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直指’ 와 활자매체 성쇠

중국이 왜곡하고 있는 것은 고구려 역사뿐만 아니다.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로 자랑하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을 702년 낙양(洛陽)에서 인쇄된 것이라고 우긴다.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된 것이지만 당나라에서 인쇄한 것을 들여왔다고 억지를 부린다. 현존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도 1377년 고려 때 청주 흥덕사에서 만든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보다 40년 앞서 중국에서 제작된 ‘어시책’(御試策)이라고 주장한다.

‘다라니경’은 벌써 학계에서 공인되어 기네스북에 올라 있고 ‘직지’ 또한 독일의 구텐베르크 금속활자본보다 반세기도 훨씬 더 앞선 것이라고 유네스코가 인정했음에도 중국은 원조(元祖)를 양보하기 싫다는 모양새다. ‘직지’는 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聖書)’보다 78년, 중국의 ‘춘추번로’(春秋繁露)보다는 145년이나 빠르다. 하기야 중국은 자긍해 마지 않는 4대 발명품에 행여 체면이 구기지 않을까 노심초사할 만도 하다.

- ‘어시책이원조’中의 생떼 -

‘직지’를 인쇄한 금속활자는 요즘 표현으로 패러다임의 혁명적 변화를 가져온, 그래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인류문명사의 위대한 발명품의 하나다. 하지만 우리의 금속활자는 구텐베르크가 세계문화에 태풍을 일으킨 것과는 달리 소수계층에게만 혜택이 국한되는 바람에 역사의 물줄기를 돌리는 발빠른 대중화에 실패하는 천추의 한을 남겼다.

그나마 ‘직지’의 원본도 우리 손으로 보존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두 권으로 이루어진 이 책의 하권이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돼 있다가 1972년 세계 도서의 해 기념전에서 처음 빛을 보게 됐다. 구한말 초대 주한 프랑스 대리공사 콜랭 드 플랑시가 수집해 간 뒤 앙리 베베르라는 또다른 애호가를 거쳐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된 것이다. 그 바람에 ‘직지’가 세계에 널리 알려지고 공인받은 것도 사실이지만 소중한 외규장각 도서와 함께 프랑스에 머물고 있는 애절함은 안타깝다는 말만으론 부족하다.

원래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이란 긴 이름을 가진 ‘직지’는 고려 때 백운 스님이 역대 조사들의 게송·법어 등에서 요긴한 선법화를 뽑아 엮은 책이다.

그런 ‘직지’가 지방자치단체인 청주시와 인쇄업계 독지가들의 노력으로 일반인들에게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시나브로 홍보되기 시작한 것은 그나마 위안거리다. 각고의 노력 끝에 2001년 9월4일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기에 이르렀고, 올 4월에는 유네스코 직지상이 제정돼 위상이 한결 높아졌다. 사흘 후면 유네스코 등재일을 기념해 직지의 날 선포식을 갖는다는 반가운 소식도 들린다. 내일부터는 직지축제도 청주시에서 펼쳐진다. 중앙정부와 각계의 도움으로 세계적인 행사로 뻗어나간다면 결코 고을잔치에 머물지 않을 게다.

애처로운 것은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발명국임에도 독서량은 후진국 수준이고, 신문 구독률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하위권이라는 슬픈 현주소다. 영상매체와 대안미디어의 홍수로 활자매체의 영향력이 급격히 영락하는 것은 세계적인 추세다. 그렇지만 활자매체의 쇠퇴는 우리 사회에 부메랑처럼 돌아올 게 틀림없다. ‘타인과의 격조 높은 대화수단’으로 일컬어지는 활자매체 푸대접은 이성적 사고보다 감성의존형 인간을 양산하고 말 것이다.

- 감성형 인간 양산 부메랑 -

그러잖아도 참여정부 들어서는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날 몇몇 족벌신문에게서 입은 피해의식으로 덧칠해진 탓인지 활자매체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줄어들 줄 모른다. 영상·대안 매체에만 쏟아지는 애정이 가뜩이나 읽기 싫어하는 우리 국민에겐 설상가상으로 다가온다. 차츰 제자리를 찾아가는 ‘직지’의 각별한 의미가 썩 흔쾌하게만 다가오지 않는 까닭이다.

〈김학순 본사 신문발전연구소장〉

(경향신문 2004-1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