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의 통일

제 1편 - 통일의 영웅, 김춘추와 김유신

660년 나당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한 데 이어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다. 신라에는 훗날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일컬어지는 두 영웅이 있었다. 장군 김유신과 훗날 태종 무열왕에 오르는 김춘추.
두 사람은 어떤 인물이었으며, 어떤 인연으로 강하게 결속될 수 있었던 것일까? 오늘 이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린다.

어디론가를 향해 천천히 걷고 있는 말 위에는 화랑 김유신이 타고 있다. 열 여섯쯤의 앳된 나이. 그런데, 정신 없이 졸고 있다.
누군가의 집 앞에 이르자 말이 걸음을 멈췄고, 그 바람에 김유신이 졸음에서 깨어난다. 그는 자신의 애마가 멈춰선 곳을 보고 깜짝 놀란다.

김유신 ; (놀라는) 아니, 여기는?

그리고 곧장 말에서 내려 허리춤에 차고 있던 칼을 들어 한칼에 애마의 목을 베었다.

이 소리를 듣고 집에서 뛰쳐나온 여인이 있었으니, 바로 유신의 애인 천관녀였다. 천관녀는 말의 목을 베고 단호히 돌아서는 김유신을 붙잡지 않았다. 애마가 알아서 갈 정도로 자주 천관녀를 찾았던 김유신이 왜 그토록 강하게 천관녀를 거부해야 했을까?

“화랑시절에 천관이라는 기생이 경영하는 술집에 빈번이 출입하다가 어머니의 호된 꾸지람을 듣고 다시는 천관을 만나러 가지 않겠다 굳게 약속하였다. 천관은 상심을 하고 삭발을 하고 중이 돼서 나중에 죽었다. 김유신은 그곳에 절을 지어 그 넋을 위로하기 위해 천관사라고 하는 절을 지어…” (성신여대 사학과 명예교수 이현희 교수)

그렇다면, 김유신의 어머니는 어떤 여성이었는가.
그녀는 법흥왕의 조카딸로 신라최고의 신분인 왕족이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과 어머니 만명부인의 결혼을 야합이라는 말로 비하하고 있다. 이유는 김서현의 신분 때문이었다. 김서현의 할아버지, 즉 김유신의 증조할아버지 김구해는 법흥왕 19년인 532년 신라에 항복한 금관가야의 왕이었다. 물론 신라는 그의 집안을 신라 최고의 귀족등급인 진골귀족으로 대우해주었지만, 신라의 정통진골귀족집안과는 다른 대접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어느 집단이고 어느 사회고 마찬가지로 새로운 집단이 기존집단에 편입될 때 배타성이 작용하게 되는데 김유신의 증조 할아버지 구해왕이 신라에 투항해 와서 진골귀족으로 편입이 되고 거기에 상응하는 관등을 받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게 된다. 이건 진골귀족들이 기득권 유지하는데 걸림돌이 되어서 이질적인 집단으로 김해김씨 배척해서 초기에는 상당한 애를 먹게 된다.” (경북대 사학과 주보돈 교수)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김유신의 할아버지 무력이 택한 것은, 전쟁터에서 공을 세우는 것이었다. 당시 신라는 진흥왕의 적극적인 영토확장정책으로 거의 매년 전쟁을 치러야 했다.
실제 진흥왕 15년인 554년 백제와의 관산성싸움에 출전했던 무력은 백제성왕을 전사시키는 큰 공을 세웠고, 진흥왕이 세운 단양적성비에 그의 이름이 등장할 만큼 걸출한 무장으로 인정을 받는데 성공했다.

“김무력은 단양적성비에 이름이 남아있을 정도로 뛰어난 무력을 지녀 김무력, 김서현, 김유신으로 이어지는 무력으로 정치적 비중을 점차 확대해 나가게 된다.” (서강 대학교 조범환 교수)

그러나, 김서현이 왕족의 딸과 혼인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배타적인 진골귀족들의 반대가 극심했기 때문이다.
결국, 두 사람은 신라 경주와는 멀고 먼 충청북도 진천으로 도망가 살게 된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서 태어난 첫 아들이 바로 김유신이다.

