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멸망

제 1편 - 대당전쟁의 막이 오르다

드넓은 만주벌판을 누비며 한국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나라 고구려. 단군이 세운 고조선을 계승해 ‘하늘의 자손’이라는 생각으로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켰던 고구려.
그 찬란했던 7백년 왕조도 결국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동북아시아의 강력한 고대국가였던 고구려는 왜, 어떻게 멸망했을까?
그 첫 번째 이야기다.

지금도 중국 전역에서 공연되고 있는 경극.
그 중 가장 인기 있었던 공연 중 하나는 고구려의 장수, 연개소문이 등장하는 경극으로 연개소문과 당태종 사이에 벌어진 일대 결전을 드라마틱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 경극은 1960년대 정치적인 이유로 아쉽게도 상연이 금지되었는데 연개소문과 당태종은 중국 각지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지방희곡에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역사 속 인물들이다.

연개소문과 당태종!
그들의 실제 결전은 천 4백여 년 전인 645년에 시작된다. 당시 중국을 비롯한 동북아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수나라는 고구려와의 전쟁을 통해서 국력이 피폐해지고 내부의 민란으로 인해서 결국 쓰러지게 된다. 뒤를 이어서 등장한 것이 당나라인데 초기에는 주로 수나라가 차지했던 지역의 내부를 통일하는 데 힘을 쏟았다. 또 돌궐, 고창국 등 주변의 국가들을 정리했다. 처음부터 고구려를 공격하기보다는 일단 내부의 정비를 하고 주변국가들을 통제한 다음에 마지막 공격대상으로 고구려를 잡은 것이다. 고구려와 당나라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가능한 충돌을 피하면서 유화적인 관계를 가졌다.” (고구려 연구회 이사인 윤명철 교수)

수나라가 고구려에게 크게 패한 전력을 알고 있는 당나라로서는 고구려 공격을 망설였고, 또 내부 정리와 전쟁을 준비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고구려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로 가능한 유화적인 입장을 취했다.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기도 하고 또 고구려와 수나라 전쟁에서 생포했던 포로들을 당나라로 송환하기도 했다.
하지만 고구려 지도층 내부는 이미 대당외교를 둘러싼 불화가 싹트고 있었다.

“고구려의 당나라 정책에는 두가지 기류가 나타난다.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비록 이겼지만 고구려의 국력도 상당히 많이 피폐해졌기 때문에 외교적인 유화책으로 평화를 구가하자는 세력이 하나 있었고 또 하나는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이겼는데 당나라라고 이기지 못할 게 뭐가 있나. 우리가 당나라에 저자세 외교를 할 필요 없다는 강한 자존적인 입장을 나타내는 그런 기류가 있었다.” (한가람 역사문화 연구소 이덕일 소장)

영류왕 일파는 주로 중국에 대해서 화친을 주장하는 온건파들이었고 연개소문을 비롯한 일부 귀족들은 대당 강경론자들이었다.
한편 당나라는 주변의 이민족들을 차례로 복속시켰다. 남은 것은 이제 고구려 뿐이었다. 당은 밀사를 보내 고구려의 지형 지물을 염탐케 하는 한편 고구려가 수나라와의 전승을 기리기 위해 고구려 땅에 만든 기념관을 사신을 보내 강제로 허물게 하는 등 서서히 침략의 야욕을 드러냈다.

당의 위협이 노골화되자 방어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낀 고구려는 요동지방의 성들을 연결하는 천리장성을 쌓기 시작한다. 현재 중국 요동(Liao ning)성 창시아(Chang Xia)현에 위치한 이 석성은 영류왕 14년인 631년에 착공하여 16년 만에 마무리되었는데 이 천리장성의 감독을 맡은 사람이 바로 연개소문이다.

당의 침략의지가 가시화되자 고구려의 강경파와 온건파간의 갈등도 고조된다. 연개소문은 장성축조를 맡으면서 자기 세력을 키우는데 그의 세력이 점차 커지자 위협을 느낀 온건파는 연개소문을 제거할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연개소문이 한발 빨랐다.

