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고] 신라가 낳은 최고의 벤처정신

[오귀환의 디지털 사기열전 | 장보고]

청해진을 세계적인 국제 무역항으로 만든 장보고, 그 지칠줄 모르는 도전

“서기 830년대 신라 청해진(오늘날의 완도)에는 세계 각국으로부터 온갖 물건과 외국 사람들이 몰려들곤 했다. 당나라에서 수입된 비단, 두루마기, 금띠, 채색 비단, 흰 앵무새, 금은 세공 그릇, 공작 꼬리, 에메랄드, 물소뿔, 거북 껍질, 양모 제품, 페르시아 직물, 자단 목재, 당나라 카펫, 상아로 만든 아홀 등이 선착장에 무더기로 풀어졌다. 창고에 짐을 부리고 나면 이번에는 당나라로 향하는 물품들을 무더기로 배에 싣는다. ‘과하마’라는 작은 말, 약재인 우황, 인삼, 바다표범 가죽, 금, 은, 사냥매인 해동청, 개, 대화어아금·소화어아금·조하금·조하주·어아주·누응령 등의 고급 직물, 베, 머리털…. 다른 한편에선 일본으로 향하는 배에도 짐이 실린다. 칼, 금, 은, 세발짜리 솥, 비단, 명주, 베, 가죽, 말, 개, 노새, 말안장, 버선 등 신라 특산품과 함께 당나라에서 수입한 향료와 약품, 낙타 등이 배에 오른다. 다른 한편에서는 일본에서 들여온 명주, 명주의 원료인 면 등이 부려진다.”

중국·일본의 정사에도 기록돼

지금으로부터 약 1200년 전, 신라의 청해진은 세계적인 국제 무역항으로서 크게 번성하고 있었다. 며칠마다 당나라와 일본의 배가 몰려와 무역품을 산더미처럼 부리는가 하면 신라의 특산품들이 무더기로 실려 일본과 당나라로 떠나갔다. 서쪽으로 나가는 선단은 당나라의 산둥반도 덩저우를 시작으로 창장강 지역의 양저우, 중국 강남의 항저우, 광저우까지 사실상의 정기 항로를 운항하고 있었다. 동쪽으로는 일본 후쿠오카, 하카다 등지로 진출해나갔다.

바다의 실크로드 동쪽 끝부분에 해당하는 당나라-신라-일본-발해로 이어지는 해상무역의 중심부인 청해진에 거점을 두고 동아시아 지중해의 번영을 주도하고 있었던 것은 바로 신라의 장보고 무역선단이었다.

장보고라는 이름은 한국은 물론 중국과 일본의 정사에 각각 뚜렷하게 기록돼 있다. 그만큼 그의 업적은 공식적으로 인정받는다. 한국의 경우 그는 <삼국사기>에 ‘장보고열전’으로 실려 있고, <삼국유사>에도 기록돼 있다. 신라의 왕권 세력은 그를 ‘반역자’로 몰아 죽였지만,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장보고가 의리와 용맹이 있다 하더라도 중국의 사서가 아니면 그 자취가 없어져 위대함이 알려지지 못할 뻔했다”는 표현으로 그를 높이 평가한다. 중국에서는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인 두목이 저서 <번천문집>(樊川文集)에서 그를 가장 먼저 평가하고 나섰다. 명석한 두뇌를 가진 사람으로서 동방의 나라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이라고 기록한 것이다. 두목의 저서를 바탕으로 중국의 정사 <신당전>도 그를 ‘동이전 신라조’에 자세히 기록해놓고 있다. 일본에서는 정사인 <일본후기> <속일본기> <속일본후기>에 모두 실려 있다. 일본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평가하고 있는 셈이다. 특히 장보고 시대에 중국을 여행한 일본의 승려 옌닌(圓仁)은 기행문인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서 전체의 약 3분의 1을 할애해 장보고와 청해진 네크워크에 대해 자세히 기록해놓았다.

장보고는 서기 800년이 되기 직전에 오늘날의 완도에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활보 또는 궁복(弓福), 궁파(弓巴)로 불린 것으로 보아 활을 매우 잘 쏜 것 같다. 당시 신라는 엄격한 골품제도에 따라 운영되고 있었다. 결국 장보고는 신분 상승 등을 위해 당나라로 건너간다. 당시 당나라는 신분제도가 엄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과거제도를 통해 관직에 인재를 임용하는 등 신라보다 훨씬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그곳에서 무술과 상업을 배운 그는 30살 무렵 당나라 서주 무령군(武寧軍)의 소장(小將)으로 임관됐다. 일종의 군관이 된 것이다. 당시 무령군의 주된 임무는 당나라 조정에 반기를 든 평로치청의 번수 이사도가 이끄는 평로군을 소탕하는 일이었다. 이사도는 고구려 유민 출신 이정기가 서기 765년 평로치청절도사 후희일을 몰아내고 스스로 번수 자리에 오르며 일으킨 3대 55년에 걸친 반란의 마지막 지도자였다. 서기 819년 평로군 토벌 뒤 장보고는 무령군을 떠나 중국과 일본, 신라를 오가며 무역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군에 복무하거나 퇴역 뒤 무역을 하는 동안 당나라 곳곳에서 신라인을 노예로 인신매매하는 것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서기 828년 신라로 귀국한 그는 흥덕왕에게 청해진을 설치할 것을 건의한다.