삼국통일의 주역인 신라의 명장 김유신의 출생지가 신라의 수도인 경주가 아니라 진천인 것은 금관가야국 출신의 그의 가문이 신라사회에서 겪어야 했던 신분의 한계를 의미한다. 김유신이 애마의 목을 칠 정도로 강한 의지를 갖고 천관녀와 헤어졌던 것은, 역설적으로 그녀를 그만큼 사랑했다는 이야기도 되지만, 이러한 신분의 한계를 깨고 싶었던 가문의 바람이나 개인적인 야심과 연결되어있다.

“김유신의 경우는 신라 핵심의 귀족으로서 활약할 수 없는 소외되어 있는 변두리에 위치한 그러한 신분이기 때문에 그런 사회적 제약에서 벗어나고픈 그러한 욕심이랄까 또는 마음이랄까 이런 걸 항시 강박관념처럼 가지고 있었다고 봐야 되는데 천관녀와 만약 혼인을 하게 된다면 사실은 이건 반전시킬 수 없는 추락하는 상황이 되기 때문에 그런 점을 감안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한국전통문화학교 이도학 교수)

김유신과 김춘추, 이 신라의 두 영웅은 어떻게 평생의 친구이자 정치적 동반자가 된 것일까?
그 인연은, 김춘추의 아버지 김용춘과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 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김춘추의 가문에 대해서 먼저 이해해둘 필요가 있다.

“김춘추의 할아버지는 진지왕이다. 진지왕은 왕위를 계승한 지 4년 째 왕위에서 폐위했다. 정치보다는 여자를 가까이 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조범환 교수)

삼국사기에는 진지왕이 왕위에 오른 뒤 4년만에 죽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의 기록은 이와 달리 진지왕이 음탕한 짓을 해서 왕위에서 쫓겨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어떤 이유에서였건 김춘추 가문은 왕위에서 밀려나게 되고, 왕족이었지만 왕이 될 수 없었던 김용춘과 패망한 나라의 왕족이었던 김서현, 이 두 사람이 손을 잡은 것은 정략적인 접근이었다.

“김춘추 계열로 볼 때는 자기가 정통가문의 정통가문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을 것 아닙니까 이럴 때 하나의 파트너로서 구한 것이 가야계 김서현이다 그러니까 서로 약자끼리 비정통끼리의 하나의 정략적 접근을 한 것이 서현과 용춘이다.” (이화여대 사학과 신형식 명예교수)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김유신과 김춘추의 만남은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그리고 두 가문의 만남은 김춘추가 김유신의 동생 문희와 결혼을 하면서 절정에 이른다.

김유신과 김춘추가 축국, 지금의 축구를 하면서 놀고 있었다. 그런데 김유신이 의도적으로 김춘추의 옷고름을 밟아 떨어뜨린다. 김유신은 김춘추에게 떨어진 옷고름을 달러 자신의 집으로 가자고 한다.

김유신 ; 보희야!

김유신은 첫째 동생 보희를 불러 김춘추의 옷고름을 달라고 하지만, 보희는 싫다고 한다. 그러자, 다시 다른 동생 문희에게 똑같은 부탁을 한다. 문희는 오빠의 뜻을 이해했다. 이 일을 계기로 김춘추와 문희는 서로 가까운 사이가 된다.

그러나, 김춘추에게는 이미 결혼한 아내가 있었기 때문에, 이 만남이 결혼으로 이어지기란 쉽지 않았다.
이미 동생 문희가 김춘추의 아이를 잉태하게 된 것을 알게 된 김유신은 어느 날 마당에 장작을 쌓아두고 문희를 옆에 묶어두었다. 혼인도 하지 않고 임신한 동생을 불태워 죽이려 한다는 말을 파다하게 퍼뜨려 놓은 상태였다. 이날은 마침 훗날 선덕여왕이 되는 덕만 공주와 김춘추가 남산에 오르는 날이었고, 김유신은 이를 알고 있었다. 김유신은 장작더미에 불을 붙였다.
김유신의 집 마당에서 치솟은 불길은 남산에 오른 공주 일행의 눈에도 띄었다. 공주는 깜짝 놀라 옆에 있던 김춘추에게 사정을 묻는다. 자초지종을 알게 된 공주는 두 사람이 결혼식을 올리도록 명을 내린다.