온건파가 자기를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연개소문은 술과 음식을 걸판지게 차려놓고 대신들을 초대해 잔치를 벌였다. 자리가 한창 무르익었을 때 그는 부하들을 시켜 백여명의 대신들을 모두 죽이고, 궁으로 달려가 영류왕도 죽인다.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연개소문은 영류왕의 조카를 왕으로 세웠는데 그가 바로 보장왕이다. 연개소문은 스스로 막리지에 올라 권력을 틀어쥐었다. 막리지는 모든 인사권과 군사권을 행사하는 직책으로 왕은 이름만 걸친 허수아비가 되었다. 고구려 말기인 642년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잡은 뒤 66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24년간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최고의 권력가였다.
하지만 연개소문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는 게 없다. 중국 측의 기록과 삼국사기의 몇 줄 안 되는 기록이 전부다. 이 기록들은 연개소문을 무자비한 독재자로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조선 후기 실학자들은 그의 대당 자주성을 높이 평가하며 4천년 역사에서 첫째로 꼽을 수 있는 영웅이라고 연개소문을 극찬했다.

“우선 사료상으로 봤을땐 일단 폭군이다. 귀족 권력을 장악했기 때문에 고구려 망하는데 일조했다는 평가가 있다. 그런데 당시 국제적인 상황으로 볼 때 고구려와 당과의 대결은 불가피했고, 이런 상황 속에서 고구려를 하나의 힘으로 모으는 지도자는 필요했다. 실질적으로 당나라 전쟁에서 연개소문이 죽기 전까지는 고구려가 결코 패하지는 않았다.” (윤명철 교수)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당태종은 쾌재를 불렀다. 고구려를 칠 명분을 찾고 있던 그에게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살해했다는 것은 절호의 기회였던 것이다. 영류왕을 시해한 연개소문을 응징하고, 고구려 백성을 구하겠다는 것이 당태종이 내세운 고구려 침략의 명분이었다.

당나라의 고구려 침략에는 신라의 역할도 컸다.
당시 동맹관계에 있었던 고구려와 백제는 신라를 견제했고 신라는 고립무원의 상태에 놓였다. 설상가상으로 고구려 • 백제가 연합하여 서해안의 당항성을 공격, 신라의 대당 주요 통로를 봉쇄하려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항성이 함락되자 다급해진 신라는 당나라에 고구려 정벌을 요청하게 된다.

드디어 645년, 당나라의 고구려 공격이 시작된다.

당태종은 군이 500여 척의 전함과 4만3000명의 선발대를 이끌고 고구려로 향한다. 그는 출정을 반대하는 신하들과 백성들을 설득하여 약 1년 여 동안 고구려 전쟁에 대비해 수나라와 마찬가지로 대대적인 준비과정을 거쳤다.

“수나라 전쟁과 다른 점이 있다면 수나라 같은 경우는 일거에 대군을 거느리고 공격을 했고, 당나라 같은 경우는 과거 수나라가 실패했던 전략을 그대로 되풀이 하지 않는다. 고. 당 전쟁에 참여했던 인물들 대부분은 수나라 전쟁에 참여했던 사람들이다. 그래서 당시 전쟁에서 어떤 점이 불리하고 전략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잘 파악하고 있다. 당태종 같은 경우는 물론 많은 병력을 거느리지만 전면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소수 정예 병력을 거느리고 전쟁을 하는 방식을 취하게 된다.” (윤명철 교수)

당나라 군사는 요동지방의 개모성과 비사성을 차례로 공격하여 양국 군사들이 큰 희생을 치른 뒤 결국 요동성에 이르게 된다.

