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문덕과 살수대첩

평안북도 남부를 남서로 경계를 이루며 황해로 흐르는 푸른 청천강. 이 곳은 약 천 4백 여 년 전 고구려와 수나라의 운명을 건 전쟁, 살수대첩이 일어난 역사적 현장이다.
고구려와 수나라와의 전쟁은 당시 동아시아에서 벌어진 가장 큰 규모의 국제대전이었다.
수나라가 중국 통일에 동원한 병력은 50만. 하지만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해서는 그 두배가 넘는 무려 백 이십만의 병력을 동원한다. 한마디로 이 전쟁을 위해서 수나라는 모든 역량을 총동원했던 것이다.

“598년에 고구려 선제 공격으로 전쟁이 시작이 됐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서 수나라를 세운 문제가 30만의 병력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했지만 역시 패배하고 돌아간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서 유명한 수양제가 벌인 첫 번째 전쟁이 바로 612년에 있었던 우리가 알고 있는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으로 유명한 전투이다." (고구려 연구회 윤명철 교수)

그렇다면 고구려와 수나라는 무슨 이유로 이렇게 대규모 전쟁을 벌였으며, 고구려는 어떻게 수나라를 이길 수 있었을까.
6세기 말에서 7세기 초 무렵, 동아시아 질서는 급변하고 있었다. 589년, 400 년 간 분열됐던 중국 대륙을 수나라가 통일했다. 고구려는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시대를 거치면서 동북아 일대에 독자적 세력권을 구축한 강력한 국가로 발전하였다. 또한 중국의 남북조와 일본열도와의 중개무역을 통해 막강한 경제력도 확보할 수 있었다. 신흥제국 수나라에게 고구려는 엄청난 위협으로 다가왔다.

“5세기 이후 고구려는 동방사회의 맹주로 자리하면서 독자적인 문명권을 형성 발전 시켜왔다. 동양 최고 수준의 고분 벽화, 높은 수준의 천문술과 건축술 등 중국에서도 부러워할 만한 문명을 이뤄왔다.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는 이러한 고구려마저도 무너뜨림으로써 중국의 천자의 지배 아래 동아시아 전체를 하나의 세계로 통일하고자 했다. 이를 거부한 고구려와의 충돌은 필연적이었고, 그것이 곧 전쟁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의 발견>의 저자 김용만씨)

고구려와 수나라는 말갈 등 주변국들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계속 작은 규모의 전투를 벌이며 신경전을 폈다.
수나라의 문제가 고구려에 대해 경고를 했으나 이를 고분고분히 들을 고구려가 아니었다.
결국 고구려는 강경책을 선택하여 598년 2월 요서지역을 선제 공격했다. 수문제가 30만 대군을 동원해 반격에 나섰지만 장마와 전염병을 만나 퇴각해야 했다.
이어 수나라의 두 번째 황제가 된 수문제의 아들, 수양제는 상당한 야심가였다. 고구려의 콧대를 꺾어 놓고 말겠다고 결심한 그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전쟁 준비에 착수한다. 수백만명을 동원해 대운하를 건설하고, 고구려의 높은 성벽을 오르기 위해 40미터 높이까지 펼칠 수 있는 사다리 ‘운제’ 등 신무기를 개발하고 5백 척 이상의 선박을 건조한다.

612년, 드디어 수양제가 113만 3천 800명이라는 천문학적인 숫자의 수군과 육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향해 진군한다. 수나라 군사들이 모두 출발하는 데만 40일이 걸렸고 그 행군 길이가 서울과 부산 거리인 430여킬로미터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전쟁은 3개 군에서 공방전이 벌어졌는데 제 1군이 수양제가 이끄는 군대로 요동성에서 전투를 벌였다. 그 다음에 제 2군이 우중문과 우문술이 이끄는 별동대인데 삼십만의 병력이 바로 요동지방 북으로 해서 압록강을 가로질러 내려왔다. 그 다음에 세 번째 전투는 바로 수군 작전인데 내오하라는 사람이 이끄는 수군 병력이 황해바다를 직항해서 대동강 상륙 작전을 성공시킨다.” (고구려 연구회 윤명철 교수)

처음에 수양제는 이 정도면 금방 고구려를 정복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고구려 요동성은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온갖 무기를 동원하여 여러 달 공격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급해진 수양제는 곧바로 우중문과 우문술을 사령관으로 삼아 30만 별동대를 조직해, 고구려 수도인 평양성을 공략한다. 평양성을 향해 진격하던 별동대가 압록강에 이르렀을 때다.

