공동역사연구가 그때 첫단추를 뀄다면, 2005년 동북아질서는 조금 다른 양상이었을 것이라고 지적하는 학자들이 많다. 그러나 유네스코 일본위원회는 결국 이 제안을 거부했다.

다양한 공동연구 시도 번번이 실효 못거둬
한·중·일 3국 민간차원 30여명 머리 맞대
역사적 ‘공동 역사교과서’ 5월께 첫 발간

2002년 5월 출범한 ‘한·일 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정부간 합의의 결과물이다. 두 나라에서 각각 10여명의 학자들이 참여한 역사공동위는 오는 5월 공동연구의 최종보고서를 양국 정부에 제출할 예정이다. 고대사부터 근현대사에 이르기까지 13가지 핵심쟁점을 놓고 3년 가까이 깊이 있는 연구를 진행했다. 이 과정은 <새유럽의 역사> 출간에 비교될 만하다.

그러나 중요한 한계가 있다. 공동연구위의 성과가 곧바로 공동 역사교과서로 이어지지 않는 점이다. 최종보고서는 두나라 교과서 제작사에 ‘참고자료’로 배포되는 데 그칠 예정이다.

이곳저곳에서 걸림돌을 만난 공동역사교과서 탄생의 도도한 흐름은 조금 에둘러 가는 길을 택하고 있다. 순수 민간차원의 공동 역사교과서 개발이다.

작은 성과는 이미 나와 있다. 한·일 가톨릭 주교회의가 한국사 입문서를 공동으로 발간한 것이다. 국내에는 지난해 4월 <한국과 일본에서 함께 읽는 열린 한국사>(솔)라는 이름으로, 일본에서는 지난해 12월 <젊은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한국의 역사>(메이시서점)라는 제목으로 각각 출판됐다. 그러나 여기에도 모자란 점이 있다. ‘공동의 역사’가 아니라 한국사만을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민간 연구자와 교육자들이 공동으로 참여한 <한·중·일 공동 역사부교재>는 그래서 동북아 공동의 역사인식에 기념비적 지표로 남을 것으로 보인다. 세나라의 시민단체와 연구자, 교사 등 30여명이 2002년 3월부터 지금까지 공동연구와 토론을 펼쳐왔다.

△제국주의와 패권주의 반대 △평화와 인도주의에 기반한 세계시민의식의 확산 △동아시아 역사인식의 확대 등이 이 역사부교재의 정신이다. 오는 5월 한·중·일에서 동시에 출판될 예정이다. 현재 교재원고에 대한 마지막 검토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양미강 ‘아시아평화와 역사교육연대’ 위원장은 “일국 단위를 넘어서지 못했던 한계를 넘어 ‘세계 시민’ 차원에서 역사 교과서를 서술할 것”이라고 밝혔다.

“동아시아사와 자국사를 교차하는 역사인식의 공유가 필요하다”(임기환 고구려연구재단 연구기획실장)거나 “민족을 떠나 한국사를 재구성할 수 있는 구체적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안병우 한신대 교수)는 제안이 이번 공동역사부교재 발간을 통해 실마리를 찾고 있는 셈이다.

특히 한국의 시민단체인 ‘아시아평화와 역사교육연대’가 사상 첫 3국 공동역사부교재 발간을 주도하고 있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 단체는 일본의 양심적 시민단체와 연대하고, 중국 사회과학원의 연구자들을 설득해 한 자리에 불러 앉혔다. 동북아시아의 ‘평화 조정자’로서의 한국 시민사회의 위상과 책임이 이 과정을 통해 더욱 분명해진 것이다.

(한겨레신문 / 안수찬 기자 200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