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문화의 왕국’, 신라

비단길 따라온 로마
로마를 넘어선 신라

어느 외국 학자는 상당한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면서 3국 시대의 신라는 ‘로마문화의 왕국’이라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 근거는 한마디로, 동아시아에서는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신라에 로마문화가 넓고 깊게 스며들었다는 점에 있다. 사실 지금까지는 신라문화가 북방 대륙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데다가 남방 해양문화가 가미되어 발달해 왔다는 것이 국내외 학계의 통설이었다. 간혹 서역이나 로마계통에 속하는 유물 몇 점을 놓고 이러저러한 논의가 있었지만, 대부분은 단편적이었다. 이 외국 학자는 30년의 연구 끝에 펴는 자신의 논지가 지금까지의 통설에 ‘하나의 바람구멍을 뚫는’ 파격적인 논지가 될 것이라고 누누히 설파한다.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주저되지만, 일리는 있다. 한반도 동남부 일각에서 일찌기 꽃핀 가야문화를 포용한 신라문화에는 상층문화건 기층문화건 할 것 없이 곳곳에서 로마문화의 흔적이 또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한 흔적은 4세기부터 6세기까지의 신라 고분 유적과 유물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아직은 비교문화적인 연구가 미흡하기 때문에 확연하지는 않지만, 소재와 형식, 기법 등을 감안하면, 대체로 로마문화와 공유성를 갖고 있는 것과 로마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 그리고 그것을 창조적으로 발전시킨 것 등 세가지 내용으로 대별할 수 있다. 이것은 신라문화 특유의 국제성과 진취성, 독창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신라문화와 로마문화의 공유성을 입증하는 대표적인 유물로는 나무가지를 형상화한 수목형 금제 관식을 들 수 있다. 세계적으로 이러한 관식을 단 고대 금관은 합해서 10점밖에 안되는데, 그 중 7점이 가야(1점)와 신라의 것이다. 나머지 3점은 알타이 지방과 아프가니스탄에서 출토된 것이다. 유럽에서는 아직 고대의 것은 발견된 예가 없지만, 중세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관식이 유행해온 것만은 사실이다. 원래 성수(聖樹) 숭배는 스키타이를 비롯한 북방 유목민족들의 전통사상으로서, 그것이 그리스를 비롯한 서양에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 신화에서는 숲의 여신인 디아나가 숭배 대상이 되고, 이를 계기로 성수사상이 보편화되었다. 기원 전후 황금의 성산지 알타이 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유라시아 북방 초원지대에 찬란한 황금문화시대가 열리면서 이들 유목민족들의 이동에 의해 수목형 관식을 갖춘 금관이 동서 여러 곳에서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관식은 당대 중국이나 일본 유물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은 물론, 고구려나 백제의 유물에서도 극히 드물다. 신라문화의 국제성과 독창성이 돋보이는 일례인 셈이다.

나무모양 금제관식
미소짓는 상감옥 유리목걸이
다채양식 황금장식 보검은
신라-로마교류를 웅변하고
팔찌·반지등 장신구는
단순유입을 넘어
독자적 발전을 꾀하는데‥
숨죽여 보라.
4~6세기 숨가쁜 문명의 질 수

