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출신 북위(北魏) 황태후 묘지 확인

고구려 출신 북위 문소황태후 고조용 묘지명

문소황태후와 그 일가족, 민경삼 교수 공개

13살에 부모를 따라 선비족 탁발부가 세운 왕조 인 북위(北魏.386-534)에 들어가 후궁을 거쳐 황태후 지위까지 오른 고구려 출신 문소황태후(文昭皇太后) 고조용(高照容.469-519) 묘지명(墓誌銘)이 중국에서 확인됐다.

그의 딸과 사위이자 조카, 또 다른 조카 묘지명도 아울러 밝혀졌으며, 이외에도 주로 북위 왕조에서 활약한 고구려 혹은 요동(遼東) 출신자나 그 후예 9명의 묘지명도 아울러 공개됐다.

충남 천안 소재 백석대학 중국어과 민경삼(閔庚三. 37) 교수는 중국 역대왕조 도읍인 뤄양(洛陽)과 시안(西安) 일대 출토 고대 묘지명을 조사한 결과 현재까지 100여 점을 헤아리는 고대 한인(韓人) 계통 사람들의 묘지명을 확인했다고 7일 말했다.

이 중 북위 고조(高祖) 효문제(孝文帝. 재위 471-499년)인 원굉(元宏)의 귀인(貴人ㆍ후궁의 한 등급)이 되었다가, 그의 아들인 원각(元恪)이 제위를 이어 세종(世宗) 선무제(宣武帝ㆍ재위 500-515년)가 되자 황태후(皇太后)에 책봉된 문소황태후와 그 일가족 묘지명은 특히 관심을 끌고 있다.

문소태후 묘지명은 출토 장소와 시기가 정확하지 않은 가운데 `낙양출토역대묘 지집승'(洛陽出土歷代墓誌輯繩)이라는 묘지명 탁본집에서 그 존재가 확인됐다.

이 묘지명(59.5 x 49.5cm)은 일부 훼손됐으나, `魏文昭皇太后山陵誌銘幷序'(위 문소황태후산릉묘지명병서)라는 제목 아래 대략 20여 행에 20여 글자가 확인된다.

여기에는 묘주(墓主)인 문소황태후 고조용에 대해 `기주 발해 수인'(冀州 渤海蓚人) 출신으로 효무제의 귀인(貴人)이었다가 뒤에 아들이 즉위하자 황태후로 책봉 되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문소황태후는 `위서'(魏書)나 `자치통감'(資治通鑑) 등의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 계통인 아버지 고양(高양<風+易>)과 어머니 개씨(蓋氏) 사이에서 난 4남3녀 중 가운데 딸로서, 13살(482년) 이전에 가족을 따라 '발해'에서 북위로 왔다가 황제의 어머 니 눈에 들어 후궁이 되었다.

또 기존 문헌 기록에 의하면 문소황태후는 작은오빠인 고언(高偃)의 딸을 아들인 선무제(宣武帝)의 비로 들이는 한편 큰오빠인 고곤(高琨)의 아들 고맹(高猛)은 역시 자기 소생인 장락장공주(長樂長公主) 원영(元瑛)과 혼인케 했다.

민경삼 교수는 문소황태후 외에 그 일가족인 원영과 고맹, 작은오빠 고언의 아들인 고정(高貞)의 묘지명도 확인했다.

이 외에도 민 교수는 중국 산시(陝西)성박물관(일명 시안비림<西安碑林>) 소장 `원앙칠지재장석'(鴛鴦七誌齋藏石)이라는 묘지명 탁본집에서 고구려 출신 혹은 그 후예로 간주되는 한인(韓人) 9명의 묘지명도 찾아냈다.

이들은 대체로 6-7세기 중국에서 활동한 동이족(東夷族) 출신으로, 각각 실명이 ▲왕정(王禎) ▲왕기(王基) ▲부인왕씨(夫人王氏) ▲이거란(李渠蘭) ▲공손의(公孫 의<개견 변에 奇>) ▲공손략(公孫略) ▲고승호(高僧護) ▲고규(高규<糾에서 실사 변 대신 벌레 충 변>)이다.

