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비

개간 중인 덤불 속에서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의 한쪽 모서리가 드러난 것은 1880년의 일이다. 그 비석 곁 초막에 초붕도(初鵬度)라는 노인이 살고 있었는데 “성경(盛京)장군 좌씨(左氏)가 탁본을 떠간 것을 처음으로 하여 일본 사람들이 자주 왔었는데, 비면에 이끼와 덩굴이 엉켜 불로 이를 태우는 바람에 비면과 모서리가 바스러졌으며, 비문이 선명치 않다고 석회 칠을 하고 자획을 써넣기도 하여, 원자(原字)를 그르쳤음은 뻔한 일이다” 했다. 만주 침략을 은밀히 공작하고 있던 일본 육군참모본부에서 이를 알고 사코(酒勾景信) 대위를 특파하여 이 비문을 탁본케 하여 본부에 올려보내게 했다. 그 탁본의 비문을 토대로 하여 삼국시대에 일본이 백제·신라·가야를 점령했다는 한국침략 증빙자료로 활용해왔던 것이다.

사코 탁본에 보면,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파멸시켰다(辛卯年來渡海破)고 똑바로 박혀나와 있다. 사코 탁본 이후 여러 차례 일본 학자들이 탁본을 떠 갔는데, 시간이 갈수록 그 탁본의 ‘來渡海破’ 네 글자가 판독이 어려울 만큼 흐려지고 글자가 이전 것보다 처지는가 하면 글씨체가 갈라지거나 비뚤어져 탁본돼 있음이 완연하다. 이를테면 석회 칠을 하고 새겨넣은 ‘海’자가 석회가 바스러지는 바람에 두 갈래로 갈라져 좌우로 처지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곧 석회 칠로 삼국을 일본 속국으로 만들어 한국 침략을 역사적으로 합리화하는 식민사관을 조작했던 사실은 역사의 상식이 돼 왔고, 일본학계에서도 인정하고 있다. 이번에는 중국이 역사에서 고구려를 약탈해 가려는 와중에 고구려의 기상을 진작시키려는 뜻에서 이곳저곳에 모조 광개토대왕비를 세우는 것은 좋은데, 일본 제국주의가 변조한 글귀대로 세우고들 있다 하니 광개토대왕이 땅을 치고 통곡할 노릇이다. 문제는 비문 변조라는 역사적 상식을 망각시킨 역사교육의 소홀에 있다. 그동안 찬밥 먹어온 국사 교육의 필연이요, 역사의식의 희박으로 전 국민을 뿌리 없이 떠 있는 부평초화(浮萍草化)해온 것의 구체적 나타남이다. 책임질 사람이나 부서를 가려내고 넘어갈 일이다.

(조선일보 / 이규태 2004-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