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멸망

제 1편 - 삼국통일전쟁의 촉발

660년 백제는 중국 당나라와 연합한 신라의 공격을 받고 멸망한다. 이로써 7백년 역사의 백제는 역사에서 지워지는데 후세는 백제 몰락의 원인을 마지막 왕이었던 의자왕이 향락에 빠져서라고 하지만 과연 한 나라의 멸망이 그 때문 만이었을까?
더구나 당시 백제는 신라와의 전쟁에서 계속 이기고 있었고, 삼국 가운데 가장 강성한 국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렇다면, 백제는 왜, 어떻게 멸망한 것일까?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
그는 고대사의 극적인 로맨스 속에서 태어난 아들이었다. 이 로맨스는 현존하는 신라 향가 중 가장 오래된 것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공주님 선화공주님 마동과 노닐다 궁궐로 돌아가네"

이 노래에 등장하는 선화 공주는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로 미모가 뛰어났다고 한다. 공주가 밤에 몰래 만난다는 마동(서동이라고도 함)은 훗날 백제의 왕이 되는 무왕이다. 마동은 선화공주를 사모하여 위와 같은 노래를 지어 신라 아이들의 입을 통해 널리 퍼뜨렸다.
노래는 곧 왕실로까지 흘러 들어갔고, 선화공주는 억울하게 아버지 진평왕의 노여움을 사 유배를 가게 되자, 마동은 선화공주를 데리고 당당히 백제로 돌아온다.

그렇다면 당시 백제와 신라는 어떤 사이였을까?
당시 백제와 신라는 적대관계에 놓여있었다. 한강 유역의 남한성과 북한성 일대의 영토를 빼앗기고,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의 성왕이 전사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백제와 신라가 혼인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당시로선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서동, 즉 훗날의 무왕은 굳이 신라의 공주를 아내로 삼고자 했을까?

“신라왕실을 자신의 외척으로 삼음으로써 백제 내에서 자신의 정치적 개반을 강화시키려고 하는 정치적 의도에서 선화공주를 아내로 삼았다" (한국전통문화연구소 이도학 교수)

로맨스를 가장한 정략적 결혼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 일로, 무왕은 백제 정국의 중심에 확고히 서게 될 뿐 아니라, 신라와 유화적 관계를 맺음으로써 백제의 힘을 기르는 기회를 얻는다. 곧 왕위에 오른 무왕은 강력한 지도력으로 발빠르게 내정을 안정시키는 한편 백제를 재무장시킨다.

그리고 이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왕자가 바로 의자왕이다.
의자왕이 태자로 책봉된 것은 마흔 살 전후! 그가 왕위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이 결코 순탄하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신하들은 신라공주의 아들로 태어난 그가 훗날 백제보다 신라에 득이 되는 일을 할까봐 두려워했고, 게다가 무왕에게는 선화공주 외에도 백제 출신의 왕비들이 있었다. 백제계 왕비들도 의자왕이 태자가 되는 것을 차단하려 했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

이런 우여곡절 끝에 641년 왕위에 오른 의자왕은 그 후 660년 멸망하기까지 백제를 통치한다. 의자왕은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왕이었다. 왕의 칭호는 왕의 사후 후세 사가들에 의해 붙여지는 것으로 의자왕이란 의롭고 자혜로운 왕이란 뜻이다. 삼국사기에도 의자왕의 성격이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성격이 용감하며 대담하고 결단력이 있다. 침착하고 사려가 깊다.‘
뿐만 아니라 해동증자라는 칭송을 얻었는데, 증자는 공자의 제자로 효심이 지극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즉, 의자왕은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깊다는 뜻이었다. 이와 같은 기록들은 의자왕이 내치에 상당한 안정과 성공을 거두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의자왕 당시 백제의 국력은 어느 정도였을까?

“당시 신라가 백제를 대국이라고 부른 적이 있다. 신라인구는 기록은 없다. 백제인구가 고구려인구보다 더 많았다. 고구려가 멸망할 때 69만7천호 350만, 백제가 멸망할 때 76만호 4백만 정도가 되는 것. 고구려가 넓었지만 백제가 고구려보다 인구가 많았고 경제적인 측면, 농사가 잘되고 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백제가 고구려보다 우위에 있었던 것. 국력은 경제력과 인구수를 가지고 하는 것인데, 백제가 가장 강성했던 것.”