“요동성은 현재 요양시에 있는 성으로 알려졌는데 이 요동성은 고구려가 수나라 전쟁에서 수양제 친정군을 물리치고 승리를 거뒀던 성이다. 그러니까 당연히 당나라로 봐서는 이 요동성을 공격해야 했다.” (윤명철 교수)

당나라군은 12일 동안 세차게 공격을 퍼부었지만 고구려군의 굳센 항쟁으로 요동성을 쉽사리 함락시키지 못했다. 당나라 군사들은 포차, 즉 돌대포로 성을 공격하고 때마침 불어오는 남풍을 이용해서 불화살 공격을 퍼부었다. 불화살 공격으로 불바다가 되어 버린 요동성은 19일 만에 당나라 군사에게 함락 당하고 만다.

요동성 전투에서 고구려는 최초의 참패를 맛보았다. 당태종이 이끄는 군대는 이제 안시성으로 향한다.

제 2편 - 안시성의 전투

수나라가 멸망한 뒤 등장한 당나라의 태종은 주변 이민국들을 차례로 정복시키면서 고구려를 정벌하겠다는 야심을 불태운다. 하지만 초기에는 우선 고구려와 유화적인 관계를 취하면서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는데 이때 고구려 내부에서는 대당 정책을 두고 온건파와 자주파로 갈리며 갈등이 시작되고 자주파의 중심인 연개소문 장군이 마침내 쿠데타를 일으킨다.
645년, 당태종은 연개소문의 쿠데타를 명분삼아 마침내 고구려를 쳐들어오고 요동성 전투에서 고구려는 최초의 참패를 맛본다. 이제 당나라 군사들은 안시성에 이르고 고구려와 당나라의 운명을 건 한판 대결이 시작된다.

요동성, 오골성과 함께 요동일대의 3대 거점성이었던 안시성.
산 전체가 마치 병풍을 두른 듯 성주변을 감싸고, 물길을 타고 요하로 빠져나갈 수 있는 안시성은 자연조건을 이용한 천연의 요새였다.

“안시성은 전략적으로 볼 때 상당히 중요하고 그 주변은 요동에서 가장 유명한 철 생산지다. 따라서 안시성을 뺏기게 되면 철 생산지를 뺏기게 되고 고구려의 경제력, 특히 군사력 무기를 만드는데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요하 전선에 있는 모든 성들이 함락당하고 오로지 남아 있는 것이 안시성인데 안시성을 점령하지 않으면 당나라는 동쪽으로 진군할 수가 없다.” (고구려 연구회 이사 윤명철 교수)

출정 3개월만에 안시성에 도착한 당태종.
성밖에는 당태종이 이끄는 당나라 군사가 성을 포위하고 있었고, 성안에는 주민을 비롯한 고구려인 10만 명이 공격에 대비, 팽팽한 긴장 속에 대치하게 된다. 이 때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안시성을 지원하기 위해 말갈군이 포함된 고구려군 15만명의 구원병을 급파하고 안시성 밖에서는 당군과 고구려 지원군 사이에 일대 격전이 벌어진다.

결과는 고구려군의 대패로 태종은 고구려군 중 지휘관급 3천 500명을 뽑아 당나라로 이송하고 고구려의 용병이었던 말갈 군사 3천 3백 명은 생매장해 죽였다. 당태종은 고구려 지원군을 섬멸했지만 결정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해 초조해 하고 있었다. 당 태종은 큰소리로 성을 향해 성을 함락시키면 남자들을 모조리 구덩이에 파묻겠다고 외쳤다.

당시 안시성의 성주였던 양만춘 장군도 지지않고 물러가지 않으면 성에서 나가 모조리 죽여 버리겠다고 소리치게 하였다.

고도의 심리전이 시작된 것이다. 당군이 성을 포위한지 여러 날이 지났지만 고구려 군은 성을 지키면서 출전하지 않았다. 이같은 지루한 공방전이 계속되던 가운데 당태종은 난공불락의 안시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획기적인 묘책을 세운다.
안시성 동남쪽에 흙으로 산을 쌓아 안시성을 위협하기 시작한 것이다. 안시성 안을 내려다볼 수 있는 거대한 높이의 산을 쌓아 성안을 공격하려는 것이 당태종의 작전이었다. 연인원 50만 명을 동원하여 무려 60일 만에 거대한 토산이 완성됐다.
그런데 사건이 발생했다. 토산이 폭우로 안시성 쪽으로 무너진 것이다.