평양성을 수비하던 을지문덕 장군은 묘안을 짜냈다.
수나라 군사들의 가장 큰 골칫거리는 어떻게 이 곳까지 식량을 옮기고 추위를 이기느냐 하는 것이다. 을지문덕 장군은 이러한 약점을 이용해 성밖에 있는 모든 식량을 성안으로 옮기고 우물을 돌로 막아 버리게 했다.

몇날 며칠 성을 에워싸고 있던 수나라 병사들은 물과 음식이 떨어지자 점점 지쳐갔다.
을지문덕 장군은 이때를 기다렸다 수나라 군대와 전쟁을 벌이고, 일부러 져주면서 내륙으로 깊숙이 유인한다.

중국 <수서>에 따르면 “수나라 군대가 하루 일곱 번 싸워 모두 이기자 승리감에 도취되어 계속 진격하였다”고 할 정도로 고구려 내부 깊숙이 유인했다고 한다.
고구려 군사들의 유인 적전은 성공을 거두었고, 을지문덕 장군은 수나라의 장수 우중문을 놀리는 시 한 편을 지어 보낸다.

꼬임에 빠진 줄도 모르고 우쭐하던 우중문에 대한 조롱, 지금 물러나지 않으면 곧바로 반격하겠다는 단호한 의지가 묻어난다.
뒤늦게 속은 것을 알게 된 수나라의 병사들은 살수를 건너 퇴각하려 한다. 미리 살수 상류에 둑을 쌓아 물을 막아 놓고 수나라군이 건너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고구려 군사들은 둑을 무너뜨린다.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수나라 군사들은 맥없이 강물에 휩쓸려 갔고, 을지문덕 장군이 이끄는 고구려군에 의해 전멸 당한다. 중국은 당시 수나라의 참패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요동을 건너간 군사는 모두 30만 오천명, 그러나 돌아온 군사는 오직 2천 7백명 뿐이었다.“

“이 작전이 가지는 여러 가지 의미 중 가장 큰 것은 바로 을지문덕 장군이 당시 정황을 정확히 읽고 수나라의 군대를 분산시켰다는 것이다. 매복작전을 써서 고구려 내부 깊숙이 끌어들여서 수나라의 군대를 피폐하게 만들고 전의를 상실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다시 그 약점을 활용해서 후퇴하는 적을 살수라는 독특한 지형을 전략적으로 활용하면서 공격해서 승리를 거둬냈던 곳이다.” (고구려 연구회 윤명철 교수)

그렇다면 살수대첩을 승리로 이끈 을지문덕은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의 출신이나 가계에 대해 전해지는 바는 없다.
다만 <삼국 사기>는 “양제가 요동싸움에 많이 출병한 것은 지나간 옛날에는 없었던 일이다. 다만 자기 나라를 보전하였을 뿐만 아니라 적의 군사를 격멸시켜 거의 다 없앤 것은 문덕 한 사람의 힘이었다”고 적고 있다. 또 김유신 다음으로 을지문덕을 열전 편에 소개할 만큼 을지문덕은 삼국사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었다

이렇게 총 3개 방면에서 고구려와 수나라가 벌인 전쟁에서 고구려가 모두 승리한다.
고구려 인구보다 두 배는 많은 수나라 군대를 과연 고구려는 어떻게 이길 수 있었을까.

“고구려는 이미 수나라가 통일될 무렵부터 전쟁 준비를 추진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고구려는 군사전략이 상당히 뛰어났고 무기의 종류도 상당히 다양했다. 제갈량도 고구려의 군사적 능력에 대해서 얘기를 했고 당나라도 위증이나 이전과 같은 사람이 고구려의 군사적 능력이 특별하다는 것을 언급을 하고 있다. 고구려는 당시 동아시아에서 가장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 것을 볼 때 고구려는 이미 수나라와 일전을 불사하면서 외교적으로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고구려 연구회 윤명철 교수)

고구려는 명실상부한 동아시아 대국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철저하게 대비를 해 두었고, 그 결과 수나라와의 전쟁에 자신만만하게 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음 해인 613년과 614년에도 수나라는 고구려를 쳐들어오지만 무참히 패한다. 고구려와의 계속된 전쟁으로 국력이 쇠한 수나라 내부에서는 반란이 일어나고 618년,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한지 30 여 년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만다.

중국의 통일왕조인 수나라가 도전할 수밖에 없었고 또 그 도전을 물리쳐 낸 고구려는 단순히 영토만 넓은 나라가 아니었다.
고구려와 수나라의 다섯 번에 걸친 전쟁은 천 3백여년전 고구려가 독자적인 천하관과 문명을 지니고, 동아시아의 패권을 주도한 강국이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고 있다.

(KBS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