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주는 책] 한국인의 성전(聖典) '삼국유사'

내가 한국인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명확히 발견한 것은 ‘삼국유사’란 책 한 권을 통해서였다. 고교 시절 자유교양경시대회란 책읽기 대회가 있었고, 그때 ‘삼국유사’와 이중환의 ‘택리지’가 선정되었는데, 나는 그 책 두 권을 최소한 100번 이상 읽고 또 읽었다. 그래서 35년이 지난 지금도 ‘찬기파랑가 설화’ 그러면 당시의 세로줄 쓰기 책 페이지가 눈에 선연하게 떠오른다. 놀랍게도 내가 밑줄 그은 볼펜 자국까지 떠오를 때도 있다.

‘삼국유사’는 내게 있어서 일종의 성전(聖典)이 되었다. 어릴 때는 그냥 외우기만 해서 그 의미를 명확히 몰랐던 부분들이 나이가 들면서 이해되기 시작했고, 급기야 내 상상력의 젖줄이 돼 적용하기 시작했다. 내 시작(詩作)의 교과서는 향가의 언어 조탁미와 이미지였다. 그리고 그 속에 농축되어 있던 정신성이었다. 내가 꾸미는 연극무대의 리듬과 이미지는 전적으로 ‘삼국유사’에서 배어 나오는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의 인식과 정서에 의존한다.

‘삼국유사’의 첫 페이지를 열면 단군왕검 신화가 전개되는데, 그 도도하고 유장한 문체가 먼저 우리를 흥분시킨다.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하강하는 모습을 상상하노라면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는 고구려의 웅혼한 기상이 고조선 설화를 통해 그대로 전해지는 듯하다.

동굴 속에서 100일을 견뎌낸 웅녀의 버팀은 그대로 조선여인의 원형 이미지가 되어 춘향으로 이어지고, 심청으로 변용되고, 최인훈의 현대희곡으로 적용되기도 한다. ‘오늘의 시가 과연 향가의 정신성과 언어미학을 능가하고 있는가?’ 묻는다면 오늘의 시인들은 새삼 착잡한 입장에 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답은 명확해진다. 지금부터라도 젊은이들에게 ‘삼국유사’ 한 권씩 나눠주어서 그 책 속에서 한국인의 길을 찾게 할 일이다. 이 난삽한 국적불명의 21세기에 한국인의 코란(聖典)으로 추천하면서 말이다.

<이윤택·국립극단 예술감독>

(조선일보 2004-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