신라의 유물 중에는 교류를 통해 로마문화를 고스란히 그대로 수용한 것들도 다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각종 유리제품이다. 지금까지 출토된 유리용기류는 총 80여 점에 달하는데, 그 중 출토지가 분명한 22점은 모두가 9기의 신라 고분에서 나왔으며, 그 소재나 제조기법, 장식무늬, 색깔 등으로 보아 거개가 후기 로만유리계에 속하는 것들이다. 특이한 유물로는 미추왕릉지구에서 발굴된 유명한 ‘미소짓는 상감옥’ 목걸이가 있다. 지름이 1.8cm밖에 안되는 이 작은 상감옥 속에는 정후면에 모두 6명(그 중 2명은 왕과 왕비로 추정)의 인물과 6마리의 백조, 2개의 나무가지 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이 작은 유리구슬 속에 이렇게 많은 조형물을 그토록 정교하게 상감하여 장식한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인물은 피부가 희고 눈이 동그라며 눈썹이 맞닿아 있다. 또 콧날이 오뚝하고 얼굴이 길며 목걸이를 하고 있다. 한마디로, 백조가 사는 북방계 백인종(아리안)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형질적 특징과 생활환경을 고려할 때, 인물들은 로마 식민지였던 흑해 부근의 어는 한 곳에 사는 민족으로 짐작된다. 로마세계에서는 1세기께부터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모자이크무늬의 상감옥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것이 중국에는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멀리 신라까지 동전하였으니, 언필칭 ‘기행(奇行)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로마세계에서 유입된 것으로 추측되는 유물 중에는 장식보검이란 특이한 단검이 하나 있다. 미추왕릉지구의 계림로 14호분에서 출토된 길이 36cm의 황금장식보검(일명 계림로단검)이 바로 그것인데, 칼자루는 반타원형이고 칼집은 끝이 넓으며 표면은 금알갱이와 옥으로 상감하는 등 이른바 다채장식 양식(필리그리기법)으로 꾸몄다. 이렇게 정교하고 화려한 다채장식 양식의 검은 동아시아에서는 유일무이하거니와 유사품도 카자흐스탄의 보로보에와 이탈리아의 랑고바르트족 묘에서 출토된 단검, 그리고 일본 텐리대 참고관에 소장된 이란계 단검말고는 별로 발견된 예가 없는 아주 희귀한 보검(보물 635호)이다. 이 단검의 원류를 놓고 전래설과 창작설의 두 가지 설이 있는데, 누금상감의 양식기법이나 표면에 있는 나선무늬와 메달무늬 등 전형적인 그리스-로마무늬를 고려할 때, 로마나 그 문화의 영향을 받은 곳으로부터 전래(선물이나 교역품)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전래건 창작이건 간에 이 보검이야말로 신라의 위상이나 교류상을 실증하는 귀중한 보물이다.

가야와 신라의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 중에는 손잡이 달린 토기잔이나 용기류가 적지 않은데, 이것은 분명히 로마세계로부터 들여온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을 비롯한 중국이나 일본 등 동양문명권에서는 잔이나 용기에 손잡이를 달지 않는 것이 고금의 관행이지만, 로마를 비롯한 유럽에서는 손잡이를 붙이는 것이 전통이다. 이런 것이 바로 문명간의 이질적 요소로서 교류의 증좌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나 백제의 유물에서는 이러한 종류의 용기가 거의 발견되지 않아서 신라문화만이 갖는 ‘로마문화성’을 증언하고 있다.

신라인들은 로마문화를 단순히 일회적으로 수용만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신들의 생활정서나 환경에 걸맞게 변용하고 발전시킴으로써 신라문화를 한층 아름답게 꽃피웠다. 여러 고분에서 다량으로 출토된 귀고리와 팔찌, 반지, 목걸이, 허리띠 등 각종 장신구와 금은제품은 신라와 로마가 공유한 또하나의 황금문화다. 하지만 신라인들은 그것을 통째로 삼킨 것이 아니라, 창조적으로 받아들여 활용했던 것이다. 원래 귀고리와 반지, 팔찌, 목걸이 같은 장신구는 그리스-로마문화에서는 필수적이나, 동아시아문명권에서는 거의 관심 밖에 있었다. 그래서 로마의 누금감옥기법으로 만들어진 이러한 세공장식품들이 당대 중국이나 일본 유물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고구려에도 별반 없으며, 백제는 신라와 관계가 좋을 때의 유물에서만 약간 나온다. 그러나 신라의 경우는 천마총에서 출토된 금반지에서 보이다시피, 모양은 대체로 로마 금반지의 기본형식인 마름모꼴을 취하나, 자신들의 취향에 맞게 여러 가지 모양으로 변형시키고 있다. 같은 고분에서 출토된 허리띠와 띠드리개(국보 190호)는 로마나 시베리아에서 유사품이 발견되기는 했은나, 훨씬 화려하고 개성 있게 꾸며졌다.

가야나 신라 고분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디자인의 뿔잔(일명 각배)은 중국이나 일본은 물론, 이웃인 고구려나 백제에서도 유사품이 발견되지 않아, 학계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원래 짐승의 뿔로 만든 이 잔은 스키타이를 비롯한 유목민족들이 술잔으로 쓰던 것을 로마인들이 받아들여 가일층 발전시켰다. 로마세계에서는 그리스신화의 영향을 받아 다양한 소재를 이용해 잔 끝에 여성상이나 짐승상 같은 것을 장식한 뿔잔을 만들어냈다. 그리스신화에서 짐승의 뿔은 ‘코르누코피아’, 즉 ‘풍요’를 상징함으로써 뿔잔은 행복을 가져다주는 ‘풍요의 잔’으로 숭상하게 되었다. 아마 이러한 상징성 때문에 가야나 신라는 이를 적극 받아들여 주로 토기로 다양한 형태와 크기의 뿔잔을 만들어낸 것으로 판단된다.