그런데, 김유신이 그렇게 어려운 과정을 겪으면서까지 동생과 김춘추와의 결혼을 관철시키려 했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김유신의 야심은 전쟁에서 무공을 세워서 좋은 신분을 계속해서 유지하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결혼을 통해서 계속되는 좋은 집안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조범환 교수)

이렇게 결속된 김유신과 김춘추 두 가문은 서서히 신라사회의 새로운 세력으로 성장한다. 이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 전쟁터에서 세운 공적이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김유신이 전쟁에 참여한 제일 처음의 기록은 629년의 낭비성 전투 때 부터였다.
김유신은 고구려의 낭비성을 공격하던 신라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을 때 출전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 또 644년에는 백제의 침략해 일곱 개의 성을 빼앗아 돌아오는 등, 수많은 전쟁에서 단 한번도 진 적이 없었다. 그런 김유신이 신라왕실에 든든한 존재였음은 당연한 이야기.

“김유신과 김춘추는 선덕여왕에게 있어 왼팔과 오른팔. 김춘추는 선덕여왕이 임금이 되기 이전부터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이후 여왕이 즉위한 이후 김춘추는 고구려와 일본을 방문하는 등 외교적인 문제를 주도하였다. 김유신은 군사력을 거의 한 손에 쥐고 있던 인물이었다.”

이렇게 전쟁의 승리로 세력을 키워가던 김유신에게 드디어 신분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가 찾아온다. 선덕여왕 16년인 647년, 상대등이었던 비담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당시 상대등은 귀족세력의 대표로 왕위에도 오를 수 있는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비담이 난을 일으킨 이유는 "여주불능선리"
즉, 여자는 정치를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비담이 난을 일으킨 것은 선덕여왕이 즉위한지 16년이나 지난 다음이었다. 새삼스럽게 여자가 정치를 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반란을 일으킨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김유신과 김춘추가 앞장서서 선덕여왕의 후계자로 올려놓은 진덕여왕 때문이었다. 비담은 차기왕위계승권을 가지고 있던 인물로, 바로 이 왕위계승과정에 반발한 것이었다. 김유신이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제 2편 - 신라와 당의 갈등은 높아만 가고

삼국 중 가장 약소국이었던 신라는 과연 어떤 과정을 통해 삼국통일을 이룰 수 있었을까.
폐위된 왕의 후손이었던 김춘추는 어떻게 왕위에 오를 수 있었으며, 패망한 나라의 왕족으로 신라에 귀화한 집안의 자손인 김유신은 어떻게 신라 최고의 장군이 될 수 있었을까.
삼국통일을 향해 달려가는 신라의 이야기, 오늘 그 두 번째가 시작된다.

김유신이 이끄는 군대가 도착한 곳은, 왕궁으로부터 불과 십여리 떨어진 명활성. 김유신은 선덕여왕 집권말기 반란을 일으킨 비담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이곳에 주둔한다.
그런데 난이 발생한지 열흘 후 이상한 사건이 터졌다. 월성에 큰 별이 떨어진 것이다. 비담은 여왕 측이 패전할 조짐이라고 소문을 낸다.
민심이 동요하자 김유신은 꾀를 낸다. 바로 연 끝에 불을 붙여 다시 하늘로 올린 것이다. 그리고 어젯밤에 떨어진 별이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는 소문을 낸다. 이 소문은 곧바로 반군의 사기를 꺾었고 반란은 쉽게 진압되었다.
반란이 진압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선덕여왕이 사망하고, 곧바로 선덕여왕의 사촌인 진덕여왕이 왕위에 오른다. 이로써 진덕여왕의 옹립에 앞장섰던 김유신과 김춘추가 실권을 잡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의문점이 있다. 김춘추는 이때 이미 왕위에 오를 야심을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왕위에 오르지 않고, 구태여 다시 여왕을 왕위에 내세웠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직까지는 명분상으로나 여러 가지로 반대하는 세력들을 압도하는 힘을 갖지 못했고 따라서 아직은 세력을 규합해서 기반을 강화해 나가야할 그런 입지에 있었기 때문에 (체제정비하고 기반 갖출) 시간을 벌기 위해서 다음에 다시 여왕을 왕위에 내세웠던 거다.” (경북대학교 사학과 주보돈 교수)

