間島 `우리땅' 놓고 국내학자 간 논쟁

간도(間島)를 놓고 국내학자 간 `우리땅' 논쟁이 벌어졌다.

이 논쟁의 불을 붙인 건 한국땅이름학회 회장인 이형석(67) 박사.

그는 5일 "간도(間島)는 우리 땅이 아니다"며 조선왕조실록과 대동여지도 등 우리 측 문헌과 자료 그리고 중국의 연변대학 조선족 교수들과 함께 현지답사를 통해 확인했다고 나름대로 근거를 제시했다.

이 회장은 "조선왕조실록이나 지리, 역사문헌에 (우리땅이 아니라는) 기록이 있다"며 "고산자 김정호가 1860년대에 제작한 `대동여지도'와 `청구도', 선조 때 제작했다고 추정되는 `서북피아양계만리지도' 등에도 간도가 빠진 채 확실하게 그려져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연세대 김우준(47) 동서문제연구원 교수는 "조선왕조 고종실록(광무 7년 8월 11일)에 조선 조정이 이범윤을 간도관리사로 승격 임명한다는 기록이 있고, 이범윤을 간도에서 주민보호와 세금징수의 임무를 맡게 했다"며 "광무 9년 3월 17일에는 오재영 외 7명을 북간도 공립소학교 교원으로 임용하는 행정조치를 취했다"고 즉각 '우리땅'임을 반박했다.

이 회장의 대동여지도 등 일부 우리 측 자료에 `간도가 빠졌다'는 논리에 대해서도 김 교수는 "중국 유민들이 간도지역으로 몰래 유입되는 일이 발생하므로, 조선 조정은 관병을 동원해 이 지역을 치안상 통제했기 때문에 측량작업은 사실상 어려웠다"며 "그 뒤 본격적인 개간시기에는 통제가 풀렸다. 이에 대한 근거 자료는 1998년 출간된 중국 베이징(北京)대 장페이페이(蔣非非) 교수 등의 중ㆍ한관계사에 나와 있다"고 말했다.

이 회장이 "토문(土門)강은 쑹화(松花)강이나 두만강의 지류가 아니고 임의로 호칭하는 강이름이며 백두산정계비에서 두만강의 상류 석을수(石乙水)까지 석퇴(돌과 흙으로 쌓은 무더기)나 목책(나무 울타리)으로 경계를 이어 놓은 사실이 조선왕조실록이나 지리, 역사문헌에 기록되어있다"고 주장하자 김 교수는 "백두산정계비는 원래 조선의 영토를 축소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담고 있다"며 근거가 될 수 없다고 일축했다.

김 교수는 이어 "서쪽경계를 남만주 요동지역의 봉황이 아니고 압록강으로 청나라가 일방적으로 정했지만 동쪽은 토문강(土門江)으로 정했고, 토문강은 쑹화강의 상류(中사료 全遼誌)"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1905년 대한제국 함경북도 지방도 등 많은 우리의 고지도들에는 분명히 백두산정계비에서 석퇴와 토퇴 등이 석을수가 아니고 쑹화강의 지류인 토문강까지 경계를 이어 놓은 사실들이 있다"며 그 근거로 중국측 사료인 청(淸) 광서(光緖) 31년(1905년) `대청제국전도'(大淸帝國全圖)를 제시했다.

이 회장은 "간도란 지명은 1712년 백두산정계비가 건립되면서 불리기 시작했고, 이후 100여 년 뒤인 1881년경 많은 조선족이 두만강을 넘어 이주하면서 더욱 많이 불렸다"며 "처음에는 회령에서 두만강을 건너면 볼 수 있는 모래섬이 `간도'였지만 이후 간도가 룽징(龍井), 옌지(延吉)에 이르는 지역으로 확대돼 이 지역을 본간도, 훈춘(琿春) 지역을 북간도, 백두산의 서남쪽, 해산지역의 건너편을 서간도라 불렀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이날 `간도에 대한 건의사항'이란 제목의 건의문을 작성, 노무현 대통령 앞으로 우편 발송했다. 이 회장은 이 건의문에서 간도가 우리땅이 아니고 중국 땅인만큼 진실을 명확히 하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했다.

이 회장은 1993년 백두산을 도보로 답사하며 `백두산 천지-압록강과 두만강'(가천문화재단 刊)을 출간해 `현대판 김정호'라는 별칭을 얻었으며, 1984년에는 우리나라 땅이름에 관한 역사, 문화, 사회, 지리, 풍속 등 다양한 연구를 하는 학술단체인 한국땅이름학회를 창립했다.

한국간도학회 이사인 김 교수는 최근 중국 남송(南宋)때 제작된 우공구주금주도(禹貢九州今州圖ㆍ1209년)와 지리도(地理圖ㆍ1247년) 등 고지도 5점을 중국 왕조가 고구려의 실체를 인정했음을 보여주는 사료를 최초 공개하는 등 간도가 우리땅임을 밝히는 연구.조사활동을 활발히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 왕길환 기자 2004-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