이렇게 신라문화는 전통문화의 기반 위에서 북방 대륙문화와 남방 해양문화, 거기에다 로마문화까지 수용하여 융합시킨 하나의 다원적 복합문화라고 말할 수 있다. 4~6세기 사이에 신라와 로마 사이에 이렇듯 상상을 초월한 만남이 있었던 것은 당시 동서문명교류의 큰 흐름의 소산이었다. 기원후 로마는 전성기를 맞아 남해로를 통해 동방 원거리무역을 극동까지 확대하였으며, 흉노와 북위 등 유목민족 국가들은 북방 초원로를 통해 멀리 서역과 교류하고 있었다. 이러한 교류의 통로, 즉 실크로드는 신라와 로마를 연결하는 유대고리였다. 그러다가 5세기 중엽에 로마제국이 망하고, 말엽에는 중계역할을 하던 북위마저 수도를 초원로의 길목에서 내지로 옮김에 따라 유대의 고리는 끊기고 문화의 한 공급원이 고갈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6세기 전반 법흥왕은 문물제도의 중국화를 꾀하며 중국에 얼굴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신라인들의 진취성은 이에 찌들지 않고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 서역과의 활발한 교류로 재현되고 계승되었다.

<정수일 교수>

(한겨레신문 2004-11-8)

파도처럼 밀려온 서역문물

서역문물 얼마나 넘쳐났기에‥
신라왕 “외래 사치품 엄금”

서아시아산 침향
버선·고름에 쓴 고급모직
공작새 꼬리와 비취새 털
공후, 횡적, 당비파
새 두마리 새긴 석조유물
말사료인 귀화식물 목숙
그리고 사자춤까지
그런데 그것이 사치였을까
신라인의 지혜는 겨레정서에 맞게
외래문물을 계승·발전시켰으니‥

지금도 우리는 심심찮게 민속축제 마당에서 사자의 탈을 쓰고 두 패로 나뉘어 굿거리장단에 맞춰 꼬리를 휘저으며 덩실덩실 춤을 추는 흥겹고 익살스러운 장면을 목격한다. 탈을 쓰고 추는 춤이라고는 하지만, 사자가 없는 이 땅에 과연 어떻게 사자춤이 생겨났을까. 그것도 천 몇 백 년 동안을 내려오면서 굳어질 대로 굳어진 우리의 한 민속놀이로 줄곧 이어져왔으니 말이다. 그 해답은 통일신라시대에 서역이란 새로운 세계와의 대면에서 찾게 된다.

6세기를 기해 일단 로마 문화의 영향이 시들해지자, 대신 서역문화가 한반도에 파도처럼 밀려오기 시작한다. 과정이야 어떻든 간에 3국이란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 한반도에 통일제국을 세운 신라인들에게는 새로운 문명세계와의 만남이었다. 이제 우리 겨레는 여명기를 벗어나 바야흐로 전개기에 접어든 동서문명교류의 큰 흐름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 첫 물결이 바로 중국이란 ‘큰 호수’를 사이에 둔 서역과의 교류였다.

서역이란 원래 중국인들이 막연하게 중국의 서쪽 지역을 가리키는 말로서 우리를 포함해 한자문명권에서는 근세에 이르기까지 줄곧 사용되어 왔다. 서역이란 정식 명칭은 기원전 60년 전한이 타림분지 중앙부에 서역도호부를 설치하면서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였는데, 당시는 주로 오늘의 신장·위구르자치주 영내의 수십 개 나라들이 포함되었다. 이것이 좁은 의미의 서역이다. 그러나 한대 이후 중국의 대외교섭과 교류가 점차 확대됨에 따라 서역의 포괄 범위가 서쪽으로 더 넓어져서 7세기 당대에 이르러서는 중앙아시아와 인도뿐만 아니라, 멀리 페르시아(이란)와 대식(아랍)까지를 망라하였다. 이것이 넓은 의미의 서역으로서 근세까지의 개념이다. 통일신라가 상대한 서역은 넓은 의미의 서역으로서, 지역이 광대하고 민족이나 문화도 다양하여 교류의 폭도 그만큼 넓었다.

