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중흥기

고구려, 신라, 백제, 삼국 중 그다지 큰 인상을 주지 못하는 나라가 백제다. 고구려는 만주벌판을 지배한 대륙의 주인공으로, 신라는 삼국전쟁의 승자로 남았지만, 백제는 고구려에 밀리며 수도까지 한강이남으로 옮겨야 했고, 나중에는 신라에까지 열세를 보이다 멸망했다. 그렇다고 신라처럼 많은 문화유산을 남기지도 못했다.
그렇다면, 한국 고대사에서 백제가 차지하는 의미는 무엇일까?
바로 한반도에 머무르지 않고 중국과 일본까지 진출했던 고대사 최대의 문화 수출국이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시기는 백제의 중흥기와 맞물려 있다.
백제연구가인 의 말이다.

“우리가 흔히 백제라고 하면 충청남도의 공주와 부여의 백제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백제는 60년, 120년, 도합 180년동안 존속했던 시깁니다. 나머지 5백년 이상은 바로 저희가 살고 있는 서울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한신대 문동석 연구교수)

그렇다. 5백년 이상 지금의 서울시 송파구, 강동구 일대에 도읍지를 두었던 백제. 그 시기에 백제의 첫 번째 중흥기가 있었다.
그리고, 그 시절을 엿볼 수 있는 유적지를 지금도 볼 수가 있는데,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석촌동 고분군 등이 그것들이다.
특히 1997년 아파트 기초 터파기 공사 중 우연히 발굴된 풍납토성은 전체 길이가 4킬로미터, 높이 9미터, 성벽 아래쪽의 너비가 40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성벽인데, 모두 흙으로 쌓아올린 것이다.

“판축이라는 수법으로, 성을 쌓아올리는데 거기에는 조그마한 녹두알만한 자갈도 돌도 없다는 것은 뭔가 우리가 말하는 떡고물 같은, 체 같은 걸로, 치지 않았는가.. 그런 고운 흙으로 그 엄청난 토성을 쌓았다는 것은, 이건 전제 왕권아니고는 그런 동원하기 어렵다..” (사학자 이형구씨)

이러한 기술은, 지금도 일본의 규수와 오사카 지방 해안 곳곳에 남아있는 한국식 산성에서 볼 수 있는데 660년 백제가 멸망한 후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인들의 기술로 만들어진 것이다. 강력한 전제정권 아래 쌓아올린 거대한 풍납 토성에서는 방대한 양의백제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그때까지 실물이 적어 연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백제 기와사를 새로 쓰게 할 만큼 거의 모든 종류의 기와류가 출토되고, 다양한 토기류가 발견되었다. 풍납토성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당시 백제가 강력한 왕권국가의 형태를 가진 안정되고 풍요로운 사회였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또한 일본 중국 등 외국과의 교류가 왕성하게 이루어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중국의 도자기류가 대량 출토되었습니다. 3세기 중후반 양자강 이남지역에서 제작, 사용되었던 도기 수십 개 분이 출토되었습니다. 이것은 당시 백제가 중국과 원거리 교섭을 전개하였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 만들어진 토기도 출토되었고, 5세기대에 제작된 서부 경남지역의 소가야 토기가 출토되었습니다. 5세기대 풍납토성은 중국 남조와 왜, 가야에서 파견된 사절단과 사람의 이동에 수반되어 온 외래물품이 넘쳐나던 동아시아 국제교섭의 중심무대였을 것입니다. “(문동석 교수)

동아시아 국제교섭의 중심무대, 백제. 이 중흥기를 누릴 수 있었던 데는 근초고왕의 역할이 컸다.

“근초고왕은 30년정도 왕위에 계셨는데 내외의 중흥기를 맞이했는데 이때가 4세기, 이때의 백제의 국경을 보면 남쪽으로는 전라남도 남해안 해안일대까지, 북쪽으로는 고구려 평양성까지 경계를 두었고, (편집) 경기 충청 전라 강원 황해 그 일부까지 장악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성신여대 사학과 이현희 명예교수)

근초고왕은 사방으로 정복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여 남으로는 전라도 지역 모두를 지배영역으로 확보하였다. 그리고 낙동강 서쪽에 위치한 가야 세력에도 손을 뻗쳐 영향권 내에 넣었다.

