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랑에서 이정기까지 중국의 고구려 유민

중앙대 해외민족연구소 고구려 해외진출 세미나

통시대적으로 중국은 주변 민족과 국가를 야만시했다. 전한(前漢) 무제(武帝) 때 태사공(太史公) 사마천(史馬遷)이 편술한 사기(史記) 이래 역대 중국왕조가 편찬한 모든 정사(正史)가 다양한 이름으로 이역전(異域傳)을 배치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역전이란 중원(中原) 혹은 중국(中國)을 진정 중원답게, 중국적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중국은 이역전에 남만(南蠻)ㆍ북적(北狄)ㆍ서융(西戎)ㆍ동이(東夷)의 이른바 오랑캐 구역을 설정함으로써, 그들이 군림하는 구역은 이들 만이(蠻夷)보다 훨씬 높은 문명권이라는 자긍심을 끊임없이 확인했다.

그렇다면 중국이 강요한 이분법적 분류가 막상 만이족(蠻夷族)들에게는 어떻게 작용했을까? 만이족은 중국과는 대항하는 또 다른 세계관을 자각하게 된다.

그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으나, 첫째, 오만한 중국의 콧대를 꺾어버리는 일이다. 침략과 정복이 대표적이다. 둘째, 중국보다 더 중국다워지고자 한다. 이 두 번째 경우가 극단적으로 표출된 형태가 바로 조선후기에 발흥한 소중화주의다.

만이족이 중국 본토에 들어가 이름을 날릴 때는 크게 두 가지 반응이 발견된다. 찬탄과 질시가 그것이다. 실제 이 둘은 분리되지 않는다. 한 마디로 어찌 오랑캐 족속이 저렇게 똑똑한가라고 하면서도 `오랑캐 주제에…'라는 시각도 엄존한다.

중앙대 부설 해외민족연구소(소장 진성규)가 27일 오전 10시 이 대학 법대 건물에서 `고구려인의 해외진출과 그 활동'을 주제로 개최하는 학술세미나는 중국이 대표적인 동이(東夷)로 거론한 고구려인 혹은 고구려 유민 중에서도 중국 본토에 들어가 찬탄과 질시를 동시에 받으면서도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들을 탐구하게 된다.

고구려연구재단이 후원하고 한국중앙사학회(회장 유춘근), 중앙대 부설 인문컨텐츠연구센터(센터장 박경하)가 함께 하는 이 자리에서는 남무희(국민대)ㆍ지배선(연세대)ㆍ정병준(동국대)ㆍ이문기(경북대)ㆍ신형식(상명대)ㆍ윤명철(동국대) 씨가 각각 발표자로 나선다.

남무희 강사는 '요동성 고구려인'(遼東城 高句麗人)으로 북위(北魏)와 양(梁)조에서 활동하면서 중국 불교계의 삼론학(三論學) 발전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5세기대 승려 승랑(僧郞)을 조명한다.

이미 단행본 `고선지'를 선보인 바 있는 지배선 교수는 이 자리를 빌려 다시금 그의 활동상을 정리하며, 당대(唐代) 번진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정병준 교수는 그 자신의 왕국을 이룩한 평로절도사(平盧節度使) 이정기(李正己)를 조명한다.

이문기 교수는 1990년 중국 뤄양(洛陽) 부근에서 묘지(墓誌)가 출토된 고구려 유민 고족유(高足酉.626-695)라는 인물의 활약상을 그의 묘지명(墓誌銘)을 통해 분석한다. 이들을 포함한 고구려 유민에 대한 총설은 신형식 교수가 맡았다.

(연합뉴스 / 김태식 기자 2004-1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