의자왕은, 바로 이러한 내부의 안정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신라에 대대적인 공격을, 그것도 지속적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대부분은, 의자왕이 몸소 전쟁터로 나가 군사를 이끌었고 거의 모든 전쟁을 백제의 승리로 이끌었다.

그중 가장 주목할 것은, 대야성 전투다.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에 위치한 대야성은 소백산맥을 넘어 신라로 가는 가장 빠른 접경지역에 위치해 있어서 이곳을 점령할 경우 경주까지 곧바로 진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의자왕은 왕위에 오른 이듬해인 642년, 이곳을 총공격한다.
승리는 백제에게로 돌아간다.

“대야성이 함락되었다라고 하는 것은 신라 입장에서는 대단히 큰 손실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즉 백제의 입장에서는 거꾸로 신라의 수도인 경주를 이어 공격할 수 있었다는 것이 될 수 있을 것이고 신라의 입장으로선 이제 백제군을 코앞에 두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전주교대 사회교육과 김주성 교수)

대야성 전투는 삼국통일전쟁을 촉발시키는 결정적인 전쟁이었다.
대야성의 함락으로 모든 신라인이 충격을 받았지만,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훗날 신라의 왕이 되는 김춘추였다. 대야성의 성주는 바로 김춘추의 사위인 김품석. 딸과 사위가 백제의 장군 윤충에게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시신은 백제로 가져가고 김춘추에게는 딸과 사위의 목만이 전해졌다. 나머지 시신조차 돌려 받지 못한 김춘추는 복수의 칼을 갈게 되고, 백제와 신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의자왕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친히 군대를 이끌고 나가 신라의 사십여 성을 일거에 함락시켰다. 신라에 대한 백제의 총공세가 시작된 것이다

"왕이 몸소 전장에 나가서 작전을 지휘하고 그리고 전쟁을 치르게 되는 것인데 이것은 전쟁의 비중이 크다는 것을 알려주는 동시에 이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면 국왕의 권위랄까 왕권이라고 하는 것이 크게 강화되게 마련이다. 이러한 것을 노리고 의자왕은 몸소 대신라전쟁에 친정을 단행했다, 라고 볼 수가 있고. 그리고 40여개 성을 일거에 장악을 함으로써 의자왕의 권위랄까, 왕권의 위상은 크게 증대됐다, 이렇게 볼 수 있다" (이도학 교수)

신라는 다급했다. 복수심은 크지만, 신라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김춘추가 직접 고구려 땅에 들어가 고구려의 실질적인 최고지도자였던 연개소문에게 군사적인 지원을 요청한다. 그러나, 동맹은 맺어지지 못한다. 연개소문은 551년에 백제와 연합해서 신라가 빼앗아간 죽령 이북의 땅을 돌려줄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연개소문은 자신의 요구를 거절한 김춘추를 감금시킨다.

이후,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는 오히려 악화되고, 고구려와 백제가 동맹 관계로까지 나간다. 백제는 고구려와 연합해서 신라의 대중국 교섭지역인 당항성, 지금의 경기도 남양을 공격한다. 이때 백제는 중국 당나라를 군사적으로 지원하려는 신라를 공격해서 7개의 성을 함락시킨다.
또 665년 고구려, 백제, 말갈 연합군은 신라에 대규모 공격을 가해서 30여 개 성을 함락시킨다. 신라는 계속 밀리기만 했던 것이다. 신라는 백제에 비해 얼마나 힘이 약했던 것일까?
김춘추의 매제이기도 하고 삼국통일의 주역인 김유신 장군이 진덕여왕에게 백제에 복수를 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청하자 진덕여왕이 “작은 나라인 우리가 큰 나라인 백제를 건드렸다가 위험을 당하면 장차 어떻게 하겠소”라고 말한 일화가 있다.

다시 말해서 신라에게 멸망한 백제는 오히려 신라보다 큰 나라, 신라가 대적할 수 없는 강국이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춘추의 백제에 대한 복수심은 줄어들 줄 몰랐고, 이는 곧 동북아시아의 정치 판도를 바꿔놓게 된다.

수세에 몰린 신라는 당나라와의 연합을 분주히 모색하고 있었다.