이렇게 남쪽으로 영토를 넓히는데 성공한 근초고왕은 고구려로 방향을 돌린다. 371년 근초고왕은 대동강 유역의 평양성을 공격한다. 이 전쟁에서 근초고왕은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활로 쏘아 죽이는 전과를 올리며 북쪽으로의 영향력도 넓히게 된다. 이리하여 백제는 사상최대의 영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근초고왕은 바깥으로 영역을 크게 넓힌 성과를 바탕으로 내부적으로는 왕권강화에 힘을 기울인다. 먼저, 왕위를 형제상속에서 부자상속으로 바꾸고, 왕비족도 진씨 가문의 사람으로 고정시켜서 왕실을 지지하는 배경 세력으로 삼아 강력한 왕 중심의 국가형태를 완전히 갖춘다. 그리고 삼국중 유일하게 역사책을 편찬한다.

“고흥이라는 역사가로 하여금 서기라는 역사책을 기록하게 했는데, 이것은, 당시의 국력이 강대했기 때문에 국력의 강대한 모습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서 역사를 편찬한 것이다.” (이현희 교수)

그러나 근초고왕 사후 백제 중흥의 기운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고구려의 광개토왕이 계속 공격하고 장수왕이 남하정책을 지속하면서 백제는 후대에 들어 큰 위기를 맞게 된다.

“백제는 근초고왕 이후 점점 쇠락해져 한성 서울 일대 하남시까지의 영역을 유지하지 못하고 함락 당합니다. 할 수 없이 한강유역을 잃어버리고 오늘날 공주, 웅진으로 이동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강을 차지하는 민족이 또는 국가가 가장 강성해질 수 있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었습니다.” (이현희 교수)

백제는 한강유역을 빼앗기면서 왕권도 쇠약해졌다. 심지어 왕이 귀족들에게 살해되는 사건이 연이어 두 번이나 터진다.
이런 취약한 왕권을 바로 잡은 왕이 제 25대 무녕왕이다. 그는 왕권강화와 민생안정을 위해 무녕왕은 여러 가지 시책을 시행한다.

“무녕왕때 지방에 스물두개의 담로를 설치했다. 즉, 주요지점에 스물두개의 부락을 만들어 행정력을 강화하는 것, 거기에 왕자나 왕족, 혹은 지방귀족을 보내 국가통일의 기반을 만드는 그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백제가 봉건정치를 본격화했을 뿐 아니라 지방세력까지도 전부 아우를 수 있는 통치체제의 강화 내지는 일원화를 기했다고 볼 수 있고…” (이현희 교수)

무녕왕은 한성백제 시절의 영화를 다시 꿈꾸고 있었다. 고구려에 빼앗긴 땅을 되찾는 시도를 거듭하여 실제로 무녕왕은 501년, 502년, 직접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의 남쪽을 공격해서 빼앗긴 땅을 조금씩 되찾았다. 또한 무녕왕은 당시 국제관계를 읽는 것에 탁월한 왕이었다. 그는 고구려•말갈의 침입에 착실히 대처하는 한편,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중국의 남조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국력을 키웠으며,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일본에 선진문물을 건네고 군사력을 반대급부로 받았다. 이것은 무녕왕릉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기도 하다.

“무녕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의 90% 는 중국제품과 일본 제품이다. 백제인들이 만든 것은 극히 일부이다. 무녕왕릉의 무덤 구조 자체도 중국식 무덤이다. 이는 백제 문화가 상당히 국제성을 가지고 있었고, 또 이 국제성을 통해서 여러나라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문동석 교수)
<<삼국사기>>에 의하면 무녕왕은 ‘신장이 8척이오, 눈매가 그림과 같았으며 인자하고 너그러워서 민심이 그를 따랐다.’라는 기록이 있다. 실제로 그는 민생의 안정에도 노력하여 506년 기근으로 백성들이 굶주리게 되자 창고를 풀어 이를 구제하였고, 510년 영을 내려 제방을 수축하는 한편 국내의 유랑인들을 구제하여 고향에 돌아가 농사를 짓게 하였다. 그리하여 민심이 크게 그를 따랐다. 그 덕분으로, 백제는 아들인 성왕 대에 이르러 부흥의 날개를 단다.
그리고, 무녕왕 사후 천4백여년이 지난 1971년, 무녕왕의 무덤이 세상에 드러나게 된다. 그것은 한국 고고학 사상 최대의 발굴이었는데, 바로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첫 번째, 한국 고대사의 수많은 고분들 가운데 묻힌 자가 누구인지 명백하게 밝혀진 유일한 고분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백제의 기록이 비단에 써진 것과 달리 무녕왕릉의 기록은 돌에 새겨져 있는 덕분이었다.
두 번째, 마찬가지 이유로 무녕왕의 재위기간이 5백년부터 523년이라는 정확한 연대가 밝혀졌다는 것이고,
세 번째, 전혀 도굴되지 않은 원래 상태로 발견됐다는 사실이다.
네 번째, 웅진의 역사와 백제문화의 국제성을 보여줌으로써 웅진기 백제는 물론이고 전체 백제사 문화연구의 결정적인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다섯 번째는 고대 한일관계사의 열쇠를 쥐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일관계사의 열쇠란 과연 무엇일까?
그 열쇠를 손에 쥐기 위해서는 먼저, 그 시대에 백제가 동아시아 문물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부터 듣지 않을 수 없다.