토산이 무너지면서 고구려의 성벽 일부도 무너졌다.
당군에게는 안시성으로 들어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 수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고구려군에게 전화위복의 계기가 됐다. 토산이 무너진 혼란한 틈을 노려 당나라 군사를 공격한 고구려군이 토산을 선점하게 된다. 당군의 수많은 노력이 물거품으로 돌아갔고, 겨울까지 닥쳐오자 결국 당태종은 퇴각을 결심한다.

68일간의 혈전 끝에 고구려가 결국 승리한 것이다. 당태종은 포로 7만명을 전리품으로 데리고 퇴각하였다.

만주벌판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강 요하.
당태종과 당나라 군사가 퇴각한 길은 요하하구 쪽으로 늪지대가 많아 이동하기 어려운 길이었다. 당의 군대가 퇴각했다는 요하하류는 지금도 비가 오면 물이 넘치는 곳으로, 전체가 늪지대였다.

중국의 사서 자치통감에는 당태종이 직접 풀을 베어 길을 메우고 수레로 다리를 만들며 퇴각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왕이 직접 나서서 길을 만들어야할 정도로 힘겨웠던 퇴각로.
이는 당시의 전쟁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말해준다.

“여기에서 조금 더 버티다가는 당태종이 생포되거나 당나라 모든 군사가 전멸할 수 밖에 없는 그런 화급한 지경에 처해서 허겁지겁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 퇴각한 그런 극악한 상황을 볼수 있다.”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이덕일 소장)

당태종이 이끄는 군대가 어렵게 요하하구를 건너 도착한 곳이 만리장성 끝자락에 있는 임유관. 당태종은 퇴각 이후 처음으로 이곳에서 옷을 갈아입었다고 한다.

“당시 사료에는 살아 돌아 간 군졸이 얼마 되지 않았고 특히 말 같은 경우는 열에 칠팔은 얼어 죽었다고 나와 있다. 당나라로서는 대창피를 당하고 떠난 간다. 이것이 645년 고․당전쟁의 실상이다.” (윤명철 교수)

당나라군이 퇴각한 또 하나의 결정적인 이유는 당태종의 부상이었다. 일설에 의하면 당태종은 양만춘 장군에게 화살을 맞아 애꾸눈이 되었다고도 한다. 실제로 기록에 의하면 645년 이후 당태종은 각종 병에 시달렸다고 한다. 양만춘 장군은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도 끝까지 안시성에 남아 마지막까지 항전했던 인물이다.
당태종이 철수할 때 양만춘이 성에 올라 손을 흔들어주자 당태종이 성주의 기개를 높이 평가하여 비단 백필을 보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비록 전쟁에서는 승리했지만 고구려가 안시성 전투에서 얻은 손실은 컸다.

“그 당시 때 엄청난 타격을 입었는데 예를 들면 안시성 공방이 펼쳐질 때도 삼만 이상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끌려갔고 요동성에서만 1만 명의 군인과 4만 명의 백성들이 잡혀갔고 요동성만에서만 군량미가 50만석을 탈취 당했고 역시 비사성도 마찬가지고 그리고 일단 645년 전투에서는 안시성을 뺀 모든 요하 전선의 성들이 전부 함락 당했다. 고구려로 봐서는 정치적으로도 그렇지만 경제적으로 그 다음에 인력으로 엄청나게 손실을 입은 거다. 많은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고 유능한 장군들은 나중에 고구려를 치는 첨병이 된다.” (윤명철 교수)

안시성 전투는 당나라와 고구려 양국에 큰 손실을 가져왔다.
당태종은 일년 후 계속해서 고구려를 공격하지만 안시성 싸움에 패하고 돌아온 지 4년만인 649년 병마에 시달리다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 숨을 거두기 직전, 당태종의 마지막 유언은 고구려를 치는 것을 그만두라는 한마디였다. 하지만 당태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당고종은 아버지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다시 고구려 공격을 감행한다.