제 2편 - 보름달과 초승달

백제 무왕과 신라 선화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의자왕은 왕위에 즉위하자마자 신라에 대한 총공격을 단행한다. 한편, 642년 대야성 전투에서 딸과 사위를 잃은 신라의 왕 김춘추는 백제에 복수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중이나 여의치 않다. 당시 국력으로 비교해보아도 백제가 신라보다 훨씬 강대국이었기 때문이다.

백제는 660년에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멸망할 때까지 신라와 모두 열세차례의 전쟁을 치렀는데, 백제가 아홉번을 이겼고, 나머지 네 번을 신라가 이겼다.

2년에 한번 꼴로 자신들을 공격해 오는 강성한 백제군의 위력 앞에 신라의 지배층은 큰 위기의식을 갖는다. 이러다가는 백제한테 나라가 망할 수도 있겠다는 위기의식이었다. 그러나, 신라는 힘이 없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한가지. 다른 나라의 힘을 빌리는 것이었다.

“고구려에도 가고 바다 건너 왜도 갔지만, 그들의 세력을 끌어들일 수 없었다. 결국은 동아시아의 강대국인 당나라를 끌어들여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고 당나라 세력을 끌어들이게 됐던 것. 일종의 생존전략이었던 겁니다.” (한국전통문화연구소 이도학교수)

당나라의 관심은 신라나, 백제가 아닌 고구려에 있었다. 수나라의 뒤를 이어 건국 초기부터 수차례 고구려 공격에 나섰으나 크게 패하고, 당 태종은 전쟁의 여파로 세상을 떠나면서 그 아들 고종에게 ‘앞으로 고구려를 정벌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긴 터였다.

신라는 당나라와 손을 잡고 백제를 공격할 준비를 차근차근 해나간다. 게다가 해동증자로 존경을 받았던 의자왕은 점점 다른 모습으로 변해갔다.
궁궐에서는 매일 잔치가 열렸고, 의자왕은 궁녀들과 음란하게 놀면서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않았다. 신하 성충은 의자왕에게 충성 어린 마음으로 나라를 어질게 돌볼 것을 여러차례에 걸쳐 충고하지만 의자왕은 전혀 귀기울이지 않았고, 급기야는 불같이 화를 내며 성충을 옥에 가두고 굶어죽이라는 명령을 내리고 만다. 성충은 옥에 갇혀 굶어 죽어가는 중에서도 위기에 처한 백제를 근심하며 간곡한 마음을 담아 의자왕에게 상소를 올린다.

“비록 죽는다 할지라도 소신은 나라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일찍이 시국의 변천을 살펴보건데, 가까운 장래에 반드시 전쟁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때에 군사를 쓸 때, 지세를 잘 살펴서 택해야 하니, 상류에 자리를 잡고 적을 맞으면 나라를 보전할 수 있습니다...”

이 상소는 구체적으로 무슨 뜻이었을까?

백제에는 중요한 요충지가 두군데가 있다. 치면이라고 하는 고개가 있는데 그쪽을 통해서 신라의 육군이 직격해 들어올텐데 치면을 막으면 되고 기벌포라는 포구가 있는데 당나라 수군들이 상륙할테니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게 되면 백제는 안전하게 국체를 보존할 수 있다는 이야기.

신라와 당나라의 침공에 대해서 나라를 지킬 수 있는 건의를 했지만 채택되지 않았고 결국 백제의 몰락으로 이어진다. 백제의 멸망을 막을 수 있었던 충신의 마지막 말을 의자왕은 술잔을 손에 든 채 무시해버렸다. 성충은 결국, 옥에서 비참하게 굶어죽고 만다.
그 즈음 백제에는 민심도 흉흉해져 상서롭지 않은 이야기들이 떠돌았다.

궁중의 늙은 나무가 바람도 불지 않는데 흔들리고 사람이 우는 듯한 소리를 내는가 하면, 해변에서는 죽은 물고기들이 수없이 떠올랐고, 성안의 우물이란 우물은 모두 핏빛으로 변했다. 이런 불길한 징조는 궁중에서도 이어졌다.