백 교수는 "묘지명은 중국과 고구려 사이의 교류나 이민에 관한 실상을 전해주고, 문헌기록에서 탈락한 정보를 보충하고 있다"면서 "중국에는 이런 묘지명이 수없이 많은 만큼 이에 대한 꾸준한 조사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북위 왕실 뒤흔든 고구려계 발해고씨 가문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를 통해 널리 알려져 있듯이 한(漢) 제국의 진정한 후계자는 조조의 위(魏)나, 유비의 촉 (蜀), 손권의 오(吳)가 아니라, 사마씨(司馬氏)의 진(晉)이었다.

사마씨는 위(魏) 왕조에서 사마의(司馬懿)가 권력을 농단하다가 그의 손자 사마 염(司馬炎)에 이르러 마침내 위 왕실을 찬탈하고 진(晉)을 건국했으나 극심한 왕위 쟁탈전과 유목민의 발호를 견디지 못하고 불과 반세기 만인 서기 316년 허무한 종말 을 맞는다. 그 일족이 강남으로 쫓겨 내려가 이듬해 건업(建業ㆍ난징<南京>)에서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니 이를 동진(東晋)이라 해서 서진(西晉)과 구분한다.

서진 말기에 발발한 서진 왕조 내부의 왕위쟁탈전은 황위(皇位) 계승권이 서로 자기에게 있다고 주장하는 8제후왕이 관련되었다고 해서 '8왕의 난'(八王之亂)이라 부른다.

이 와중에 5호(五胡)라고 일컫는 유목민족 집단이 북중국으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들이닥치기 시작함으로써 5호16국(五胡十六國) 시대가 개막되니, 역사에서는 이들 이민족 침입이 시작된 당시 연호를 따서 이를 `영가(永嘉)의 난(亂)'이라고 한다.

서진 말기의 이러한 극심한 정치적 혼란은 대규모 주민 이동을 유발한다. 중국 주변 각지에서 이민족이 물밀듯이 밀려왔던 것처럼, 중원 일대에 살고 있던 많은 이는 다른 곳으로 유리(流離)하게 된다.

이 와중에 `망명지'로 고구려를 택한 사람도 빈출했으니, 고고(高顧)-고무(高撫) 형제도 여기에 속했다. 이들 형제가 정확히 언제 가문의 세거(世居) 기반인 발해군을 떠나 고구려로 향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고고의 5세손으로 북위(北魏) 왕실에서 막강 권력을 휘두르게 되는 고조( 高肇)의 일생을 정리한 `북사'(北史) 권 제86에 수록된 고조 열전에는 고고가 영가 의 난을 피해 고구려로 들어갔다고 쓰여 있다.

고구려 망명 이후 고고-고무 형제와 그 후손들의 행적은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발해고씨(渤海高氏)라고 일컫는 이 가문이 다시 중국사에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150 년 가량이 지난 뒤인 북위 효문제(孝文帝ㆍ재위 471-499년) 시대 무렵이다.

고구려에 정착한 고고 가문 4세손이 고양(高양<風+易>). 그는 개씨(蓋氏)라는 여인에게서 4남3녀를 낳았는데 효문제 제위 시대 어느 무렵에 일가족을 거느리고 북위로 돌아온다.

고양-개씨 소생 4남3녀 중 뚜렷한 종적을 남긴 이를 순서대로 보면, 아들로는 맏이 고곤(高琨)과 그 동생 고언(高偃), 그 아래로 고조(高肇)가 있다.

이들 형제자매 중 특히 주목을 요하는 인물이 고조의 동생인 고조용(高照容ㆍ46 9-519)이라는 딸이다. 그는 효문제(孝文帝)의 귀인(貴人ㆍ후궁의 한 등급)으로, 그가 낳은 원각(元恪)이 효문제에 이어 선무제(宣武帝ㆍ재위 500-515년)로 즉위함으로 써 황태후(皇太后)에 책봉됐다.