중앙정부에 암살당하다

“지금 신라의 연해 지방은 이름만 신라 땅이지 해적들의 소굴과 다름없습니다. 해적들은 신라 백성들을 잡아다가 당나라에 노예로 팔아먹고 있습니다. 소신이 그곳에서 여러 번 불쌍한 동포를 보았고, 더러 구출하기도 했사오나 창해일속(滄海一粟·바닷물 속의 좁쌀 한톨)에 지나지 않습니다. 해적들을 소탕하지 않으면 장차 그 화를 면하기 어려울 것으로 아뢰나이다.” 결국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신라 조정은 그의 건의를 받아들여 ‘1만명의 군졸’을 줘 청해진을 설치하도록 한다. 이 ‘1만명의 군졸’은 정식 군대 병력이 아니라 청해진 지역의 주민을 규합해 일종의 민군 조직을 그 정도 규모까지 거느릴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나아가 그는 스스로 ‘청해진 대사’라는 직명을 사용한다. 신라 관직에는 이런 명칭이 원래 없었다. 그리고 그는 관직에 나설 수 없는 평민 출신이었다. 따라서 이 관직은 실제 있는 관직이 아니라 조정이 어쩔 수 없이 타협책으로 그 명칭의 사용을 묵인해준 것으로 보인다. 장보고는 청해진을 근거지로 삼아 1만명의 민군 조직을 활용해 해적과 노예무역을 소탕하는 작전에 돌입해 성공한다. 그의 이름은 신라는 물론 당나라와 일본에까지 퍼져나간다.

그 뒤 장보고는 이 민군 조직을 무역선단으로 재조직해 신라-당나라-일본 사이의 삼각무역을 육성한다. 이런 활동은 청해진을 중심으로 당나라 산둥반도 그리고 일본 하카다를 잇는 무역 네트워크로 발전하고, 이 네트워크의 뼈대 위에 다시 나라별로 내부 네트워크를 가동하는 방식으로 확대재생산된다. 동아시아 삼국무역의 중심세력으로서 장보고의 청해진 선단은 경제적 부와 군사력으로 중앙정부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구가하기에 이른다.

장보고는 서기 838년 신라 왕실 내부의 권력 투쟁에서 밀려나 청해진을 찾아온 왕족 김우징을 지원해 왕성 공격에 나서 승리를 거둔다. 김우징은 이 승리로 신라 제45대 신무왕이 된다. 그러나 장보고와 신무왕의 밀월 관계는 신무왕의 갑작스러운 죽음 뒤 장보고의 딸를 태자비로 맞이하겠다는 거사 이전의 약속을 새로 즉위한 문성왕이 기존 중앙정치 세력의 반대와 견제로 이행하지 못하면서 급격히 긴장 상태로 돌입한다. 서라벌과 청해진 사이에 군사 충돌의 위험마저 예견되는 가운데 서라벌쪽은 암살자를 보내는 것으로 선수를 친다. 한때 장보고의 부하 장수로 중앙에 먼저 진출해 있던 염장을 위장 탈출시켜 장보고에게 접근토록 한 것이다. 장보고는 그를 신뢰하고 같이 술을 마시다 결국 암살된다. 그의 암살 뒤 청해진은 염장의 통제 아래 놓였으나 유능한 사람들이 탄압으로 죽거나 다른 곳으로 떠나가버려 급격히 쇠퇴의 길로 접어든다. 결국 문성왕 13년인 서기 851년 신라 조정은 청해진을 폐쇄하고 그곳 백성들을 벽골군(전라북도 김제)으로 집단 이주시켜버린다. 이로써 청해진은 국제 무역항으로서의 기능은 사실상 정지돼버린다.

민족주의와 국제주의의 조화

장보고의 삶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

(1) 평생을 도전하는 벤처 정신으로: 그는 처음 신라라는 숨막히는 신분사회의 벽에 막히자 과감하게 개인의 창발성을 발휘할 수 있는 넓은 대륙 당나라로 건너간다. 그곳에서 무령군의 소장으로서 작은 성공을 이룬 그는 노예무역으로 고통받는 동포를 구하는 민족 프로젝트를 스스로 기획하고 창업해낸다. 그 누구보다 도전에 도전을 거듭하는 삶을 산 것이다. 다시 해적 소탕에 성공한 뒤에는 1만명의 군사력과 총체적 역량을 모아 청해진 무역선단으로 전환한다. 나중에 왕족 김우징을 도와 왕성 공격에 나선 것도 그의 도전정신을 그대로 보여준다. 우리 역사상 이처럼 매 상황마다 도전 정신으로 헤쳐나간 사람은 거의 볼 수 없지 않은가?

