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안 최초 주인은 고구려인" 中도 확인

중국이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해 최근 3년여 지린(吉林)성 지안(集安)과 랴오닝(遼寧)성 환런(桓仁)에서 대대적으로 진행한 고구려 유적 발굴 내용이 한꺼번에 공개된다.

중국 문화재 당국에서 작성한 공식 발굴 보고서들은 1930, 40년대 일본 학자들의 고구려 유적 발굴 이후 가장 방대한 내용의 조사보고서로 평가된다.

고구려연구회(회장 서영수 단국대 교수)는 올해 7월 세계문화유산 등재 직후 출간된 고구려 유적 발굴 보고책자를 최근 입수해 27일 단국대에서 ‘환인ㆍ집안지역의 고구려 유적 발굴성과의 검토’를 주제로 학술대회를 연다.

학술대회에서 다룰 책자는 모두 4종. 지린성 문물고고연구소와 지안시 박물관이 함께 펴낸 ‘지안 고구려왕릉-1990~2003년 지안 고구려왕릉 조사보고’ ‘국내성-2000~2003년 지안 국내성과 민주유지 시굴보고’ ‘환도산성-2001~2003년 지안 환도산성 조사시굴보고’와 랴오닝성 문물고고연구소에서 낸 ‘오녀산성-1996~1999, 2003년 환런 오녀산성 조사발굴보고’(이상 베이징 문물출판사 발행)다.

이 책자들은 분량이 많은 경우 최대 540쪽이 넘고 유적ㆍ유물 사진이나 그림을 권마다 수백 종 담고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보고서들이 가장 최신의, 체계적인 중국내 고구려 유적 발굴 성과를 낱낱이 보여준다는 점이다.

이번 학술대회에서 기조발표할 박성봉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장은 “일제 학자들이 20세기 초에 조사 보고서를 내 뒤로 본격적인 연구성과가 나오지 못했다”며 “이 책들은 고구려 유적 발굴로는 실로 70, 80년만의 대업적이라고 할만하다”고 평가했다.

새로운 발굴 성과도 수두룩하다.

그 가운데 지안 지역에 거주한 최초의 주인이 고구려인이라는 점을 확인 것이나, 불과 20년 전 중국학자들이 국내성 이전에 토성이 있었다며 고구려가 고대 중국이 지배했던 땅에 나라를 세웠다고 주장한 것이 근거 없다고 스스로 뒤집은 것은 주목할만하다.

‘발굴 면적이 모두 5,000㎡에 이른다’는 국내성 발굴 보고서는 ‘국내성 전역에 걸쳐 고구려 문화유적과 관련된 곳은 다 팠으며 더욱 중요한 것은 조기(早期) 문화유적을 찾아 고구려 거주민이 국내성 지역 최초의 문화주체 세력’이라고 밝혔다.

‘오녀산성ㆍ국내성ㆍ환도산성에 대한 새로운 고고학적 성과’를 발표할 서길수 서경대 교수에 따르면 2000년에 국내성 북벽을 절개 조사한 결과 ‘쌓아올린 각층의 토질이나 유물이 모두 같은 시기의 고구려 것이며 그 이전의 토성은 발견되지 않았다.

’ 하지만 중국은 84년 발굴 보고서에서 ‘1975~77년 지안현문물보관소에서 국내성 성벽 10곳을 절개 발굴, 국내성 석축 성벽 아래 전국시대~고구려 건국 이전의 토성벽이 있고 고구려시기의 석축 성벽은 두 번의 수리를 거쳤다’고 썼다.

이를 근거로 최근까지도 중국학자들은 이 토성이 한의 현도군 아래 고구려현 치소이거나, 연진 또는 서한 시기의 토성이라고 주장했다.

나아가 ‘고구려가 국내성으로 천도한 뒤 서한의 토성을 339년간 그대로 사용하다가 고국원왕 12년(342년)에 그 토성을 바탕으로 석성을 쌓았다’는 논리 비약까지 등장했다.

서 교수는 “중국학자들이 사실조차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것은 물론 근거 없는 논리로 역사왜곡을 일삼았다는 사실이 최근 발굴로 입증됐다”고 지적했다.

오녀산성과 국내성, 환도산성 등에서 옹성이 두루 확인된 것도 의미가 깊다.

중국에서는 당나라 때 처음 등장한 옹성의 문이 고구려 첫 도읍으로 추정되는 오녀산성의 동문과 서문, 국내성 북벽 서문과 중문, 서벽 북문과 동문, 환도산성 남문 등 고구려 초기 유적에서 ‘ㄱ’자꼴, 요철꼴 등 다양한 형태로 발견돼 ‘고구려의 정체성을 고고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으로 평가됐다.

국내성에서 동쪽으로 1.5㎞ 떨어진 부락인 민주촌의 민주유적 발굴성과 등 국내성 곳곳의 유물 발굴도 눈여겨볼만하다.

이미 돌기둥 2개가 발견되어 고구려 시기 건축물 터로 추정되던 민주유적(3,607㎡)에서는 지난해 ‘3개조의 대형 건축물터’와 다양한 형태의 도자기, 기와, 전돌, 화폐 등이 유물이 두루 발굴됐다.

중국학자들이 국내성 내 대형 궁궐 터로 추정하는 곳에서 출토된 청자기와나 민주유적의 새털구름무늬 와당(瓦當)에서 ‘무술(戊戌)년’이라는 표식이 나온 점 등은 고구려의 문화수준이 매우 높았고, 동진 시기 중국과 활발히 교류했다는 점을 확인케 한다.

서정호 공주대 교수는 “국내성 여러 곳에서 발해의 전형적인 와당인 연꽃무늬 와당이 다른 고구려 유물과 함께 발굴됐다”며 “고구려 멸망 이후에도 발해문화가 도래돼 고구려 전통이 바로 소멸되지 않았음을 입증한다”고 해석했다.

하지만 문화재 발굴 보고서인데도 불구하고 이 책자들이 고구려의 역사적 계승을 부정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 점은 유심히 볼 대목이다.

박성봉 원장은 “국내성 발굴 보고서의 경우 ‘고구려는 멸망한 후 타민족에 융합ㆍ동화되어 역사무대에서 퇴출되고 문헌에만 남았다’고 썼다”며 “고구려문화가 한반도 대부분에 파고 들어 대대로 전승되고 있는 점을 무시하는 독단”이라고 지적했다.

(한국일보 / 김범수 기자 2004-1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