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

발해는 우리에게 가깝고도 먼 나라다. 발해는 우리역사에서 고구려와 신라, 백제, 고려의 뒤안길에 서 있었다. 발해사를 연구하는 학자들도 적었다. 유물과 유적은 남아 있지만 그들의 육성(肉聲)이 담긴 기록은 거의 전무하다. 발해를 연구하는 학문적 노력의 확대가 뒤따라야 한다.

발해(698~926년)는 만주와 북한지역, 그리고 연해주를 아우르며 200년 넘게 존속한 자주적 독립국가였다. 동아시아의 강국인 해동성국(海東盛國)이었다. 당나라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지만 고유의 문화를 갖고 있었다. 풍속이 고구려와 같다는 중국측 기록도 있다. 하지만 중국은 대조영이 속말말갈인이며 발해는 당나라의 지방정권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우리로서는 납득하기 힘든 역사해석이다. 발해사에 대한 우리의 보다 정밀한 학술적 축적이 요구된다.

옛 사람들의 역사는 우선 ‘있는 그대로’ 존중되어야 한다. 발해인들의 ‘삶의 축적’으로서의 역사도 마찬가지임은 물론이다. 유적 및 사료를 통한 객관적인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아무리 역사가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지만 ‘현재’의 자의적 시각에서 마음대로 재단될 수는 없는 일이다. 중국과 조공·책봉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발해는 당나라의 지방정권이라 함은 아전인수이다.

중국이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의 왕궁 복원작업을 한창 진행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발해 유적을 발굴·복원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려는 계획일 것이다. 발해사의 중국사 편입을 확고하게 하려는 의도가 아닌지 의심된다. 또한 온돌을 사용했고 고구려 건축양식을 이은 발해 왕궁을 중국식으로 재현하려 한다니 복원이 제대로 될지 우려된다.

중국의 동북공정은 끝나지 않았다. 55개 소수민족을 포함해 현재의 중국 영토 안에서 이루어진 모든 역사는 중국사라는 중국의 관점은 지구촌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 중국이 동이·서융·남만·북적으로 비하해 온 이민족들의 역사를 중국사로 끌어들이기 위해 애를 쓰고 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인가.

(경향신문 / 이연재 논설위원 2004-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