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길수교수 “고대중국, 국내성 지배설 근거없다”

고구려의 두번째 도읍지인 국내성(중국 지린성 지안시) 일대는 고구려 천도 전 고대 중국이 지배했다는 주장이 학계에서 대세를 점해왔다. 그런데 최근 고구려연구회장을 지낸 서길수 서경대 교수가 이같은 학설이 근거가 없다는 새로운 주장을 내놓았다.

지금까지 중국 지배설의 근거는 고구려가 2대 유리명왕 22년(서기 3년) 국내성으로 천도하기 전 한(漢) 또는 진(秦) 등 고대 중국의 여러 나라 중 하나가 쌓은 토성이 있었다는 전제하에 가능한 것이었다. 나아가 국내성이 고구려 건국 이전에는 한(漢)이 이 일대에 설치한 군현 중 하나인 현토군(玄兎郡) 치소(治所·군 소재지)였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서 교수에 따르면 이같은 주장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국내성 석축(石築) 성벽이 기존에 있던 토성을 허물고 지어졌음이 규명되어야 하고, 나아가 먼저 쌓았다는 토성이 고구려 건국 혹은 천도 이전에 있었다는 증거가 확보되어야만 한다는 것.

하지만 서 교수는 1975∼77년에 이어 2000년에 중국이 실시한 국내성 성벽 발굴조사 결과를 면밀히 검토한 결과 현재의 국내성 석축 성벽 안에 또 다른 토성이 있었다는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중국측의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국내성 성벽 10군데를 잘라 시굴조사를 벌였으며, 각종 석기류와 토기조각 등이 출토됐다. 또 10군데 중 3군데에서 단단한 흙두둑이 발견되기는 했으나, 판축(版築)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한(漢)대 이전의 중국이 쌓은 토성으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2000년 실시된 시굴조사에선 그나마 흙두둑의 흔적조차 없었다.

서 교수는 27일 단국대에서 개최되는 고구려연구회(회장 서영수) 주최 추계학술대회에서 ‘오녀산성ㆍ국내성ㆍ환도산성에 대한 새로운 고고학적 성과’란 논문을 통해 이같은 사실을 발표할 예정이다.

(서울신문 / 임창용 기자 2004-11-26)

"국내성, 고구려 이전 漢代 토성 흔적 없어"

서길수 교수, 中측 발굴성과 분석 근거 주장

고구려가 두 번째로 도읍한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시 소재 고대 성곽인 국내성(國內城)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주장이 대세를 점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고구려가 제2대 유리명왕 재위 22년(서기 3년) 겨울 10월 이곳으로 천도하기 이전에는 토성(土城)이 있었으며, 이 토성은 한(漢) 혹은 그 이전 시황제 때의 진(秦)이나 전국 7웅 중 하나인 연(燕)이 이 일대 지배 거점으로 쌓은 성곽이다.

이런 견해는 나아가 국내성이 고구려 건국 이전에는 한(漢)이 이 일대에 설치한 군현 중 하나인 현토군(玄兎郡) 치소(治所=군 소재지)였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이러한 현토군 치소는 기원전 37년, 막 건국한 고구려에 밀려 폐지되었다고 본다.

이와 같은 주장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석축(石築) 성벽인 국내성 성벽이 기존에 있던 토성 성벽을 허물고 지어졌음이 규명되어야 하고, 나아가 먼저 쌓았다는 토성이 고구려 건국 혹은 천도 이전에 있었다는 증거가 확보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전 고구려연구회 회장인 서길수 서경대 교수는 1975-75년에 이어 2000년에 중국이 실시한 국내성 성벽 발굴조사 결과를 면밀히 검토한 결과 현재의 국내성 석축 성벽 안에 또 다른 토성이 있었다는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서 교수는 27일 단국대에서 개최되는 고구려연구회(회장 서영수) 주최 추계학술대회를 앞두고 미리 배포한 논문 `오녀산성ㆍ국내성ㆍ환도산성에 대한 새로운 고고학적 성과'에서 이같이 주장했다.

이 논문에 따르면, 중국은 1975년 5월부터 1977년까지 국내성 성벽 10군데를 잘라 시굴조사를 벌였다. 이를 위해 절개한 성벽 트렌치(trench)는 모두 10곳이었다. 그 중 남쪽 성벽에 5곳(T1-T5), 동쪽 성벽에 1곳(T6), 북쪽 성벽에 2곳(T7-8), 서벽 남단에 2곳(T9-10)이 절개됐다. 이 때 총 발굴면적은 960㎡.

그 결과 이곳에서는 돌도끼 1점, 돌칼 1점, 석기 손잡이 1점, 둥근 석기 1점의 석기류 총 4점과 토기 조각 14점이 출토됐다. 이런 조사성과는 지안현문물관리소(集安縣文物保管所)에 의해 `지안고구려 국내성터 조사와 시굴'이라는 제목으로 1984년 1월에 발간된 고고학 전문잡지인 `문물'(文物)에 발표됐다.

이 보고서에 의하면 트렌치 10곳 중 3곳에서 단단한 흙두둑(土壟)이 발견됐다. 이 두둑은 너비 7-8m, 높이 1.7-2m로 단면은 활꼴이었다. 토질은 진흙과 모래가 섞인 황갈색이었으며, 소량의 자갈이 섞여 있었다.

그러면서 보고서는 "단단한 정도를 볼 때 인공적으로 쳐서 다진 것처럼 보이나 판축(版築)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것으로만 보아서는 성벽 안에서 확인됐다는 `단단한 흙두둑'이 한대(漢代) 혹은 그 이전에 국내성 자리에 있었다는 토성(土城)이 있었다고 할 수 없다.

서 교수에 의하면 2000년에 시도된 또 다른 발굴조사에서는 토성 흔적이라고 간주할 만한 흙두둑은 아예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 때 발굴한 지점은 1970년대 이미 조사가 이뤄진 7번 트렌치(T7)에서 서쪽으로 불과 몇m 안 간 지점이다.

이 발굴조사 성과는 지린성문물고고연구소와 지안시박물관 편저 `국내성 - 2000~2003년 지안 국내성과 민주유지(民主遺址) 시굴보고'(2004)로 공개됐다.

보고서는 성벽 출토 "토기는 만드는 법이나 생김새 모두 고구려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면서, 종래 토성 흔적으로 간주된 흙두둑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하고 있다.

서 교수는 이로 볼 때 "국내성이 고구려 사용 이전에 그 이전 시기에 쌓은 또 다른 토성이 있었다는 압도적인 견해는 전혀 근거가 없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 김태식 기자 2004-1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