“당시 국제적인 상황으로 볼 때 당나라로 봐서는 반드시 고구려를 점령해야 한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치는 과정에서 내부에서 논란이 많았고 시기에서 논란이 많았다. 그만큼 고구려가 강력한 나라였던 것이다. 그런데 645년 전투에서 당나라로 봐서는 창피를 당한 거다. 당나라 내부의 문제도 있고 당나라의 국제적인 위치도 문제가 생겼고 그래서 아들인 당고종에게는 고구려를 치지 말라고 당부를 했는데 그것은 그 당시 입장이지 결국 궁극적으로는 당나라와 고구려는 일전이 불가피한 것이었다.” (윤명철 교수)

고구려는 당나라의 거듭된 침략을 물리치면서 민족사의 빛나는 시기를 장식했지만 영광의 뒤안에는 엄청난 국력의 손실, 쉽게 회복하기 어려운 깊은 상처가 도사리고 있었다.

제 3편 - 나당 연합군에 무너지다

당나라는 안시성 싸움 패배 이후, 647년과 648년에도 연달아 고구려의 해안지방을 공격하지만 매번 지고 만다. 그런 가운데 당태종이 죽고, 아들인 고종이 즉위한다.

고구려와 당나라가 전쟁을 하고 있을 때 백제와 신라도 끊임없이 영토싸움을 벌였다. 한강 유역을 차지하면서 기세를 올렸던 신라는 백제의 공격으로 곤경에 빠졌고 백제와 고구려가 주도권을 잡는가 싶더니 신라의 새로운 반격이 준비되고 있었다. 백제 의자왕의 잦은 공격으로 도움을 청하러 고구려를 찾았던 김춘추는 연개소문에게 협상을 거절당하고, 당나라로 발길을 돌린다.

“이때 김춘추라는 외교적 탁월한 인물이 나타나서 당나라와 연합을 모의하게 된다. 647년 신라와 당나라가 우호관계가 되면서 고구려 백제 협공에 대한 의지를 갖게 되고 나당 연합군이 백제와 고구려를 공격했을 경우에 신라에게 고구려 땅 일부와 백제 땅을(대동강부터 원산 이남의 땅)주겠다고 약속하게 된다. 그래서 신라가 이 땅을 할양받는 것을 암묵적으로 인정받고 고구려. 당나라 전쟁에 끼어들게 되면서 복잡한 삼국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고구려 연구회 이사 윤명철 교수)

660년 여름, 나당 연합군은 백제를 친다.

백제 의자왕의 항복을 받은 뒤 승리에 취한 당고종은 아버지의 유언 때문에 망설였던 고구려 정벌을 결심하고 660년, 신라와 당은 남북에서 고구려를 협공한다. 기병을 앞세운 당의 대군이 요하를 건너 물밀듯이 밀려왔고 신라군은 이를 지원한다.

“당나라는 660년 11월, 요하를 넘어서 고구려를 공격하고 신라의 김유신의 군대는 남쪽에서 올라온다. 본격적인 전투는 661년에 벌어졌고 당나라는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게 된다. 661년부터 667년까지 계속해서 전쟁이 벌어진다.” (윤명철 교수)

거듭되는 전쟁으로 고구려의 국력은 점점 기울어 갔고 해가 거듭될 수록 농토는 더욱 황폐해져 갔다. 국가재정은 바닥이 드러났다.
그러던 중 24년 간 고구려의 정치권력을 잡고 군림하였던 연개소문이 666년 죽음을 맞이한다. 연개소문은 아들 셋을 두었는데 당시 기록에 따르면 그는 죽으면서 이러한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너희 형제들은 고기와 물처럼 화목하거라”

권력을 놓고 다투지 말라는 절실한 유언이었다. 연개소문이 죽자 큰아들 연 남생이 모든 권력을 세습하게 된다. 하지만 아버지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아들 셋은 권력 투쟁을 벌이게 된다.