그렇다면, 당시 신라의 대외관계는 어떠했을까?
선덕여왕 대부터 시작된 백제의 공격으로 매우 힘든 상황이었다. 심지어 김춘추는 642년 백제의 대야성 공격으로 딸과 사위까지 잃고 말았다. 김춘추는 선덕여왕에게 고구려에 원병을 요청해서 원수를 갚겠다고 간청하고, 고구려로 길을 떠나면서 김유신과 피의 맹세를 나눈다. 고구려에 억류돼 돌아오지 못하면 김유신이 구하러 간다는 맹세였다. 김춘추는 60일 안에 돌아올 것을 기약하고 길을 떠났다.
그러나, 고구려에서의 일은 쉽지 않았다.

“고구려가 신라에게 뺏긴 죽령 이북의 땅을 내놓아야만 군사를 빌려주겠다고 얘기를 했다. 사실 김춘추 입장에서는 죽령 이북의 땅을 내놓으면 대당 진출기지인 당항성을 뺏기게 되는 결과가 되고 그렇게 되면 당과의 외교라든가 이런 모든 것이 끊어지기 때문에 땅을 내놓는 것이 굉장히 부담스러웠다.” (서강대학교 조범환 교수)

영토반환을 거부한 김춘추는 감옥에 갇히고 만다. 김춘추는 고구려의 옛 땅을 돌려주겠다는 거짓 약속을 하고 풀려난다.
한편, 약속한 60일이 되어도 김춘추가 돌아오지 않자, 김유신은 군사 일만을 이끌고 한강을 건너온다. 피로써 한 맹세를 잊지 않고 지킨 것이다. 두 사람은 중간에서 만나 손을 맞잡고 경주로 돌아온다. 김유신과 김춘추가 얼마나 끈끈한 사이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 일로 신라는 고구려에게 더 이상 기대하지 않고 당나라와 손을 잡을 결심을 하게 된다.

진덕여왕 2년 648년, 김춘추는 직접 당으로 간다.
당장 백제의 공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당나라밖에 믿을 곳이 없었던 것이다. 김춘추는 당태종을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백제가 강하고 교활해서 여러 차례 신라를 침략하고 지난해에는 더욱 깊숙이 쳐들어와서 당나라에 조회하러 가야하는데 길이 막히게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까 당나라가 군대를 빌려주어 흉악한 백제를 잘라 없애면 모두 편해질 것이다.”

다시 말해 함께 백제를 치자고 청한 것이다. 그리고, 당나라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중국식 의관을 수용하고, 자신의 아들을 당나라에 사실상 인질로 두게 한다.
그러나 당나라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했다. 오로지 고구려를 칠 궁리만 하는 당나라에게 백제는 관심 밖의 사안이었던 것이다. 당시만 해도 당나라는 신라보다는 백제와 더 가까웠기 때문이다.

진덕여왕이 즉위 8년만에 사망하자, 드디어 김춘추가 왕위에 오른다. 그가 바로 신라 제 29 대 태종 무열왕이다. 이때 김춘추의 나이 52세였고 김유신의 나이는 60세였다.
김춘추가 왕위에 오르자, 김유신도 귀족세력의 대표인 상대등에 오르고, 김춘추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 왕실과 겹사돈이 된다. 그의 평생의 과업이었던 신분의 한계를 뛰어넘은 것이다.
당시 신라사회에서 김유신의 위치가 얼마나 확고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경주 충효동에 있는 김유신의 릉이다. 신라의 여느 왕릉에 뒤지지 않는 규모를 가지고 있다. 또, 신라 흥덕왕 때 김유신은 흥무대왕으로 봉해지는데 왕이 아니면서 대왕의 존호를 받은 건 김유신이 유일하다.

그런데 이즈음 당과 삼국과의 외교관계에 중대한 변화가 생긴다. 백제가 고구려와 가까워지고 당나라와 외교관계를 단절하면서 당나라가 태도에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태종 무열왕은 이때를 놓치지 않았다.

“태종무열왕 6(659)년에 신라는 당에 사신을 보내어 백제를 칠 것을 요청하였다. 여기에 응해 당의 군대가 출동한 것은 무열왕 7(660)년 일이었다.” (조범환 교수)

그러나, 국제정치의 세계에서 우호적인 감정만으로 군대를 보내지 않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당나라는 나름대로의 전략과 신라를 향해 내건 조건이 있었다. 이것은 훗날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 커다란 갈등의 불씨로 작용한다.