귀신이 궁중에 들어와서 백제가 망한다고 크게 외치더니 땅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의자왕이 사람을 시켜 귀신이 들어간 땅을 파보게 했더니 석자 가량의 거북이가 나오게 되는데 거기 등에 글이 씌여 있었다. 백제는 보름달과 같고 신라는 초승달과 같다고 씌여 있어서 한 무당에게 물어봤다. “보름달과 같다는 것은 가득 찼다는 것이고 가득 찬 것은 기울게 마련입니다. 초승달은 가득 차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점점 차기 마련입니다.”라고 풀이를 한다. 이것은 백제는 망하고 신라는 번성한다는 풀이가 되기 때문에 왕이 분노해서 뜻풀이를 한 무당을 죽였다.
의자왕은 또 다른 무당을 불러 물었다. 두 번째 무당은 왕의 안색을 살피다가 이렇게 말한다. “보름달은 세력이 왕성한 상징이고 초생달은 아직 힘이 미약하다는 뜻이니 우리나라는 융성하고 신라는 미약한 나라라는 뜻입니다.” 그때서야 왕은 기뻐하며 다시 잔치를 벌인다.

이러한 소문을 듣고 가장 기뻐한 것은 신라 태종무열왕 김춘추였다. 김춘추는 아들을 당나라에 보내 이제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칠 때가 되었다고 알렸다. 660년 봄, 당나라는 침략군을 편성한다.
당나라의 대장군 소장방이 최고 사령관에 임명된다. 그는 13만 대군을 이끌고 산동반도를 출발한다.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쳐들어온다는 급박한 소식이 전해지자 백제 조정에서는 큰 혼란이 일어났다. 의자왕은 여러 신하들에게 막아낼 방법을 물었다. 그러나 백제 지배층들은 서로 다른 의견을 내놓으면서 자신의 의견이 옳다고만 주장했다.

이렇게 입씨름을 벌이는 동안 사정은 더욱 급박해졌다. 벌써 당나라 군대가 백마강으로 들어오고, 신라군은 탄현을 넘어 밀려들어왔다. 의자왕은 최후의 수단으로 계백장군을 보내 결사대로써 막게 했다.

황산벌 싸움은 680년 백제의 마지막을 장식한 대결전이었다.
신라의 장군 김유신은 당의 대군과 연합해서 단숨에 백제를 쳐부수려고 밀려들었다. 백제에게는 아무리 방어하더라도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던 것이다. 의자왕으로부터 출전을 명령 받은 계백장군은 자신이 패전하고 백제가 멸망하면 아내와 자식들이 적군에 치욕을 당할 것이라 판단하여 출전을 앞두고 처자를 자기 손으로 죽였다.

아내와 자식들의 목을 벤 계백은 5천의 군사들을 이끌고 황산벌로 향한다. 그러나 넓은 들판에서 열배나 많은 신라의 대군을 정면으로 상대할 수는 없었다. 계백장군은 험한 곳을 이용해 세 곳에 군영을 설치한 다음에 신라군대를 기다린다. 신라 군대의 병력을 분사시킨 다음에 싸움을 벌일 생각이었던 것이다. 계백은 대치하고 있는 신라군대와 맞서 싸우기 전에 군사들을 향해 이런 말을 한다.

“옛날 월나라 구천은 5천의 군사로서 오나라의 70만 대군을 쳐부수었다. 조금도 두려워하지 마라. 지금이야말로 승리를 거두어서 나라를 지킬 때인 것이다.”

백제 군사들은 함성을 지르며 적진으로 쳐들어갔다. 이들의 기세에 눌린 신라의 군대는 세 번씩이나 후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제 3편 - 백제, 낙화암에 지다

660년 김유신 장군이 이끄는 신라군대와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 연합군이 각각 육지와 수로를 통해 일제히 백제를 쳐들어온다.
의자왕은 최후의 수단으로 계백장군을 5천의 군사와 함께 황산벌로 보낸다. 그러나, 이들이 맞서야 할 신라군은 열 배가 넘는 5만명의 대군이었다. 가족을 죽이고 나온 계백장군의 용맹함 앞에 백제군은 목숨을 다하여 싸우지만, 수명을 다한 촛불처럼 백제의 운명은 이미 기울어가고 있었다.

계백장군의 결의에 가득찬 연설은 군사들의 사기를 높였고, 그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자신들보다 열 배나 많은 신라의 군사들을 연거푸 무찌른 것이다. 신라로서는 예상치 못한 패배였다.
김유신을 비롯한 군대의 사령부는 다급했다. 당나라 군대와 사비성에서 합류하기로 약속한 상태라 마냥 지체할 수만은 없었다. 신라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돌파구가 필요했다. 신라 장군 김흠춘과 김품일은 최후의 수단을 내놓는다. 김흠춘은 아들 반굴을, 김품일 역시 열여섯의 아들 관창을 말에 태우고창 하나만 들려 출병시킨다.