문호개방적인 대외정책을 추구한 당나라는 서역문물을 수용하는 데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그리하여 수도 장안은 서역문물의 집산지와 중계지 역할을 하였다. 당시 당과 밀접한 관계에 있던 신라가 조공사나 구법승, 유학생 등 내왕자들을 통해 서역문물을 간접적으로 수용하였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통설이다. 그러나 당시 대식인들의 기록에 의하면 그들이 직접 신라에 오가면서 교역도 하고 심지어 신라땅에 정착까지 하였다고 하니, 서역과의 교류는 중국을 통해서만 아니라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서도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그 숱한 서역문물들이 신라에 밀려올 수가 없었을 것이다.

태평성대를 구가하던 신라인들의 서역문물에 대한 호기심은 대단하였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귀족 사대부들은 물론, 일반인들까지도 앞을 다투어 서역에서 들어온 호화품들을 장만하고 남용함으로써 사회적으로 무분별한 사치풍조까지 일고 있었다. 그리하여 일찍이 지위 고하에 따라 서역문물을 사용하는 데 대한 세칙까지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제대로 지켜지지 않자, 흥덕왕은 834년 사치를 금하는 칙령을 내렸는데, 그 서문에서 일부 호화를 일삼는 사람들이 외래품만을 선호하고 국산품을 혐오하는 방자한 작태를 꾸짖으면서 사용금지세칙을 위반하는 자는 국법으로 다스리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도대체 어떤 물건들이 어떻게 쓰여졌기에 왕이 나서서 이러한 칙령까지 내렸을까. 우선은 각종 향료다. 금령에 따르면 진골은 타고 다니는 수레에, 육두품에서 백성까지는 가마와 침상에 향료인 동남아시아산 자단과 서아시아산 침향을 쓸 수 없도록 했다. 외래 향료로는 그밖에 1966년 경주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된 아랍산 유향도 있다. 신라인들은 서역에서 들여온 침향 같은 향료를 일본에 재수출하는 지혜도 발휘했다.

금령에는 진골녀의 빗과 관을, 육두품녀의 빗을 슬슬(瑟瑟)로 꾸미는 것을 금한다고 했다. 슬슬은 투명하고 푸른색의 귀중한 보석인데, 8세기 중엽 고구려 후예인 고선지 장군이 7만 당군을 이끌고 그 유명한 탈라스 전쟁을 치르면서 원산지인 석국(현 중앙아시아 타슈켄트)에서 10여 석을 노획한 것이 동아시아에 전해진 첫 슬슬이다. 이래저래 슬슬은 우리의 민족사와 연을 맺고 있는 진귀한 보석이다. 이러한 보석으로 빗을 장식하는 것을 금했다고 하니, 당시 이 보석에 대한 신라인들의 소유욕과 애착심이 얼마나 강했는가를 말해준다.

생활의 구석구석까지 파고든 서역문물들도 적지 않다. 육두품에서 백성에 이르기까지 서역산 고급모직 옷감인 ‘계’는 여인들의 바지나 버선, 신, 목수건, 옷고름에 장식하는 것을 금하였다. 목수건이나 버선 같이 수요가 적은 부분에까지 계의 사용을 금지시킨 것으로 보아, 그것은 필히 귀중한 물품이었음에 틀림없다. 인도를 비롯한 서남아시아에서 나는 공작새 꼬리와 진랍국(현 캄보디아) 특산인 비취새 털을 목수건 같은 장신구에 수놓을 수 없게 하였으니, 신라인들의 사치성이 엿보이기도 하지만, 수용성이 더욱 돋보인다.