“당나라와 신라 사이에 고구려와 백제를 다 치고 난 다음에 평양이남의 영역을 신라가 통치하기로 얘기가 됐던 것이다. 당은 우선 신라의 요구를 받아들여 백제를 친 다음, 신라의 도움을 받아 자신들의 목표인 고구려를 정벌한다는 전략을 세웠던 것이다.” (조범환 교수)

드디어 나당 연합군의 백제공략이 시작되었다.
먼저 백제군을 꺾은 것은 당나라군대였다. 그들은 사비성 앞에서 신라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장군이 이끄는 백제군과의 일대 혈전으로 예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린 김유신의 군대가 늦게 도착한 것이다. 당나라 장수 소정방은 신라 장군 김문영에게 늦게 온 죄를 물어 목을 베려고 하자 김유신은 크게 분노한다.

김유신은 “대장군이 황산에서의 싸움을 보지도 않고 약속 날짜에 늦은 것만을 가지고 신라장수를 죽이려 한다는 것은 큰 모욕이다. 나는 먼저 당나라 군사와 결전을 한 후에 백제를 깨뜨리겠다”고 하였다. 얼마나 그때 성이 났는지 머리털이 하늘로 솟아 곧추 서고 허리에 찬 보검이 저절로 칼집에서 튀어나왔다. 이 모습을 보고 소정방의 우장인 동보량이 그의 발을 밟으며 말하기를 “신라 군사가 장차 변란을 일으킬 듯 하니 살려줍시다.” 해서 소정방이 문영을 풀어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단순히 김유신과 소정방의 갈등이라고 볼 수 없는 이유가 있다.

“김문영 사건은 표면상으로 보면 작전 기일이 며칠 늦었다는 거지만 사실은 신라군의 기세를 꺾고 작전지휘권까지 한몫에 관장하고자 하는 속셈이 있었던 걸 김유신이 간파했기 때문에 반발했던 것.” (서라벌 군사연구소 이종학 소장)

백제를 차지한 소정방은 전후 처리문제로 김유신과 또 한차례 갈등을 겪게 된다. 소정방이 전쟁에서 공을 세운 신라의 장수들에게 백제 땅을 식읍으로 지급할 것을 제의한 것이다.

“이것은 당이 백제영토가 자기의 영역이다 하는 것을 과시하기 위한 중요한 의도였다. 또 한편 식읍을 지급함으로서 신라지도층내부의 분열을 획책하고자 했던 걸로 신라는 당의 의도를 간파하고 신라의 영토를 지급 받기를 거부했던 게 아닌가.” (주보돈 교수)

이러한 갈등은 후에 벌어질 신라와 당나라의 전쟁을 이미 예고하고 있는 것이었다.

제 3편 - 통일시대의 개막

삼국 중 가장 약소국이었던 신라는 백제의 군사적인 공격을 견디지 못해 당나라의 도움을 얻어 660년 백제를 멸망시킨다. 그러나, 당나라가 백제를 식민지화하려는 의도를 드러내면서, 당나라와 신라의 갈등은 점점 커진다. 바야흐로 7년간의 전쟁의 싹이 트고 있는 것이다.
신라는 강대국 당나라를 상대로 어떻게 전쟁을 치르게 되고, 마침내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는지 오늘 이야기에서 전해드린다.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군대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곧바로 철수하지 않았다. 당나라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 있다.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키고 의자왕과 대신들 병사 2만을 포로 잡아서 당으로 귀향했을 때 당고종이 소정방에게 묻기를 이왕이면 신라까지 왜 정벌을 하지 않았느냐고 질문을 하니까 소정방은 말하기를 신라의 왕은 어질고 백성을 대단히 사랑합니다. 또 백성은 왕을 충성으로서 모시기 때문에 작은 나라지만 함부로 침공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대로 왔습니다 하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서라벌 군사연구소 이종학 소장)

소정방의 대답의 진의가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신라를 치지 않고 귀국한 이유를 다그치는 당고종의 모습은 내친 김에 신라마저 쳐서 식민지로 삼으려 했던 당나라의 야심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는 당시 신라도 어렵지 않게 눈치 챌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약소국인 신라로서는 이에 대항할 만한 힘이 없었다.
당나라는 백제에 오늘날의 식민지청에 해당하는 웅진도독부를 설치하고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임명한데 이어 신라에 계림대도독부를 설치하고 문무왕을 계림주도독으로 임명한다.
백제와 신라 모두 당나라 영토라는 것이다.