고대 최고의 문화 수출국, 백제

한일 월드컵을 앞둔 2001년 12월, 일본천황이 기자회견을 통해 충격적인 고백을 한다.

"나 자신으로서는 칸무 천황의 어머니가 백제 무녕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에 기록돼 있는 사실에 한국과 인연을 느낍니다."

일본 황실에 백제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 천황의 고백은 일본 뿐 아니라 한국에도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도쿄 외곽에는 칸무 천황의 어머니이자 무녕왕의 자손인 고야신립의 묘지가 실제로 있다. 또한 교토의 중심가에는 고야신립의 신위를 모신 히라노 신사가 있다. 교토에서 가장 오래된 이 신사에는 백제의 성왕과 그의 선대왕들의 신위도 봉안돼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일본서기에는 무녕왕의 출생설화가 등장한다. 설화의 진위 여부를 떠나 백제와 일본의 관계가 얼마나 밀접했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무녕왕 당시 백제와 일본의 가까운 관계는 그의 무덤에서도 보여진다. 무녕왕과 왕비의 목관에 쓰인 나무는 세계적으로 단 한 종류밖에 없다는 금송으로, 주로 일본열도 남부에서 자란다. 그런데, 금송은 아주 먼 옛날부터 일본에서도 지배계층만 사용했던 귀한 관재였다. 이외에도 무녕왕의 무덤에서는 양나라의 주조 동전, 양나라 양식의 도자기 등이 많이 출토되었다. 게다가 무녕왕릉의 형태와 구조, 벽돌의 무늬, 재료까지 양나라 것과 흡사하다.

“중국 양서 백제전에 당시 백제가 기술자와 화공들을 중국에서 백제로 들여왔다는 기록 있다. 이 무덤은 양나라 무덤과 완전히 같다. 양조의 기술자 참여해서 만든 것으로 보여진다.” (북경대 고고학과 제동방 교수)

중국 남조와 백제의 긴밀한 교류는 무녕왕 대에 정점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무녕왕릉에는 백제 최고의 금속 귀공예품은 물론 중국과 일본 당대 문화의 정수가 들어있었던 것이다.
무녕왕 초기에 백제는 고구려의 남진정책에 밀려 외교적으로 완전히 고립된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과의 교류는 선진문물의 수용이라는 측면도 있지만, 무엇보다 고구려의 세력확장을 견제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백제는 왜와의 외교적 접촉도 활발히 추진했는데, 전통적인 우방국가였던 왜로부터는 선진문물을 건네주고, 군사적인 측면에서의 지원을 받았다. 그렇다면, 일본이 고대국가로 발전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던 백제의 선진문화는 무엇이었을까?

일본의 국보 1호는 호류사에 있는 목조 미륵보살 반가사유상. 나뭇결을 살린 부드러운 웃음과 긴 손가락으로 턱을 가볍게 받치고 생각하는 자세의 이 보살상은 아름다운 보물이다. 이것은 백제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여 일본 고대문화를 발전시킨 아스카 시대의 것으로 백제 불상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다. 아스카는 쇼토쿠 태자가 다스리던 때의 수도였던 곳이다. 쇼토쿠 태자는 7세기 초 스이코 천황의 섭정을 맡았던 사람으로 오늘날 일본인들이 고대사 최고의 위인으로 평가하는 인물.