관창은 백제군에게 사로잡혔으나 곧 풀려났다. 계백 장군이 어린 관창의 용기를 가상히 여겨 살려보냈기 때문이다. 관창은 다시 백제 진영으로 돌진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의 목만이 돌아왔다.
아버지 김품일은 관창의 머리를 잡고 소매로 피를 닦으며 아들의 용맹을 칭송한다.

김품일 ; ‘나라를 위해서 죽었으니 후회가 없으리라.’

관창의 장렬한 죽음은 당연히 신라군을 자극했다.
전의에 불타는 신라군이 폭포수처럼 백제의 진영으로 밀려들었다. 계백장군과 5천 결사대 역시 죽기를 각오하고 맞서 싸웠지만, 결과는 백제의 패배였다. 사실상 백제의 마지막 방어벽이었던 황산벌이 뚫리고 만 것이다.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장군은 끝까지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다. 지금도 백제의 고도 부여에는 백제 사람으로는 유일하게 계백장군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어쨌든 5천명의 군사 중에서 살아남은 것은 항복한 충상과 상영 등 지도자급 스무 명. 이들은 구차하게 살아서 훗날 신라의 신하가 되어 백제 부흥운동을 진압하는데 앞장서게 된다.

황산벌 전투에서의 패배는 백제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다. 백제의 중앙군은 다시 정비하기 힘들 정도로 마비되었고, 이제 남은 것은 사비성과 지방에 흩어져 있는 일부 군사들뿐이었다.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가 금강 하구를 거쳐 사비성을 향해 쳐들어오고 있었다. 13만 대군 앞에 백제군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이미 만 명이 넘는 군사들이 전사하고 말았다.
의자왕은 이 모습을 지켜보며 태자인 부여효와 가까운 신하들을 거느리고 웅진으로 도망쳤다. 이렇게 되자, 둘째 아들인 부여태가 사비성을 지키며 스스로 왕이라고 선포하면서 성을 굳건히 지켰다.
그러자 사비성에 남아있던 태자의 아들 문사는 숙부 부여융에게 당나라 군대에 항복하자고 하는데...

“숙부(부여태)가 제멋대로 왕이 됐는데, 당군이 돌아간다고 해도 우리가 안전할 수 있겠는가 하면서 문사가 성 바깥으로 나와 당나라 군대에 항복했고, 사비성안에 있던 백성들도 일제히 따라 나가 당나라 군대에 항복을 했던 것.” (한국전통문화연구소 이도학 교수)

일제히 성을 뛰쳐나가는 백성들을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당나라 군대가 승세를 타고 성 위에 올라가 당나라 깃발을 세웠다. 성 주변에 이미 당나라 깃발이 나부끼는 상황이었으니, 부여태가 이끄는 군사들은 독 안에 든 쥐였다. 부여태는 성문을 열고 나와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백제는 몰락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의자왕으로서도 이대로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의자왕은 네 번이나 당나라 군 진영에 사신을 보내 타협을 모색했다. 그는 비싼 재물을 바치면서 간절하게 철군을 요청했다. 당나라 입장에서는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신라의 복수심에 이끌려 백제의 멸망을 주도하게 된 당나라 군대는 사비성을 장악하게 되었고, 그것은 곧 약탈과 강간으로 이어졌다.

궁궐의 왕녀들은 그들에게 가장 좋은 먹이나 다름없었다. 궁녀들은 당나라 군사들에게 쫒겨 사비성의 배후산성인 부소산 절벽 위 벼랑 끝으로 몰려들었다. 뒤에는 당나라 군사들이, 앞에는 낭떠러지가 펼쳐져 있었다.
한 궁녀가 먼저 몸을 던지자 뒤따르던 궁녀들도 꽃처럼 떨어져 내렸다.