664년, 당 주둔 장군이었던 유인원의 주도로 웅진도독이 된 부여융과 신라의 문무왕이 화해를 맹서하는 의식이 치뤄진다.

“흰 말을 잡아서 서로 맹세를 하게끔 한다. 말에서 나온 피를 입에 바르게 하는데, 유인원이 맹세의 글을 지었다. 그것을 신라의 종묘 안에 간직해두라고 한다. 치욕적인 부분이 ‘이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삼아서 선조의 제사를 받들게 하고, 그 옛 땅을 보전하게 하노니 신라에 의지하여 길이 우방이 되어 각기 묵은 감정을 풀고 호의를 맺어 화친할 것이며..’라는 대목이다.” (서강대학교 조범환 교수)

'맹'의식이란 대제국이 자신의 제후국을 소집해 제후국들이 충성을 맹세하고 입에 백마의 피를 바르는 의식이다. 이 의식에 참가한다는 자체가 이미 자신이 그 나라의 제후국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결국 신라로서는 자신이 멸망시킨 백제와 똑같이 당의 속국임을 인정해야만 하는 치욕적인 맹세를 한 셈이다. 660년 백제 멸망 이듬해에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았던 아버지 태종무열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문무왕은 이날의 치욕을 잊지 않았다.

나당연합군이 고구려를 멸망시킨 이듬해인 669년, 당나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티벳이 실크로드를 장악한 것이다. 당나라는 고구려 땅에 설치했던 안동도호부를 평양에서 당나라로 철수한 데 이어 670년에는 당나라 장수 설인귀를 티벳과의 전쟁에 투입한다.

신라는 이러한 국제정세를 놓치지 않았다. 문무왕은 대대적인 군제개편을 단행한다. 본격적인 전쟁준비에 돌입한 것이다.

“신무기의 개발, 무기성능의 개선에 전력투구. 말갈기병에 대항하기 위한 장창당. 또 노를 개량해서 만든 노당. 신무기를 활용한 군사조직이 이루어진다. 이렇듯이 670년대 대당전쟁과정의 군사적 대비는 유래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광범위하고 심도가 깊은 계획조치였다 생각.” (경북대 역사교육과 이문기 교수)

전쟁준비를 마친 문무왕은 671년 직접 군사를 이끌고, 당이 통치하던 웅진도독부를 총공격해서 부여융의 항복을 받아내고 사비성을 함락시킨다. 당나라 지배 아래 있던 백제땅에 대한 지배권을 서서히 장악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고구려유민의 부흥운동을 지원하는 형태로 당을 압박한다.

“신라는 군대를 보내어 부흥운동을 지원한다. 그 이유가 당나라 군대를 신라 혼자서 막아내기 역부족. 고구려 부흥군을 지원해서 당나라군대를 막아내려는 의도가 있었고..” (조범환 교수)

이러한 신라의 움직임을 안 당나라는 문무왕에게 편지를 보내서 경고한다. 백제 땅을 공격하고 고구려 부흥군을 지원하는 등의 행동을 그만두지 않으면 당나라 군대로 신라를 쳐들어갈 것이라는 협박이었다. 이에 문무왕은 곧 당나라에 값비싼 공물과 함께 글을 올려 사죄한다.
우리가 사태파악을 잘못했다는 내용이었지만, 문무왕의 이로써 당과의 일시적 화해를 통해 시간을 벌고자 했다.
문무왕은 계속해서 백제 땅을 공격하는 한편, 당나라와 전쟁을 치를 준비를 해나간다.

그리고 이 즈음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는데 앞장섰던 신라의 영웅 김유신이 일흔 아홉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절친한 친구이자 주군이었던 태종무열왕이 숨을 거둔지 12년후의 일이었다. 삼국통일의 주역이었던 김춘추와 김유신, 그들은 서로에게 어떤 관계였으며, 어떤 존재로 한국역사에 기록되고 있을까?

