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학이야기] 우리가 필요한 것은 '중심철학'

선조가 서울을 포기하고 의주로 몽진할 때 노비들이 장예원(掌隸院)을 불사르고 노비문서를 태워 없앴다. 선조의 몽진길에 민중의 항의도 있었다. 다시 말해 국가의 안보는 민중의 합의가 최상의 정책이라는 역사의 가르침이다.

일본에 대한 경계론을 폈던 서인(西人)이나 이를 반대했던 동인(東人)이나 다 함께 의병항쟁에 나선 것은 다행이었다. 문제는 애국심이다. 서인이나 동인이나 다 애국심에는 서로 지지 않았다. 나만이 진정한 애국자라는 독선이 큰일이었다.

한말에 이르면 지식층을 위주로 한 개화파의 개화운동, 지방 유생들이 일으킨 척사위정(斥邪衛正) 운동, 농민들의 동학운동 등은 모두 애국심의 발로였다. 그러나 을사조약으로 국권을 잃은 다음에야 민중이 합의를 이루어 광복 투쟁에 나섰지만 실패했다. 1920년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등장은 민족역량의 양분 탓이었다. 이와 같은 분열은 결국 남북 분단, 6-25라는 원인을 배태하였다.

우리가 설정한 이상은?

6-25는 동족상잔의 비극에 이어 안보제일주의에 당위성을 주었다. 군사안보 제일주의는 물력이 지성을 지배하는 구조와 의식을 낳았다. 물질 존중은 당연히 이윤추구가 제일의 목표가 되었다. 사회정의 실현의 도구나 수단으로서의 재물 곧 경제가 상위 개념으로 올라선 세상이 되었다.

자본주의도 끝간 데는 인간다운 삶이지만 이런 가치관은 무너지고 인간을 위하겠다던 그 경제의 도구로 우리는 전락했다. 배고픔의 해결, 보릿고개의 극복은 더 없는 민족의 행복이다. 이 행복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한국인다움을 상실케 했다는 것이 우리의 불행이다.

우리가 설정한 이상(理想)은 무엇이며 우리 사회가 실천해야 할 정의는 무엇인지? 어느 누구도 딱 부러지게 밝힌 적이 없다. 지금 우리에게는 중심 철학이 없다. 이런 때는 투쟁과 갈등이 증폭한다. 국학은 단순한 역사적 사실의 복고가 아니다. 오늘의 현실에 맞는 우리의 것을 새로이 만들어가자는 의지와 운동이 국학운동이다.

우리의 실패는 민족 역량의 응집력 결여였다. 응집력이라는 공동체 정신의 부족이었다. 민중의 합의 도출은 정치지도자의 몫이다. 다양한 계층간의 이념과 이해(利害)의 조정이 관건이다. 조정엔 기준이 있어야 한다. 중심가치가 있어야 한다. 모두가 동의하는 가치기준이 있어야 상호 합의의 준거로 쓰일 수 있다. 그렇지 못할 때 이기주의적 독선에 의한 투쟁과 갈등, 증오 밖에 나올 게 없다.

고구려의 초창기, 조선왕조 특히 세종시대를 민족의 융성기라 하는 것은 중심이 서 민중의 합의가 자연스레 이뤄졌기 때문이다. '다물흥방지가(多勿興邦之歌)'가 고구려에 유행했다. 그 가사의 한 귀절은 '천부경'의 것이다. '인중천지위일혜(人中天地爲一兮)' 주몽의 건국이념이 다물(多勿)이었다. 단군조선의 이념을 계승한 것이다. 조선왕조 초기, 단군을 개국시조로 공인하고 평양엔 숭령전(崇靈殿)을 세웠다. 단군을 모시고 중국의 사신들을 반드시 숭령전에 참배케 했다.

단군이 흥할 때 나라가 흥했다. 단군의 흥함은 단군의 홍익정신이 보편화됐다는 의미다. 홍익정신이 구심점으로, 중심철학으로 제몫을 하던 시대는 우리의 태평성대였다. 하늘, 땅, 사람, 어느 하나도 먹이의 대상이 아니었다. 윤리적 배려의 대상이었다. 이 시대 우리가 간절히 소망하는 것이 이것 아니고 무얼까?

一指 이승헌[국학원 설립자]

(뉴스메이커 2004-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