이 바위를 사람들은 훗날, 낙화암이라고 불렀다. 꽃이 떨어진 바위, 라는 뜻이다.
삼천명의 궁녀가 떨어져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것은 많다는 뜻이지, 19세기 후반 훨씬 규모가 컸던 조선왕실의 궁녀 숫자가 6백여명 정도인 것을 감안한다면 당시 사비성에 3천명의 궁녀가 사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낙화암의 슬픈 전설은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도 후세인들의 감성을 자극시켜 많은 노래와 문학작품을 낳았다.
특히 삼천궁녀를 노래하는 가요는 수십곡이나 되는데 일제시대부터 시작해 21세기인 오늘날까지도 불리우고 있다.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
잃어버린 옛날이 애달프구나
저어라 사공아 일엽편주 두둥실
낙화암 그늘에 울어나 보자

고란사 종소리 사모치는데
구곡간장 오로지 찢어지는 듯
누구라 알리요 백마강 탄식을
깨어진 달빛만 옛날 같으리


불에 타는 사비성. 당나라 군대의 칼 앞에 스러지고, 백마강에 몸을 던진 궁녀들.
의자왕에게 남은 것은 현실을 인정하는 것뿐이었다. 그는 항복을 통고하고 웅진성에서 사비성으로 내려왔다. 660년 7월18일 항복의식을 치르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나당연합군이 공격을 시작한지 보름도 못되었고, 의자왕이 사비성에서 도망친지 불과 닷새만에 치러진 항복식이었다.
태종무열왕은 당의 소정방과 함께 높은 걸상에 앉았다. 그 아래, 의자왕과 태자가 땅에 엎드렸다. 의자왕은 소정방과 태종무열왕에게 술잔을 올렸다.

“의자왕이 허리를 구부리고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하고 술을 올리면서 항복의 예를 했다. 백제 등 신하 수백명이 나라의 치욕스런 모습을 보면서 통곡을 했던 것.” (성신여대 사학과 명예교수 이현희 교수)

한강에 뿌리내리고 국가의 터전을 잡아 칠백여 년 동안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백제왕국이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었다.

지금도 금강의 어귀에는 유왕정이라는 산이 있다.
유왕정, 왕이 머문 곳이라는 뜻이다. 이곳은, 백제가 망하고 당나라로 끌려가던 의자왕과 백제 유민들이 마지막 이별을 나눈 곳이다. 당시 백성들이 왕을 보내며 통한의 정을 그린 산유화가는 아직도 이 지역의 구전 민요로 내려오고 있기도 하다.

“의자왕이 끌려갈 당시 백제 유민들이 이 산에 올라와 많이 울고 통곡하고 임금을 부르고 그러니까 엄청난 통곡의 현장이었죠 임금님이 백제 유민들한테 위로도 해 주고 했던 그런 슬픈 전설이 있는 산입니다” (김정은 유왕산 추모제 추진위원장)

660년 8월 17일, 사비성의 관문인 구드래 나루에서 의자왕은 태자 융을 비롯해 1만2 천 여명과 함께 포로의 신세가 되서 당나라로 끌려간다.

”이때 의자왕은 나이가 많아 60이 훨씬 넘어 항해를 하면서 몸이 피곤하고 나라가 망했고 마음이 참담한 상황. 당나라 조정에 끌려가 당나라 황제 앞에 무릎 꿇는 모습을 보여줬고, 며칠 안되서 천추의 한을 품고 죽어 낙양 북망산에 묻혀.” (이도학 교수)

그러나, 지금 의자왕의 무덤을 찾을 길은 없다. 1966년부터 76년까지 10년 간 계속되었던 중국의 문화혁명 때 홍위병들이 낙양의 북망산에 있는 무덤 수천 개를 갈아엎었는데, 이때 의자왕의 무덤도 휩쓸려 사라졌기 때문이다.

지난 2천년 부여에서는 의미 있는 행사가 열렸다. 중국 낙양 북망산에 묻혀 있었던 의자왕의 넋을 모시는 영토봉안식이 있었다. 의자왕은 비록 넋이나마 백제 왕실 묘역에 아들 융과 함께 다시 묻혔다.

제 4편 - 부흥의 함성도 꺾이고

660년 7월18일, 의자왕은 당나라 장수 소정방과 신라 태종무열왕 앞에 무릎을 꿇고 술을 따르는 항복식을 치르고, 백성 76만호와 37개 고을, 2백 개의 성을 연합군에 바쳤다. 백제의 7백년 역사가 마지막 장을 넘기는 순간이었다.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왕은 태자 부여융과 포로의 신세가 되어 당나라로 끌려간다. 나라를 잃은 백제유민들은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백제의 멸망, 오늘 마지막 편 이야기로 전해드린다.

