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표 전쟁

볼리비아와 파라과이 접경지대의 불모지 그란차코에서 1930년 석유가 발견됐다. 볼리비아는 지도를 담은 우표를 발행하고 그란차코를 ‘볼리비아의 차코’로 명기했다. 파라과이도 지도 우표를 찍어 이 지역이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파라과이 것’이라고 써넣었다. 그 바람에 터진 전쟁은 5년이나 계속됐다. 1938년 주변국 중재로 이 땅은 파라과이에 돌아갔다. 파라과이는 기념우표를 발행해 자축했다. 전쟁의 시작과 끝이 우표였다.

▶ 우표는 역사와 문화가 녹아 있는 시대의 지표이며 거울이다. 나라를 세계에 알리는 문화상품이자 선언적 홍보수단이기도 하다. 우표가 영토분쟁의 전초전 내지 대리전을 치르는 것도 그런 측면에서다. 아르헨티나는 포클랜드 영유권을 주장하는 우표를 50년에 걸쳐 끈질기게 발행하다 결국 전쟁에 이른다. 에스파뇰라섬을 둘러싼 도미니카와 아이티, 남극 영토를 다투는 아르헨티나와 칠레…. 총성 없는 우표전쟁은 드물지 않다.

▶ 우리 우정사(郵政史)에선 최초의 우표부터 찬바람 이는 국제 정치역학을 함축하고 있다. 1884년 조선 우정총국은 태극기를 큼직하게 그려넣은 우표를 일본에 주문했다. 일본 정부 인쇄국이 찍어낸 우표엔 태극기는 간 곳 없고 엉뚱한 원형 문양만 들어 있었다. 화폐단위 ‘문(文)’에서 이름을 딴 이 ‘문위(文位) 우표’는 조선의 자주의식이 일본 제국주의에 밀리던 시대의 상처를 안고 있다.

▶ 1954년 이승만 정부는 독도 전경을 담은 우표 세 가지를 발행했다. 일본이 독도 우표를 낸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선수를 쳤다. 일본 외무성은 독도 우표가 붙은 우편물을 아예 받지 않겠다고 했다. 우리측은 ‘우편물 중계의 자유’를 보장한 만국우편연합(UPU) 규정을 들어 항의했다. 일본은 마지못해 우편물을 받아들였지만 독도 우표에 먹칠을 해 배달했다고 한다.

▶ 지난해 우리 독도 우표를 일본이 트집 잡으면서 50년 만에 재연됐던 우표 분쟁이 중국으로 번질 조짐이다. 중국은 얼마전 지안(集安)의 고구려 왕성, 왕릉과 귀족묘를 담은 기념우표를 발행했다고 한다. 고구려사를 자기네 역사에 집어넣으려는 ‘동북공정(東北工程)’이 우표에까지 뻗친 셈이다. 정부 차원의 고구려사 편입작업을 하지 않겠다던 중국의 약속은 새삼 공수표가 됐다. 우리도 고구려 우표를 내년 7월 발행할 예정이어서 민족의 역사와 자존심이 실린 한판 우표전쟁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조선일보 / 오태진· 논설위원 2004-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