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한류의 원조` 고구려

고구려사람들은 독특한 모자를 쓰고 다녔다. 삼각형으로 된 마름모꼴 모자다. 이 모자가`절풍모(折風帽)'다. `절풍모'는 고구려 고분 벽화에도 나온다. 모자 양쪽에 새 깃털을 꽂은 벽화의 그림이 바로 절풍모를 그린 것이다.

고구려 모자인 절풍모는 당나라에서도 엄청나게 유행했다. 천재시인인 이백(李白)까지 절풍모에 관한 글을 남겼을 정도다. "깃털 모양의 금으로 장식된 절풍모를 쓰고 팔을 저으며 훨훨 춤을 춘다. 새처럼 나래를 펼치고 해동에서 날아왔다."

고구려는 광개토대왕 때부터 장수왕에 이르기까지 60여 년 동안 신라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신라를 속국으로 거느린 것이다. 신라는 광개토대왕이 사망하자 사당을 지어놓고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날 신라가 반기를 들었다. 신라에 주둔하고 있던 고구려 군사가 신라사람에게 충격적인 말을 했던 것이다. 고구려가 곧 신라를 멸망시킬 것이라는 얘기였다. 이 소식을 들은 신라사람들이 들고일어났다. "수탉을 죽이자"며 고구려 주둔군을 모두 살해했다고 한다.

이 때부터 고구려는 신라와 관계가 악화되었다. 장수왕은 `수탉'을 잃은 보복으로 군사를 보내 신라의 실직주성을 점령해버렸다. 신라의 수도인 금성 바로 북쪽 미질부를 공격하기도 했다.

왜 신라사람들은 `수탉'을 죽이자고 했을까. 깃털을 꽂은 고구려의 절풍모가 마치 수탉의 `벼슬'처럼 생겼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수탉은 고구려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고구려사람들은 무용총 벽화에 있는 사신도의 한 자리인 주작 자리에 닭을 그려 넣기도 했다. 그만큼 닭을 좋아했다.

중국사람들의 기록에 5세기 무렵 고구려의 영토는 동서 2,000리, 남북 1,000리였다. 이후 동서 3,100리, 남북 2,000리로 늘어났다. 수나라 때에 이르러서는 동서 6,000리나 된다고 했다. 중국도 고구려의 영토가 계속 확대되고 있었음을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장수왕 때에는 `영평(營平) 2주(州)'를 지배했다. 영주는 오늘날의 대릉하 유역 조양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이었다. 평주는 만리장성을 넘어 난하 하류, 북경에 이르는 지역이었다. 이 넓은 곳이 모두 고구려의 영토였다. 고구려사람들은 이 광대한 영토에서 절풍모를 쓰고 다니며 국력을 과시했던 것이다.

그뿐 아니다. 절풍모는 7세기에 만들어졌다는 중국의 서역 관문인 `돈황 석굴벽화'에도 나온다고 한다. 벽화에 새 깃털이 달린 모자를 쓴 고구려사람을 그린 그림이 있다는 것이다. 고구려의 영향력이 중국을 가로질러 그곳까지 뻗쳤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시끄러웠던 올해도 그럭저럭 끝나가고 있다. 양력으로 따지면 앞으로 남은 날은 열흘 남짓이다. 이제 `닭의 해'가 오고 있는 것이다.

닭은 우리에게 고구려였고 절풍모였다. 절풍모는 오늘날의 `한류'였다. 대표적인 `한류'였다. `욘사마'였다.

당시의 `한류'는 대단했었다. 유행한 것은 절풍모뿐 아니었다. 고구려의 모든 문화가 유행했던 것이다. 당나라 궁전에서는 고구려의 음악이 당당하게 연주되었다. 그래서 고구려가 망한 이후의 사람인 이백도 `한류'인 절풍모에 관한 글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이런 `한류'가 서역에까지 뻗쳤던 것이다.

내년은 올해보다도 못한 해가 될 것이라고 벌써부터 걱정들이다. 우울한 전망들만 나오고 있다. 불황에 허덕이면서도 올해 그나마 위안거리가 된 것은 `한류'와 `욘사마' 정도였다. `한류'가 수출이 늘어나는 데에도 기여했다는 분석이 있을 정도다.

`한류'는 오래도록 계속되어야 한다. `한류'가 계속되는 한 언젠가는 절풍모를 쓰고 대륙을 누비던 고구려의 기상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집안싸움으로 세월을 보내면 불가능하다. 벌써부터 `한류'를 못마땅해하는 소리가 나오고 있지 않은가.

<김영인 월드캐피탈 코리아 감사.객원논설위원>

(디지털타임스 2004-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