현재 충남 부여 소재 국립 부여 박물관에는 백제 왕실의 상징으로서 당시 백제 최고의 보물이었던 금동대향로가 보관돼있다. 높이 62㎝, 무게 11.8㎏이나 되는 대형 향로로, 뚜껑에는 스물 세개의 산들이 네다섯겹으로 첩첩산중을 이루면서 피리와 소비파, 현금, 북들을 연주하는 5인의 악사와 각종 무인상, 기마수렵상 등 17인의 인물상, 봉황, 용을 비롯한 상상의 날짐승과 호랑이, 사슴 등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모두 42마리의 동물들이 표현되어 있다. 또, 6종류의 식물과 20여군데의 바위, 산 중턱에 있는 산길, 산 사이로 흐르는 시냇물, 폭포, 호수 등이 변화무쌍하게 표현되어 있다.

몸체는 활짝 피어난 연꽃을 연상시키고, 받침대는 하늘로 치솟 듯 고개를 쳐들어 연꽃봉우리를 입으로 떠받고 있는 한 마리의 용으로 되어 있다.

가히 동아시아 최대의 걸작품으로 손꼽히는 금동대향로는, 1993년 부여에서 기적적으로 발견되었다.
일반적으로 이런 보물이라면 왕릉에서 발견되기 마련인데, 대향로가 발견된 곳은 한 물웅덩이 진흙속이었다. 그런데, 그 물웅덩이라는 것이 안쪽 바닥에는 나무 판자를 깔고 그 위에는 잘게 부순 토기 조각이 깔려 있었다. 다시 말해서 누군가 일부러, 그것도 황급히 묻었다는 뜻이다.

"백제 금동 대향로는 왕실의 최고의 물건이 됩니다. 그런 최고의 물건이 누군가에 의해서 땅속에 묻혀진 채로 발견이 됐습니다. 이런 위급한 상황, 제대로 잘 보관되지도 못하고 땅 속에 묻힐 정도로 그렇게 위급한 상황은 바로 백제가 마지막 망할 때 얼마나 다급했는지 그런 상황을 잘 말해준다고 하겠습니다." (국립부여박물관 서오선 관장)

백제의 멸망은 아무도 예상치 못할만큼 갑작스럽게 왔다. 단 보름만에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군사적으로 밀려 순식간에 멸망당하고 만 것이다.
당나라로 끌려간 의자왕은 한달이 못되어 한 많은 생을 마감한다. 왕자 부여융은 앞으로 전개되는 백제의 부흥운동을 저지하는데 철저하게 이용당한다.

백제의 부흥운동은 의자왕이 항복이 있은지 두어달이 못되어 여기저기서 줄기차게 전개되었다.
처음에 몽둥이와 죽창, 낫과 쇠스랑을 들고 모였던 부흥군은, 작은 규모로 움직이는 당군을 공격해 포로로 잡는가하면, 당군의 무기를 빼앗아 무장을 갖춘 다음 웅진을 점령하고 그 여세를 몰아 수도 사비성까지 진출할 정도였다. 지방의 성들은 거의 부흥군의 거점이 되었고, 군사와 백성들은 속속 부흥군으로 지원하고 나섰다.
661년, 부흥군은 통일적인 조직을 갖추기 시작한다. 의자왕의 사촌동생으로 좌평이었던 복신은 의자왕이 항복할 때, 임존성에서 끝까지 항거했던 인물이다. 그는 승려인 도침과 함께 부흥의 결속을 다진다.

“도침은 계속 군대를 이끌고 나가면서 당나라 군대에 계속 이기면서 힘이 세져. 특히 복신과 합세해서 백제지역을 거의 회복. 공주, 부여 땅만 빼고 2백 여성을 거의 회복, 강성한 면모를 보인 백제 부흥의 영웅. 복신은 일본서기에 보면, 백제 부흥운동의 영웅으로 잃었던 나라를 복신이 회복했다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백제유민들의 지지와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사람입니다.” (한국전통문화연구소 이도학 교수)

도침과 복신이 백제 부흥을 외치자 많은 백제 유민들이 모여들었다. 복신은 왜에 사신을 보내 당시 왜에 머물고 있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을 보내줄 것을 요청한다.
부여풍은 지금으로 말하자면 대사격으로 일본에 파견돼 있던 인물. 그는, 일본에서 백제군이라는 호칭으로 불리며 존경을 받았고, 학식이 풍부해서 일본 왕실의 자문 역할을 하기도 했다.

