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운한 이순신 행운아 도고

지금부터 꼭 100년 전인 1904년 일본과 러시아는 동북아의 패권을 놓고 일대 혈전을 벌인 바 있다(러일전쟁). 전력상 일본은 도저히 승리할 수 없었으나 국가가 총력전으로 대응해 ‘2등 국가(일본)’가 ‘1등 국가(러시아)’를 이기는 기적을 창출했다.

이 기적의 한복판에 우뚝 선 인물이 일본 연합함대 사령장관(司令長官)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중장이다. 당시 일본 해군은 1·2 함대(일본식 이름은 戰隊)를 갖고 있었는데, 이를 합쳐 ‘연합함대’를 편성했다. 2개 함대의 최고 지휘관을 ‘사령관’이라 했으니, 연합함대의 최고 지휘관은 ‘사령장관’으로 불렀다(행정부처의 장관과는 이름만 같을 뿐이다).

도고는 여러 가지 면에서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과 대비된다. 그러나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도고는 이순신보다 훨씬 더 높은 지명도를 누리고 있다. 이순신이 세계 최초로 철갑선을 만들고 한 번도 패하지 않은 ‘상승 제독’이라는 점을 아는 해전사가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도고란 이름을 내밀면 “유틀랜드해전, 미드웨이해전과 함께 세계 3대 해전으로 꼽히는 쓰시마(對馬)해전에서 승리한 영웅”이라는 찬사가 따라붙는다.

쓰시마해전 이겨 러일전쟁 승리 발판… 한반도 침탈 계기

유틀랜드해전은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6년 독일의 세르 제독이 99척의 군함으로 편성된 대양함대(High Sea Fleet)를 이끌고 영국 동해안을 공격해오자, 사전 정보수집으로 이를 안 영국이 젤리코 제독으로 하여금 150척으로 구성된 대함대(Grand Fleet)를 끌고 나가 결전을 벌인 해전이다. 이 전투에서 독일 함대는 약간의 우세를 점했으나 영국 공략이라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퇴각했다.

미드웨이해전은 제2차 세계대전 때인 1942년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 대장이 이끄는 일본의 연합함대가 니미츠 대장이 지휘하는 미국의 태평양함대와 맞붙은 사상 최대의 해전이다. 일본의 연합함대는 미드웨이 섬을 점령하기 위해 항모 4척을 포함한 수십 척의 함정을 동원했고, 암호 분석을 통해 일본 해군의 공격 사실을 안 미국 태평양함대도 항모 3척을 포함한 수십 척의 군함으로 응전했다. 이 해전에서 미국은 상당한 피해를 입었으나 미드웨이를 지켜냈고, 일본의 항공모함 4척을 모두 침몰시킴으로써 이후 전세를 역전시키는 발판을 마련했다.

쓰시마해전은 3대 해전 중에서 가장 먼저인 1905년 5월 일본의 연합함대가 쓰시마 동북쪽 동해상에서 로제스트벤스키 중장이 이끄는 러시아의 발틱함대와 정면으로 맞붙어 대승을 거둔 것을 말한다. 해전에서 패한 사령관이나 함장은 대개 배와 함께 ‘수장(水葬)’되는 것을 택하기 때문에 생포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러나 일본은 울릉도 남서쪽 70km의 동해상에서 나포한 러시아 구축함에서, 중상을 입은 채 숨어 있던 로제스트벤스키 중장을 생포하는 쾌거를 올렸다.

유틀랜드와 미드웨이 해전에서 공격자 측은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퇴각했으나 전과 면에서 보면 방어자 측과 호각세를 이루었다. 그러나 쓰시마 해전에서는 방어자 측인 일본 해군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丁’자 모양으로 마주친 양쪽은 곧 대형 함정 12척씩을 나란히 달리게 하며 함포를 쏘는 대혈투를 벌였는데 러시아는 9척이 격침되고, 일본은 단 3척만 침몰했다.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데 이어 적장까지 생포했으니 일본의 자부심은 하늘을 찌를 수밖에 없었다.

러일전쟁 10년 전에 발발한 청일전쟁(1894~95)은 한반도가 중국에서 벗어나 일본의 영향권으로 들어가는 일대 사건이었다. 중국은 당나라 시절인 668년 신라의 내응을 얻어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무려 1200년간 한반도에 영향권을 행사해왔는데, 청일전쟁에 패함으로써 이를 일본에 넘겨주게 되었다. 그런데 경제가 고속 성장을 거듭한 지금 중국은 ‘한반도를 청일전쟁 이전의 상태로 돌려놓겠다’며 동북공정(東北工程) 카드를 내밀고 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반도를 넘어 만주까지 장악하려다 러시아와 독일, 프랑스로부터 방해를 받아 ‘삼켰던’ 요동반도를 토해놓게 되었다(3국간섭). 일본이 빠져나간 틈을 재빨리 치고 들어온 것은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상당수의 육군과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동양함대(태평양함대의 전신)의 주력을 뤼순(旅順)항으로 옮겼다. 그러자 그동안 일본의 위세에 눌려 있던 조선이 급속히 러시아 쪽으로 기울어졌다.