이렇게 신라인들이 폭넓게 서역문물을 받아들인 세태는 기록으로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유물로도 남아 있어 그 실상을 여실히 입증해주고 있다. 약 70년 전 경주에서 발견되어 지금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른바 ‘입수쌍조문석조유물’이 바로 그 일례다. 나무를 한가운데 두고 두 마리 새가 마주하고 있는 석조유물이라고 하여 이름이 붙여진 이 유물과 더불어 비슷한 무늬를 가진 직경 2.5cm의 ‘화수대금문금구’(꽃나무를 사이에 두고 날짐승이 마주보고 있는 무늬의 금제 기구)도 1966년 경주 황용사 목탑지사리구멍 속에서 발견되었다. 이 두 유물의 공통적인 무늬는 평면이 원형이고, 중앙에 나무를 배치하고 좌우에 날짐승을 대칭시키며, 원 밖에 옥을 두른 연주대가 있는 것인데, 이것은 대표적인 사산(이란)계 무늬로서, 신라가 그 새김기법을 도입한 것이다.

이렇게 세월의 풍상 속에서도 별로 변하지 않는 무언의 석조나 금제 유물이 있는가 하면, 비록 변모되어 거의 잊혀져 가는 사이에도 애잔하고 아름답게 그 긴 만남의 역사를 수놓는 들꽃도 있다. 목숙(일명 거여목 혹은 개자리)에서 피어나는 들꽃이 바로 그것이다. 콩과에 속하는 두해살이풀인 목숙이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귀화식물이 되어 키가 겨우 30~60cm 밖에 안 되는 야생초로 퇴화되었다. 한여름에서 초가을 사이에 누른빛 나비형 꽃이 피는 이 들풀의 부드러운 잎은 담백한 미각과 풍부한 단백질을 포함하고 있어 외국에서는 소채로서 애용되며 해독제 같은 약으로도 쓰이고 있다. 본시 목숙은 남러시아의 코카서스 산맥 동남일대에서 말의 사료로 재배되어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알려졌으며, 그것이 다시 아랍에 전해진 후에는 아랍 준마의 사료로 명성을 떨쳤다.

그러던 목숙이 중국 전한 때, 서역에 사신으로 파견된 장건이 가지고 돌아와서 말의 사료로 곳곳에 재배하면서 동방에 처음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것이 수백 년을 지나 국력의 신장과 목축업의 발전을 꾀하던 신라인들의 의욕을 자극하기에 이른다. 신라는 전국 4곳에 ‘목숙전’이라는 관변기구를 설치하고 전담 관료와 기록책임자까지 두어 목숙의 재배와 관리를 전담하게 하였다. 이 양마의 사료이자 약용식물인 목숙은 한국에서 일본으로 전해져서 지금까지도 ‘우마고야시’(馬肥: 말을 살찌게하는 것)란 이름으로 약재에 쓰이고 있다.

목숙과 더불어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는 몇 가지 악기나 잡기(놀이)에서도 유입된 서역문물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삼국사기>를 비롯한 사서기록과 상원사 동종 등의 유물에서 보다시피, 주로 신라 중대 이후에 고구려가 수용한 것을 재수용하였거나,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서역계 악기로는 피리, 횡적, 소, 박판, 요고, 동발, 당비파, 공후 등 8종의 호악(서역악)이 있었는데, 그중 일부는 약간의 변용을 거쳐 지금까지 전승되고 있다. 그런가 하면 가면무나 땅재주 같은 몇 가지 놀이도 신라 때 서역으로부터 들어와 우리의 전통놀이문화로 자리를 굳혔다. 9세기 중엽 문호 최치원이 저술한 <향악잡영오수>를 보면, 금칠한 공을 공중에 던졌다가 받는 ‘금환(金丸)’이나, 가면무로 술잔을 들고 겨끔내기를 하면서 추는 ‘월전(月顚)’과 역신을 구축하는 ‘대면(大面)’, 이색적인 무인들이 봉황춤을 추는 ‘속독(束毒)’, 그리고 ‘산예’, 즉 사자춤은 모두가 신라 때 쿠차나 호탄, 소그디아나 등 서역지방에서 들어온 잡기들이다. 그중 산예는 지금까지도 ‘북청사자놀이’와 ‘봉산탈춤’, ‘통영오광대’ 등 사자춤으로 전승되고 있다.

외래문물은 잘 활용하면 자양분이 되나, 자칫 남용하면 위해물이 된다. 흥덕왕의 칙령에서 보다시피, 신라인들은 국산품을 귀히 여기면서 서역문물을 호사가 아닌 수요를 위해 받아들였으며, 겨레의 정서에 걸맞은 전통문화로 굳혀서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전해주고 있다.

<정수일 교수>

(한겨레신문 2004-1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