각종 문헌기록에는 고조용이 효문제 재위 생전에 정비인 황후(皇后)로 책봉된 것처럼 기록돼 있으나, 백석대학 민경삼 교수가 최근 발굴한 고조용 묘지명에 의하면, 후궁의 일종인 귀인에서 황후를 거치지 않고 일약 황태후가 됐음이 밝혀졌다.

기록에 의하면, 고조용이 권력의 정점을 이룩한 고씨 가문은 이중-삼중으로 연결된 혼인망으로 당시 북위 권력을 농단했음이 드러난다. 이들 고씨 가문의 혼인 관계에서 특히 주목을 요하는 대목은 극심한 근친혼으로 얽혀 있다는 사실이다.

즉, 문소황태후 소생인 선무제는 어머니의 작은오빠인 고언(高偃)의 딸을 정비로 맞아들였으며, 문소태후 큰오빠인 고곤(高琨)의 아들 고맹(高猛)은 문소태후 소생인 장락장공주(長樂長公主) 원영(元瑛)과 혼인했다. 모두 사촌간 근친혼이다.

고씨가문의 위력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앞서 `영가의 난' 와중에 고고와 함께 고구려로 망명한 형제로 고무(高撫)가 있다고 했거니와, 그의 후손 또한 나중에 북위 왕조로 들어와 가문이 영달한다.

고무의 증손자가 고숭(高崇)인데 그의 일생이 `북사'에 열전(권77)으로 따로 독립돼 있다는 사실이 이미 고숭의 막강한 위상이 감지케 한다. 고숭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으니 겸지(謙之)ㆍ공지(恭之)ㆍ근지(謹之)ㆍ신지(愼之)가 그들이다. 이 중 고공 지(高恭之) 또한 아버지 고숭처럼 `북사' 권 제50에 별도의 열전이 마련돼 있다.

원래 출신은 발해만 연안이지만, 고구려로 망명한 지 4-5세가 흐른 뒤에 다시 고향으로 복귀한 이들 발해고씨는 그들이 중국인인가, 고구려인인가 하는 양자택일의 국적(國籍) 구분으로 역사를 따질 수 없음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럼에도 이들 가문에 고구려의 혈통이나 전통이 짙게 스며 있다는 사실 또한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기자 후손 자처한 낙랑 출신인의 묘지명

백석대학 중국어과 민경삼(閔庚三.37) 교수가 고구려 출신 북위(北魏) 문소황태후(文昭皇太后)와 그 일가족 묘지명(墓誌銘)과 함께 공개한 발해인(渤海人), 낙랑인(樂浪人) 혹은 요동인(遼東人) 9명의 묘지명은 문소황태후와는 또 다른 각도에서 많은 관심을 끈다.

5-7세기 무렵을 살다가 간 이들의 출신지로 묘지명이 거론하고 있는 발해(渤海) ㆍ낙랑(樂浪)ㆍ요동(遼東)이 고구려와 무관하지 않게 보이는 데다, 한결같이 씨족 계보의 시작점을 기자(箕子)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기자는 공자가 미자(微子), 비간(比干)과 함께 은(殷)나라 마지막왕이자 폭군의 대명사인 주왕(紂王)에게도 굴하지 않은 3대 성인으로 거론한 인물(논어 미자 편).

그에 대해 전한 무제 때 역사가 사마천(史馬遷)은 `사기'(史記) 중 송미자세가( 宋微子世家)에서 은을 멸한 주(周) "무왕(武王)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고 신하로 삼지 않았다(武王乃封箕子於朝鮮而不臣也)"라고 하고 있다.

그 역사적 사실성, 특히 그 존재 자체가 의문이 적지 않으나, 어떻든 기자는 조선(朝鮮=고조선)왕에 책봉된 인물로, 동방 민족 사이에서는 후대에 민족이나 씨족 시조로 대대적인 추앙을 받기에 이른다.