“우리나라 승려, 학자들이 쇼토쿠 태자의 스승이 되고 초상화도 그려 주고 한자교육을 시켰다. 쇼토쿠 태자는 백제인들의 학문을 자기네 학문으로 받아들여 일본문화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 (이현희 성신여대 사학과 명예교수)

쇼토쿠 태자를 얘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불교다. 불교는 6세기 중반 노리사치계에 의해 이미 일본에 전파되었는데 쇼토쿠 태자는 불교 수용에 아주 적극적이었다. 불교가 성씨를 기반으로 하는 호족연합을 중앙집권적 율령국가로 개혁하는 이념적 장치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쇼토쿠 태자는 불교 수용을 위해 아스카 문화의 상징이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는 호류사를 창건하기도 했는데...

“나라현에 있는 호류사의 5층 목탑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유명한데, 부여의 정림사 5층 석탑과 그 분위기가 비슷해 많은 학자들이 백제 장인의 손으로 세워진 백제양식의 탑으로 보고 있다. 또 이 절에 있는 백제관음이라는 관음보살상도 백제에서 만든 불상이라고 한다.” (문동석 한신대 연구교수)

백제가 일본에 선진문물을 전파한 것은 훨씬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표적인 인물로 3세기 말에 일본으로 건너갔던 아직기와 왕인을 꼽을 수 있다.

“아직기는 근초고왕때 왕명으로 두필의 말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가 천황에게 승마술을 가르쳤다. 천황은 경서에 조예가 깊은 그를 태자의 스승으로 삼았다. 한편, 그는 천황의 요청에 의해 백제의 뛰어난 학자인 왕인을 추천했다. 일본은 왕인에게 백제의 문화와 학술을 전수 받아 일본고대문화가 이루어지는 터전을 마련했다.” (문동석 교수)

고구려와 신라에 밀려 한강 유역을 잃고 수도까지 사비(지금의 부여)로 옮긴 후, 백제는 일본에 더욱 적극적으로 진출했다. 지식과 기술의 여러 분야에 걸쳐 문화를 전수했고, 많은 백제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기도 했다.

“무녕왕, 성왕때는 일본에 유학을 전했다. 무왕때는 천문, 지리, 방술 등을 전해줬다. 우리의 신석기문명, 금속문명, 고분문화가 일본에 모두 전해져 나가는데 지금도 일본인들 가운데 한국사 연구하는 분들이 내놓은 논문을 보면, 일본고대문화는 7세기까지는 한국의 도래인이 주도했다. 이렇게 볼 수 있다.” (이현희 교수)

일본 최남단 큐슈의 미야자키현 동부해안의 휴가시에서 서쪽으로 40킬로미터 달리면, 난고손(南鄕村)이라는 아담한 산 속 마을이 눈에 들어온다. 이 마을은 구다라노사토라고도 불리는데 우리말로 백제마을이라는 뜻. 마을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이곳에는 백제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난고손에는 백제왕족이 건너와 살았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660년에는 신라와 당의 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백제의 왕족들이 일본으로 망명하여 이 땅에 흘러 들어와 살게 되었는데... 난고손에는 해마다 시와스 축제를 여는데 이 축제는 당시 따로따로 정착한 백제왕족 부자인 정가왕과 장남 복지왕이 1년에 한번씩 재회하는 모습을 재현한 것으로 1992년에는 무형 민속 문화재로 제정된 바 있다. 내년에는 1월 29일부터 31일까지 3일간 개최된다. “ (미야자키 현 난고손 기획 관광과장 쿠니노베씨)

원래 이 마을의 이름은 미카도였다. 마을의 이름이 구다라노사토, 즉, 백제마을로 바뀐 것도 정가왕을 계기로 많은 백제인들이 살았다는 흔적이다. 특히 미야자키현청의 노력으로 1996년 건립된 ‘西 정창원’이라는 목조 건물이 있는데 이 곳에는 정가왕의 신사에서 발굴된 수백 점의 유물들이 보관돼 있다. 그 중에 구리거울과 검, 곡옥(曲玉)은 일본의 사학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이 세 가지는 일본에서 왕권을 상징하는 ‘神器 3종’이라 불리는 것들인데, 그 모양이 백제에서 출토된 것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일본에 대한 백제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 새삼 확인되는 대목이다.

삼국 가운데 가장 알려진 것이 없는 백제.
그러나 백제는 비록 전쟁에서 패하고 나라를 잃었지만, 그 문화는 천여 년이 흐른 오늘날까지 일본에서 찬란하게 빛나고 있는 한국 고대사 최대의 문화수출국이었다.

(KBS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