“연개소문이 죽으면서 고구려 내부에서 커다란 문제가 생긴다. 권력을 놓고 연개소문 아들들 간에 갈등이 벌어지게 된다. 그 과정속에서 연개소문의 동생이 신라로 도망을 오게 되고 그 다음에 큰아들인 남생이 정권을 장악했는데 남생이 잠깐 압록강 전선을 간 틈을 타서 그 동생 둘이 권력을 장악한다. 그렇게 되니까 남생은 돌아오지 못한 상태에서 당나라로 항복하게 되고 결국 고구려를 치는 첨병 구실을 하게 된다. 연개소문의 사후 고구려 왕실과 귀족계급은 완전히 분열상태에 들어가서 국가 경영이 어렵게 된다.” (윤명철 교수)

큰아들 연남생은 그의 영향아래 있던 남소성 등 세 개의 성과 함께 당군에 투항하였다. 연개소문이 죽자 후계자 계승을 놓고 벌어진 권력다툼은 어느 때보다 강력한 지도력이 필요하던 시점에서 고구려의 멸망을 재촉하게 된다.

667년, 이러한 고구려의 분란을 틈타 당나라가 신라와 함께 다시 고구려를 공격해온다.
내분으로 구심점을 잃은 고구려의 성들은 쉽사리 항복을 해왔고 당나라 군대는 승승장구하여, 고구려 성을 잇따라 점령하였다. 668년 당군과 신라군이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성을 에워쌌다.

나당 연합군이 평양성을 겹겹이 포위하고 공격을 퍼부은지 한달, 700년 가까이 강대국으로 군림해온 고구려의 마지막 왕인 보장왕은 더 이상 견디기 어렵게 되자 나당 연합군에 항복하고 마는데...
668년 9월 21일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성이 마침내 함락된 것이다.

화려하고 장대했던 평양성은 쑥대밭이 되었고 삼국간의 치열한 다툼도 막을 내렸다. 평양성이 함락된 뒤에도 압록강 이북의 40여개의 성은 항복하지 않는다. 안시성을 중심으로 마지막까지 대항해 싸우던 고구려는 671년 결국,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고구려 멸망 원인으로) 가장 쉽게 제기되는 것이 내부의 분란이다. 특히 연개소문이 죽은 이후 아들들의 권력투쟁이 빌미가 돼서 결국은 고구려가 멸망했다는 설이 가장 흔한 것이다. 두 번째는 전쟁이 굉장히 길었다. 수나라와의 전쟁부터 시작해서 오랜 기간 전쟁을 치르다보니까 국력이 피폐해져서 결국 고구려는 버틸 수가 없다. 또 하나는 나당 연합군이 협공을 하기 때문에 고구려는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윤명철 교수)

약 7백년에 걸쳐 주체적으로 동북아시아의 패권국가로 성장했던 고구려가 결국 멸망하면서 한반도와 동아시아 질서에는 커다란 변화가 오게 된다.

“(민족사 측면에서 보면) 첫 번째는 영토가 축소돼 대륙과 한반도와 대양을 장악했던 고구려가 멸망하면서 대륙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봉쇄당한다. 또 신라가 신라 자국책을 위해서 당을 끌어들였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외세 의존적인 성격을 강화하게 됐다. 마지막으로 우리문화 같은 경우는 한반도의 문화뿐 아니라 대륙의 문화, 바다의 문화, 농경문화 등 모두가 만들어지면서 독특한 문화적 공간을 이뤘었는데 고구려가 멸망하면서 고구려로 대표되던 북부문화적인 요소가 사라지게 되고 주로 신라의 농경문화가 주도하게 됐다.” (윤명철 교수)

평양성을 함락시킨 당나라는 식민청에 해당하는 안동 도호부를 두었다. 이에 고구려 유민들이 조직적으로 저항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당고종은 불온한 기색을 보이는 고구려 주민들을 추려내 중국의 내지로 이주시키는 등 유민의 힘을 약화시키려 했다.