한(漢) 무제(武帝)에 의한 위만조선 토벌사를 다루고 있는 `사기' 조선열전 등 의 기록에 의하면, 기자에게 뿌리를 박은 소위 기자조선은 약 40대를 내려온 준왕( 準王) 때까지 장구한 역사를 누리다가 기원전 190년 무렵, 전국 칠웅 중 하나인 연( 燕)나라 유망인 위만(衛滿)에게 멸망했다고 한다.

사마천보다 3-4세기 뒤의 인물인 서진(西晉) 때 역사가 진수(陳壽ㆍ233-297) 찬 역사서 `삼국지'는 `오환선비동이열전' 중 마한(馬韓)ㆍ진한(辰韓)ㆍ변진(弁辰=변한) 의 소위 삼한(三韓)에 대한 기록인 한전(韓傳)에서 `위략'(魏略)이라는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역사서를 인용해 새로운 내용을 덧붙이고 있다.

이에 의하면, 위만에게 쫓겨난 준왕은 무리를 이끌고 마한 땅에 들어가 성을 한(韓)으로 고치고 왕 노릇을 하다가 얼마 뒤에 망하니, 아직도 한인(韓人) 중에는 준 왕을 제사하는 자가 있다고 했다.

이런 기록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때 기자라는 인물과 기자조선이 실재했느냐는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고조선과 삼한(특히 마한)이라는 동이족 역사에서 기자가 차지하는 위치는 막중하다고 할 수 있다.

한데 민 교수는 중국 산시(陝西)성박물관(일명 시안비림<西安碑林>) 소장 `원앙 칠지재장석'(鴛鴦七誌齋藏石)이라는 묘지명 탁본집에서 씨족 조상을 기자에게서 찾는 발해(渤海)ㆍ낙랑(樂浪)ㆍ요동(遼東) 출신 9명의 묘지명을 찾아냈다.

그들은 실명이 각각 ▲왕정(王禎) ▲왕기(王基) ▲부인왕씨(夫人王氏) ▲이거란 (李渠蘭) ▲공손의(公孫의<개견 변에 奇>) ▲공손략(公孫略) ▲고승호(高僧護) ▲고 규(高규<糾에서 실사 변 대신 벌레 충 변>)이다.

이 중 왕정(王禎.465-514)의 묘지명에는 그를 `낙랑 수성인'(樂浪遂城人=낙랑의 수성 사람)이라고 출신지를 거론하는 한편 "은(殷)에는 세 어진 사람이 있었으니, 주(周) 무왕(武王)이 기자(箕子)를 예방하셨네"라는 구절이 보인다.

또 왕정의 아우인 왕기(王基) 묘지명에는 "그 선조는 은(殷)에서 나왔으며, 주 무왕이 상(商=은나라)을 이기고 기자를 조선에 봉하니, 자손이 이를 본떠 성씨를 삼게 되었다(其先出自有殷, 周武王克商, 封箕子於朝鮮, 子孫因而氏焉)"고 쓰여 있다.

이들 묘지명을 공개한 민 교수는 "이들의 출신지로 거론된 발해ㆍ낙랑ㆍ요동이 꼭 고구려나 고조선을 지칭한다고 확신할 수는 없으나, 고구려의 영토였거나 그와 밀접한 지역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고 말했다.

민 교수는 아울러 "이들 지역에서 기원했다고 기록된 고씨(高氏)나, 봉씨(封氏), 혹은 공손씨(公孫氏) 등의 성씨는 묘지명 기록으로 볼 때 옛 한인(韓人)과 일정 부분 연결돼 있을 공산이 크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이들 묘지명 인물의 출신지로 거론된 낙랑ㆍ요동ㆍ발해 등은 그 위치 논란이 분분한 한사군(漢四郡) 중 낙랑군 위치를 판별하는 데도 나름대로 긴요하게 활용될 수 있을 전망이다.

(연합뉴스 / 김태식 기자 2004-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