‘김유신과 김춘추는 입과 입술의 관계라고 할까요. 청소년 시절에는 아주 친한 벗이고, 평생의 지기. 폐위된 왕의 손자인 김춘추와 망한 나라 출신의 김유신은 그들의 지향하는 바를 서로의 결속을 통해서 이루어낸 것이다. 그래서 김춘추는 실리적인 정치가로서 신라의 왕 가운데 유일하게 태종이라는 묘호를 지닌 시대의 영웅으로 역사의 승자가 되었으며, 김유신은 삼국통일의 명장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 거죠.’

674년 당나라는 신라에 최후통첩을 해온다.
조서로서 계림주도독에 임명된 문무왕의 관작을 삭탈하고 신라를 토벌하겠다고 위협을 해 온 것이다.

이듬해인 675년 9월 당나라 장군 이근행이 20만 대군을 이끌고 드디어 신라로 쳐들어온다. 거란, 말갈 등 이민족으로 구성된 당연합군은 임진강을 넘어 신라로 쳐들어가기 위해 공격을 계속했지만 번번이 격퇴당하고, 마지막 수단으로 한탄강을 넘어 매소성으로 진격한다. 한탄강을 통해 남하하려 했던 당에게 매소성은 중요한 요새였다.

전쟁의 승리는 신라에게 돌아갔다. 그것도 크게 격파해서 말 3만380필과 많은 무기를 빼앗는 전과를 올린 것이다. 이로써 육로를 통해 신라를 공격하려는 당나라의 의도는 결정적으로 좌절되었다.
그런데, 군사적으로 열세였던 신라가 어떻게 당나라 20만 대군을 간단하게 무찌를 수 있었던 것일까?

“당시에 당군은 이근행 휘하 당병과 말갈과 거란이 중심. 특히 거란과 말갈병으로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연합작전을 수행함으로 해서 비효율적인 특성이 있어서 대단히 어려웠던 것이고 이에 비해 신라는 초기에 있어서는 고구려 부흥운동을 지원했고 이제는 도리어 신라군이 주동이 되고 고구려부흥운동을 흡수 통합해서 연합체제의 효율성을 잘 드러냈기 때문에 작전에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육군사관학교 사학과 강성문 교수)

매소성 부근은 지리적으로 험난해서 대군이 움직이기 불리한 곳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무기의 적절한 사용이었다.

“장창과 노가 승리의 포인트. 장창은 말그대로 긴 창. 긴창을 가지고 기병을 찌르게 되는 것, 말을 찔러서 말이 넘어지게 되면 기병이 떨어지게 되고 기병들을 죽이게 되는.. 노(석궁)가 굉장히 활이 멀리 나가게 되고 갑옷을 입은 병사들을 죽여. 멀리서 달려오는 기병을 찌를 수 있었고, 엄청난 파워로 갑옷을 뚫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신라군은 당나라군에 비하면 기동성에서는 떨어졌지만, 사정거리 면에서는 장창을 가지고 있었고 노(석궁)라고 하는 훌륭한 활을 가지고 있어.” (서강대 조범환 교수)

지상전에 실패하자 당나라는 서해바다를 통해 신라를 공격하기로 한다. 676년 11월 당나라 장수 설인귀가 이끄는 병선이 기벌포를 침범한다.

이곳에서 수 십 차례의 해전 끝에 신라는 당나라를 깨끗이 무찌른다.
이것이 670년, 고구려 부흥군과 손잡고 당군을 공격함으로써 촉발된 7년간의 나당전쟁의 마지막 전쟁이었으며, 이로써 신라는 당나라를 몰아내고, 고구려의 옛 땅인 대동강 유역과 원산만 지역을 다시 회복했다. 비로소 통일신라시대의 막이 오른 것이다.

삼국통일을 이루면서 현재 한반도에서 한민족이라고 불리는 단일민족국가를 처음 탄생시켰던 나라, 그것이 바로 신라였다.
신라는 민족통일의 주역으로서 고구려와 백제 유민들을 아우르며 새로운 제국의 기틀을 마련해나가기 시작한다.

(KBS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