고구려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백제, 신라땅으로 가고 또 일부는 돌궐과 일본 등지로 이주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고구려 옛 땅에는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남아 부흥군을 조직, 당과 신라 연합군이 점령하지 못한 성들을 중심으로 일대 저항 운동에 나섰다.
부흥군의 중심에는 검모잠이 있었다. 그는 보장왕의 서자인 안승을 고구려 부흥군의 왕으로 추대, 큰 저항세력을 이루었다. 한반도에서 당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견제하려는 신라도 부흥군을 적극 지원했다.

“고구려 부흥 운동 중 검모잠의 활동이 대표적이다. 검모잠은 안승을 왕으로 모시고 신라와 함께 당나라를 물리치는 전쟁을 했다. 고구려 부흥군은 당과 대대적인 전쟁을 압록강을 건너서 요동 지역에서 벌이는 등 대규모의 전쟁이 세차례에 걸쳐서 일어났으나, 안시성이 결국 함락이 되고 673년에는 임진강 유역 호로하 전투에서 패배해서 고구려 부흥군의 활동이 종식되고...” (고구려 연구재단 김현숙 연구위원)

당군과 맞붙어 싸우던 고구려 부흥군은 끝내 이기지 못했다. 게다가 고구려 부흥군 내부에서는 안승이 검모잠을 시해하는 등 분열이 생기면서 힘이 점차 약해졌다.
가장 강력한 검모잠의 부흥군이 분산된 뒤에도 남아있는 고구려 유민들을 다스리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당나라는 마지막 처방으로 고구려 유민들을 중국 서쪽 오지로, 실크로드 주변의 황무지로 끌고 간다.

“고구려라는 나라가 워낙 저항성이 강하니까 부유하고 강력한 세력 지배계층 2만 8천호를 모두 중국의 내지로 강제로 집단 이주 시켰다. 그런데 옮기고 나서도 남은 세력들이 부흥운동을 일으키니까 끌고 갔던 보장왕을 돌려보내서 고구려 유민을 통치하게 했는데.. 보장왕이 독립 모의를 하다 당나라에 발각이 됐다. 그래서 보장왕은 강제 유배되어 결국 사망한다. 남아있는 세력들은 중국의 황무지 지역과 사막 근처 강제로 옮겨진다. 당나라 내부에 속해있고, 민족차별을 받으면서 살아남기도 바쁜 상황이어서 내지로 간 사람들의 부흥운동은 더 이상 전개가 되지 못했다.” (고구려 연구재단 김현숙 연구위원)

그러나 고구려 부흥의 불씨가 완전히 꺼진 것은 아니었다.
698년, 당나라에 끌려갔던 유민들이 탈출하여 다시 고구려 옛 터로 돌아왔고, 이들의 지도자였던 대조영이 마침내 고구려를 계승하는 발해를 건국한 것이다.
고구려가 멸망한지 30년 만에 ‘떠오르는 해’, 발해로 부활한 것이다. 발해는 동북아시아 무대에 등장한지 백 여 년 만에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게 된다.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로 표방했다. 또 발해는 아주 빠른 속도로 영역을 회복하게 된다. 고구려가 옛날에 차지했던 땅들을 거의 다 회복을 하게 된다.” (고구려 연구재단 김현숙 연구위원)

발해 이후에도 고구려는 고구려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 고려로 부활했고, 조선시대에는 고구려를 선조의 역사로 높이 받들어 고구려의 시조왕과 영양왕, 을지문덕 등에 제사를 지냈다. 비록 고구려는 멸망했지만 그 의식만은 역사를 통해 전해져 우리 겨레의 정신 속에 뿌리깊게 살아 있는 것이다.

(KBS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