“백제에서 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책이나 불교 등 선진문물을 가지고 간다. 일본에서 백제로 보내는 것을 보면 대부분 군사원조와 관계가 있는 것들이다. 큰 눈으로 보면 일본은 한반도에서 신라, 고구려와 싸우고 있는 백제를 군사적으로 지원해주고 백제는 일본에 선진문물을 제공해주는 관계였다.” (고려대 역사교육과 김현구 교수)

일본의 군사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백제로 돌아온 부여풍은, 복신과 도침 등 부흥군에 의해 새 왕으로 추대된다.

백제 부흥군의 기세는 하늘을 찔렀다. 곳곳에서 당나라 군대를 무찌르고 성을 함락시켰다. 신라군은 계속 부흥군 소속의 성들을 공격했지만, 한번도 이기지 못하고 오히려 피해만 입었다. 부흥군은 당나라 군대의 토벌대장인 유인궤에게 글을 보내 정식으로 대결을 벌이자고 제의한다. 그러자 유인궤는 사자를 보내 투항을 권유한다.
이때 도침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한 나라의 대장군이니 직위가 낮은 당군의 사자와는 일을 논의할 수 없다”
그리고 사자를 가두어 두었다가 회답의 글도 없이 돌려보냈다. 부흥군은 백제의 정통을 이은 어엿한 나라로 자처했던 것이다.

분노한 당나라 군대 일만명이 출격했으나 곧바로 부흥군에 섬멸 당했다. 그런데, 이 즈음 부흥운동이 위기를 맞게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복신이 자신의 지휘를 따르지 않는 도침을 처단하고, 부여풍까지 죽이려 하자, 이를 안 부여풍이 미리 복신을 죽인 것이다. 이런 내분을 틈타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은 백제 부흥군을 기습공격한다. 백제 부흥군 또한 혼자가 아니었다. 왜의 지원군이 바다 건너 백마강에 도착한 것이다. 2만7천명에 이르는 대규모의 지원군이었다.
일본이 이처럼 대규모의 지원군을 보낸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백제가 무너지게 되자 왜조정은 굉장히 긴장한다. 왜냐하면 백제의 몰락은 그대로 끝나는게 아니라 일본열도에 군사적인 위협으로 백제몰락이 다가오기 때문에“ (이도학 교수)

백마강에서 왜와 백제의 연합군, 그리고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간의 치열한 전쟁이 벌어진다. 그러나 출병한지 보름만에 왜군은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대패하고 만다.
당시의 상황을 삼국사기는 이렇게 적고 있다.
“네번 싸워서 모두 이기고 배 4백척을 불사르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로 오르고, 바닷물도 붉은 빛을 띠었다“

전투가 처절한 패배로 끝나자, 부여풍은 고구려로 망명한다. 구심점을 잃은 부흥군은 그후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3년간에 걸친 백제의 부흥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원인, 무엇보다 지배층간의 내분에 가장 큰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백제가 멸망한 원인과 같았다.

부흥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백제의 많은 유민들이 떠난 곳은 일본이었다.

“일본서기로 보면 665년 백촌강(백강)에서 패한 백제왕족을 나니와(오늘날의 오사카)에 살게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때 백제에서 망명해온 백제왕족이 이곳에 살고 있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나타내는 것입니다.” (나니와궁(宮) 사무소 세키야마 부소장)

지금도 오사카 지역에는 백제(Kudara)라는 이름이 붙은 절, 신사, 절터며, 또한 주택가에서는 Kudara라는 성의 문패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백제 왕족들이 왜에 정착한 다음에 갖게 된 성이다. 왜는 백제 왕족들에게 각별한 대우를 했다. 백제유민들은 일본 최초의 물시계와 해시계를 만드는 등의 기술을 펼치는가 하면, 절과 석탑을 짓는 문화와 지식을 전파했다.

“백제에서 건너간 관료들이 일본의 율령국가를 형성해 나가는데 큰 역할을 했다. 또 하나는 역시 당시 백제에서 많은 사람이 건너갔고 선진기술을 가지고 있어 전반적인 일본의 수준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했으리라 생각된다.” (김현구 교수)

백제문화의 정수를 보려면 한국의 부여나 공주가 아니라 일본을 봐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다. 백제인들은 나라의 멸망과 함께 사라지거나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왜에서 백제문화를 꽃피웠고, 강한 영향을 남기며,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KBS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