임진왜란이 낳은 영웅 이순신의 삶과 대비

일본으로서는 청일전쟁으로 얻은 성과를 날려버리게 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일본은 정교한 계획을 세웠다. 러시아와 일전을 벌인다면 이는 해전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고 보고, 훗날 ‘일본 해군의 아버지’라는 별칭을 얻은 야마모토 콘노효에(山本權兵衛) 해군대신을 중심으로 ‘해군확장 10년 계획’을 작성한 것. 그리고 한 해 정부 예산보다 많은 돈을 써가며 영국 등지에서 대형 전함을 수입하고, ‘언제나 운(運) 좋은 사람이었다’란 도고 헤이하치로를 연합함대 사령장관에 임명했다.

1904년 2월8일 일본은 도고의 연합함대로 하여금 뤼순항의 동양함대를 기습 공격케 함으로써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뤼순항을 포위한 연합함대는 항 외곽에 기뢰를 설치해 동양함대가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봉쇄했다. 졸지에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된 동양함대는 여러 차례 돌파를 시도하는데, 이 과정에서 동양함대 사령관인 마가로프 중장이 탄 배가 기뢰에 부딪혀 침몰해 마가로프 사령관이 사망했다.

그해 8월 견디다 못한 동양함대는 블라디보스토크 항을 향한 뤼순항 대탈출을 시도해 일부는 기뢰와 충돌하고 상당수는 서해로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연합함대는 끝까지 추적해 대부분의 동양함대를 궤멸시켰다(황해해전). 연합함대가 동양함대를 격멸하자 노기 마레스케(乃木) 중장이 이끄는 일본 육군도 뤼순 지역의 러시아 육군을 공략해 항복을 받아냈다.

황해해전에서 승리한 연합함대는 곧바로 조선의 진해만에 들어가 아프리카를 돌아 달려오는 발틱함대와의 일전을 위한 강도 높은 훈련을 거듭하다 이듬해 5월 쓰시마해전에서 대승리를 거둔 것이다.

이순신은 두 번이나 백의종군하며 힘겹게 운명을 개척했으나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서 유탄에 맞아 서거했다. 그러나 도고는 쓰시마해전에서 살아남아 대장을 거쳐 원수로 진급해 86살까지 천수를 누려, 다시 한번 ‘운 좋은 사람’임을 보여주었다. 이순신의 불운과 도고의 행운은 그 후 조선과 일본의 운명을 알려주는 전조였을까.

목하 일본에서는 ‘운 좋은’ 도고를 재평가하고 러일전쟁 전승 100주년을 자축하려는 준비가 한창이었다. 러일전쟁 때 도고 중장이 탔던 기함 미카사(三笠)함이 있는 요코스카에서는 도처에 러일전쟁 100주년을 알리는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도 러일전쟁 100주년을 거론하는 사람이 많았다는 점이다.

러일전쟁 후 조선은 돌이킬 수 없는 일본의 영향권으로 빨려 들어갔다.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케 한다는 계책을 품고 있었던 이완용은 그후 친러 노선을 접고 한일합방에 조인하는 친일노선을 선택했는데, 그의 변절은 이후 한반도에 수많은 친일파가 탄생하는 실마리가 되었다.

러일전쟁 100주년인 지금 한국에서는 친일파를 단죄하려는 과거사 청산 작업이 한창이다. 그러나 친일파를 색출하기에 앞서 우리의 운명을 가른 러일전쟁의 배경부터 분석해야 하지 않을까. 러시아의 1인당 GDP(국내총생산)가 2000달러밖에 되지 않지만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난 러시아의 역사학자들은 세계를 경영한 대국의 학자답게 러일전쟁의 패전을 객관적으로 설명해내고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난 한 한국인은 “3국간섭으로 후퇴한 일본이 객관적으로 국제정세를 분석한 후 절치부심하며 국력을 키워 러시아를 이겼듯이, 지금의 한국도 냉철하게 주변정세를 분석해 통일과 번영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한다. 한국은 한가롭게 과거사 청산을 할 시간이 없다”고 충고했다.

(주간동아 2004-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