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통사' 펴내 신라의 의미 다각도로 조명

"신라의 성격에 자주 논의되는 것은 신라가 후진적이며 사대적인 소극성을 강조하고 있고,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신라의 소극적 타협주의 체질을 강조하고 있었으며, 보수적 안일주의를 신라사회의 성격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 시대는 중국 중심의 세계관, 즉, 중국적 세계질서 속에서 유지되었고, 조공이라는 공적 채널로서 문화가 교류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중국과 우리나라를 태양과 뭇별과의 관계로 설명하였으며, 근자에 이르기까지도 동심원적 천하질서로 간주하는 견해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신라는 그러한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 속에서도 자국의 독립과 긍지를 결코 잃지 않았다." (32쪽)

지난 1981년 이후 23년 동안 봉직한 이화여대 사학과를 정년퇴임한 한국고대사학자 신형식(申瀅植.65) 상명대 초빙교수는 이화여대 재직 시절인 1985년, 이 대학 출판부에서 낸 단행본 `신라사'에서 이렇게 적었다.

서울대 역사교육과 출신인 그는 와병 중인 해방 이후 한국역사학의 대표적인 1세대인 변태섭(邊太燮.79) 사단이 배출한 2세대의 대표주자였다.

한 때 서울의 저명한 입시학원 강사를 지내기도 한(그 자신 이 시절을 회고하며 `명강사'였음을 자랑하곤 한다) 신 교수는 서울대 출신에다 서울의 이름있는 대학 교수로 장기간 봉직했다는 경력만을 본다면 전형적인 `주류'에 속하는 이른바 보수적 강단사학자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덧 한국역사학 원로의 대열에 합류한 그의 학문적 역정을 돌이켜 볼 때 실상은 누구보다 투쟁적인 면모가 짙다.

그 스스로 학계 주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신 교수는 무엇보다 다른 주류가 구축한 신라사에 대해 끊임없는 `전쟁'을 도발했다.

신 교수는 무엇보다 신라가 백제, 고구려에 비해 발전이 더뎠으며, 그랬기에 이웃 왕조에 비해 그 문명의 수준이 훨씬 미개하고 원시적이었다는 통설적 주장에 대해 연이은 반기를 들었다.

나아가 신라에 의한 소위 삼국통일(일통삼한<一統三韓>)에 대해서도 그 역사적 의미를 고구려의 주무대였던 만주로 대표되는 고토(故土)의 상실이라는 부정적 평가 일색이었던 민족주의 역사학에 대해 극력 반발했다.

이 과정에서 그 자신 누구보다 민족주의적 색채를 농후하게 띠기도 했으며, 그래서 그의 역사학은 국가주의적 색채가 짙었다.

그러나 신라는 학계의 주류적 통설과는 달리 원시적이고 미개하며, 후진적인 사회도 아니었을 뿐더러,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 또한 민족사적 관점에서 실로 다대한 의미를 지니는 일대 사건이라는 방향으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서술했다.

지난 6월에 타개한 이기백 전 서강대 교수의 주류적 한국고대사학에 대해서도 적어도 논쟁다운 논쟁을 도발한 거의 유일한 역사학자도 신 교수였다.

신라 중대 왕권의 성격을 둘러싸고 80년대에 벌어진 이 논쟁에 대해 신 교수는 "아마도 내가 이긴 것 같소"라고 웃으며 회상하곤 한다.

1985년 `신라사', 1990년 `통일신라사연구'에 이어 신라사에 집중한 최근 그의 세 번째 단행본 `신라통사'(주류성)는 총 750쪽이라는 거질로, 여기에서 신 교수는 21세기의 우리에게 갖는 신라의 의미를 다각도로 조명하고자 했다.

여기에서 주창된 주요한 골격을 보면, 신라는 원시미개한 후진사회가 아니었고, 그에 의한 삼국통일은 현재의 한민족 원형을 이루는 토대로써 적극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3만9천원.

(연합뉴스 / 김태식 기자 2004-1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