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철조망 두르고 唐나라 宮殿 본떠 '멋대로 복원'

[中國, 이번엔 발해工程] 헤이룽장省 上京성터를 가다

성터 주변엔 ‘출입·촬영금지’ 한글 푯말까지
省정부 주관 올해 대대적 발굴… 기초공사 마쳐
조선族 연구자도 배제 “또하나의 역사 왜곡”

옛 발해 궁성을 둘러싼 분위기는 을씨년스러웠다.

중국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닝안시(寧安市) 발해진(渤海鎭) 옛 상경성(上京城)의 내성(內城). 지난 5월부터 11월까지 대대적인 발굴 작업을 마친 이곳은 둘레만 해도 2680m(동서 620m, 남북 720m)에 이르는 넓은 지역으로, 전역이 2~3m 높이의 날카로운 철조망으로 철저하게 접근이 차단돼 있다.

내성 입구의 간판에는 ‘당대(唐代) 발해 유지’라고 큼직하게 적혀 있다. 랴오닝성 지안 일대의 고구려 유적에 ‘중국 고구려’라고 쓴 것과 마찬가지로, 발해는 ‘당나라 발해’라는 역사 인식이다. 발해를 당나라의 ‘일개 지방정권’으로 보는 인식과 이 지역의 고대 역사를 중국사로 보는 시각이 이 간판에 분명하게 드러난다.

철조망 앞에는 “발굴 현장의 참관과 사진촬영을 엄금한다”는 경고 푯말이 서있었다. 중국어·영어·한국어 3개 국어로 쓰인 푯말은 외부인 접근을 경계함이 분명하다.

옥수수밭 사이로 한참을 걸어가니 ‘제2궁전 유지(遺址)’라고 쓰인 팻말이 보였다. 내성의 다섯 개 궁전 중에서도 가장 큰 제2궁전에는 길이 93.5m, 너비 24.3m의 거대한 건물 기단부가 자리잡고 있다. 불과 200m 떨어진 오봉루(남문)에서 언제 중국측 관계자들이 소리지르며 뛰어들지 모르는 상황. 운동화 끈을 꼭 조여맨 뒤 정신없이 셔터를 누르고 메모했다. 높이 2m 정도의 기단부는 칼로 자른 듯이 네모반듯한 직육면체의 회색빛 화강암으로 차곡차곡 쌓아 올려진 것으로, 한눈에 보기에도 새로 복원했음이 분명했다. 남쪽을 향해 두 개의 돌계단도 만들어 놓았다. 뒤쪽의 제3궁전 터에도 이처럼 새로 만든 기단부가 보였다. 길이 33.5m, 너비 21.5m의 규모로, 돌계단은 한 곳이었다.

기단부 앞에는 궁전의 복원도를 그려놓은 큰 푯말이 하나씩 서 있었다. 최근 이곳을 방문한 이병건 동원대 교수(건축학)는 “2궁전과 3궁전의 기단부는 최근의 발굴 작업 이전에는 없었던 것”이라며 “중국측이 그려놓은 복원도는 장톄닝(張鐵寧)의 책 ‘발해 상경용천부 궁성건축 복원’에서 비롯된 것으로, 온돌의 존재를 나타내는 굴뚝을 그리지 않고 궁전 색깔을 붉게 하는 등 모두 중국식 양식을 따랐다”고 말했다.

궁전 유적의 동서 양쪽으로 돌과 기와편이 수북이 쌓여 있었고, 발굴이 끝난 자리에 길이 10~20m의 사각형 모양 유구(遺構·옛 건축물의 흔적)가 남북 방향으로 40여곳 정도 이어져 있었다. 그 안쪽 곳곳엔 직경 60~70㎝ 정도의 큰 주춧돌이 땅 위로 노출돼 있었다. 현지의 한 주민은 “200명이 넘는 발굴단들이 유물들을 파내 트럭으로 산더미같이 실어갔고, 그중에는 디딜방아 같은 유물도 보였다”고 말했다.

이곳에 대한 발굴·복원 작업은 헤이룽장성 고고학연구소와 헤이룽장성 박물관이 주관하고 있다. 발해 유적의 발굴과 복원이 철저하게 중국 정부의 통제 아래 이뤄지면서, 이 유적들은 ‘의심의 여지 없는 중국 유적’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현지 전문가들은 “중국 정부가 조선족 출신 발해사 연구자들을 발굴로부터 철저히 소외시켰고, 이에 따라 전공을 아예 다른 시대로 바꾼 학자도 있다”고 말했다. 윤재운 고구려연구재단 연구위원은 “중국은 발해 유적에서 나타난 고구려 양식들을 모두 지우고 당나라의 영향만 강조하고 있다”고 중국의 역사 왜곡을 우려했다. 지난해부터 중국이 ‘동북공정’을 통해 고구려사를 중국사로 왜곡하는 것이 큰 문제로 떠올랐지만, 발해사 왜곡은 국내의 관심이 뜸한 상황에서 아예 기정사실로 굳어져 가고 있다.

(조선일보 / 유석재, 최순호 기자 2004-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