(2) 민족주의와 국제주의의 조화: 그는 이미 1200여년 전 민족주의와 국제주의의 조화를 성공시켰다. 민족주의자도 국제주의적 시야와 철학을 가져야 한다. 그는 그것을 가르친 스승이라고 할 수 있다. 거꾸로 국제주의도 민족주의와 만나야 제대로 발전할 수 있다는 교훈도 가능하다.

(3) 지경학(地經學)의 대가: 그는 청해진이 자신의 고향이라고 해서 그곳을 선택한 것은 아니다. 동아시아 삼국무역의 중심지역이기 때문에 그곳을 거점으로 해적 소탕이라든가 삼국무역도 가장 효율적으로 해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곳이 신라 중앙권력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비정치적 거점을 확보하는 것을 용인받을 수 있다는 점도 고려했을 것이다. 그는 지리와 경제를 잘 읽은 탁월한 지도자이다.

(4) 외부확장형 인물: 그는 기본적으로 새로운 영역을 새롭게 기획해서 선점하는 식으로 성공을 거두는 유형이다. 당나라로의 도항, 해적 소탕 기지로서의 청해진 기획, 해적 소탕 뒤 청해진의 무역선단으로의 재빠른 변신 등이 다 그렇다. 그런데 그가 신라의 전통적인 중앙권력으로 진출 방향을 돌린 것은 이런 자신의 장점을 망각한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새로운 땅이 아니라 기성 진입자가 수백년 동안 득시글거리며 피를 빨아먹고 있는 곳으로 향한다? 그 기득권으로 방향을 돌리면서 장보고는 좌절한다. 그리고 단 한번의 좌절이 그의 죽음으로 직결된다.

해양왕국의 꿈은 왜 꺾였는가

(5) 패배하지 않아본 자의 방심: 그는 늘 성공 가도만을 달려왔다. 그 결과 평민 출신으로 ‘감의군사’ ‘진해장군’이라는 지위에까지 오른다. 신라 역사상 전례가 없는 신분 파괴적 계급 상승을 기록한 것이다. 늘 성공만을 구가한 결과 그는 쉽게 사람을 믿는 단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위장 잠입한 옛 부하 염장의 칼에 찔리고 만다. 믿는 사람에게 찔리는 사람이 어디 한둘이었겠는가? 하지만 그의 죽음으로 청해진이 무너지고 해양왕국의 꿈이 꺾인 것이 슬프고 슬플 뿐이다. 한국 역사에서 바다는 그렇게 막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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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으로 퍼져나간 신라인들

장보고가 살던 9세기 무렵 중국에는 신라인 거주지역이 광범하게 퍼져 있었다. 가장 많이 신라인들이 몰려 살던 곳은 산둥반도를 비롯해 추저우(楚州), 롄수이(漣水), 양저우(揚州) 등 창장강 유역과 화이수이강 유역이다. 산둥반도는 한반도와 가장 가깝다는 지리적 특성과 그 배후에 많은 인구들이 모여 있어 시장성이 높은 지역이고, 양저우는 ‘바다의 실크로드’를 따라오는 이슬람 상인들의 최종 기착지였다. 전체적으로 신라인들은 당나라의 동해안을 따라 산둥에서 저장성 닝보에 이르기까지 퍼져 있었다. 그리고 다시 이런 해안도시에서 큰 강과 운하를 따라 흘러들어가고 있다.

당시 당나라는 당에 체류하는 이민족의 지위를 법적으로 보호해주는 율령을 제정하는 등 개방적이고 국제적인 정책을 취했다. 이 때문에 외국에서 많은 사절단과 상인, 유학생, 종교인들이 몰려들었다. 자장, 의상, 혜초, 지장이나 최치원 등이 당나라로 간 것도 다 이런 흐름에 따른 것이다. 신라인들은 곳곳에 ‘신라방’ ‘신라촌’으로 불리는 외국인 거주지역(‘번방’)을 형성했다. 자신들의 행정 업무를 위해 ‘구당신라소’라는 기관을 설치하고, 그 관리자로 신라인을 임명했다. 일본 승려 옌닌이 쓴 <입당구법순례행기>에 ‘총관’ ‘압아’로 나오는 직책은 다 이것을 지칭한다.

신라인 사회는 자신들의 정신적 구심점으로서 거주지역마다 불교 사찰을 두었다. 대표적인 것이 장보고가 산둥반도 문등현 적산촌에 세운 법화원이다. <…순례행기>에 따르면 서기 839년 11월16일부터 이듬해 정월 15일까지 법화원에서 법화경을 강의했는데, 이것이 끝날 무렵에는 신라인 남녀 신도 250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경전 강의나 예배하고 복을 비는 방법은 모두 신라 풍속대로 했다는 것이다.

당시 신라인들은 목탄운송업, 조선업, 선박수리업, 상업, 농업 등에 종사하며 청해진 무역선단 일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고 한다. 정보 취합과 전달, 유통 지원 등 다양한 형태의 활동이 <…순례행기>를 통해 확인된다. 신라인들은 대단히 진취적인 기상을 발휘하며 대륙으로 퍼져나갔던 것이다.

<오귀환 / 한겨레21 전 편집장 · 콘텐츠 큐레이터>

(한겨레21 2004-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