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 [ 古朝鮮 ]

한국 최초의 국가(國家). 요하(遼河)와 대동강(大同江) 유역에 있었던 고조선은 청동기시대에 국가로 형성되었으며, 한(漢)의 침입으로 말미암아 BC 108년에 멸망하였다. [역사-성립] 고조선은 BC 2333년 단군왕검(檀君王儉)에 의해 세워졌으며, 단군은 고조선의 정치적 지배자였다.

한국 최초의 국가(國家). 요하(遼河)와 대동강(大同江) 유역에 있었던 고조선은 청동기시대에 국가로 형성되었으며, 한(漢)의 침입으로 말미암아 BC 108년에 멸망하였다.

[ 역사-성립 ]

고조선은 BC 2333년 단군왕검(檀君王儉)에 의해 세워졌으며, 단군은 고조선의 정치적 지배자였다. 단군신화에 의하면, 단군은 제정일치시대(祭政一致時代)의 군장(君長)이었고, 이러한 군장들이 하느님의 자손임을 주장하면서 한 시대의 사회를 이끌어 온 지도이념으로서의 원시종교가 성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단군은 1908세의 수(壽)를 누린 끝에 아사달(阿斯達)에 숨어 산신(山神)이 되었다고 하는 고조선의 건국신화가 성립되었다. 그런데 주(周) 초기 은(殷)나라 사람 기자가 조선을 다스렸다는 내용의 전승은 고려 중기의 《삼국유사(三國遺事)》 《제왕운기(帝王韻記)》를 비롯한 고래의 문헌에서 오랫동안 계승되었다. 즉 은나라가 망할 때 기자가 망명하여 기자조선을 세웠다는 견해가 있는데 기자조선은 대개 북중국의 난하유역에서 평양(平壤)으로 이동하였거나 요하 서쪽의 대릉하유역(大凌河流域)에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와 같이 단군신화와 고조선에 대한 연구는 저마다 다르게 해석되고 있다. 고조선은 지금의 평양으로 추정되는 수도 왕검성(王儉城)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켜 나갔으며 여러 군장 국가들과 연합, 하나의 연맹왕국(聯盟王國)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요하유역을 중심으로 중국의 전국칠웅(戰國七雄)의 하나인 연(燕)과 맞서고 있던 고조선세력은 요동(遼東)으로 침투해 오는 연의 세력에 점차 밀리게 되었는데 연의 소왕(昭王;재위 BC 311∼BC 279)의 시대에 연의 장수 진개(秦開)에 의해서 고조선의 서역(西域)이 공취당하여 이곳에 요동군(遼東郡)이 설치되었던 것이다. 이 요동군은 연에 이어 진(秦)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나 진이 중국을 통일한 지 10여 년 뒤에 다시 혼란이 거듭되자 한(漢)에 의해 중국은 재통일되었다. 진나라 말기의 혼란을 피하여 중국의 연·제(齊)·조(趙)로부터 고조선으로 흘러들어온 유이민(流移民)의 수는 수만명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또 한제국 치하의 연지방이 소란해지자 연으로부터 고조선지방으로 망명하여 오는 자가 더욱 늘어났다.

[ 역사-멸망 ]

진·한 교체기 동안 중국으로부터 고조선지방으로 많은 유이민이 들어왔는데, 이 때 연왕의 부하인 위만(衛滿)이 1000여 명을 이끌고 고조선으로 망명하여 왔다. 고조선의 준왕(準王)은 북쪽의 변경(邊境)을 수비하겠다는 그의 약속에 따라 그에게 그 지방을 봉하여 주었다. 위만은 북방 수비의 임무를 맡고 있는 동안 유이민 집단의 세력을 키워서 준왕을 몰아내고 고조선지방의 지배자가 되었으며, 준왕은 남하하여 <진국(辰國)>으로 가서 <한왕(韓王)>이라고 칭하였는데 이 시기는 대체로 BC 194년에서 BC 108년 사이이다. 그런데 위만이 조선으로 올 때 상투를 틀고 조선옷을 입었던 점으로 보아 조선인이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또 준왕을 몰아내고 새 왕조를 세웠을 때 그는 여전히 국호를 <조선>이라고 하였으며 《사기(史記)》에 나오는 위만조선의 관직명에도 비중국적인 요소가 보이므로 위만조선은 단군조선을 계승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로써 위만조선은 중국인의 식민지 정권이 아닌 고조선인의 세력을 기반으로 한 연맹왕국적인 정권이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점차 세력이 강대해진 고조선은 우거왕(右渠王) 때 진(辰) 등의 여러 나라가 한나라와 교역하는 것을 막고 중간에서 무역의 이익을 독점하려 함으로써 한나라와의 충돌을 자아내게 되었다. 이에 한나라는 몽골로부터 만주로 뻗어오는 흉노(匈奴)가 위만조선과 연결하는 경우 그 위협이 두려워 BC 128년에는 고조선에 예속되어 있던 예(濊)의 땅에 창해군(滄海郡)을 설치하였으나 예인(濊人)의 반항으로 2년 뒤에 철폐하였다. 이와 같이 고조선과 한나라의 대립관계는 조선 장수를 살해하고 달아난 섭하(涉何)를 조선군이 보복적 살해를 함으로써 그 절정에 이르렀다. 이 사건을 계기로, BC 109년 한나라의 무제(武帝)가 6만의 육군과 7천의 수군을 파견,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을 침공해 오자 1년간 저항하였으나 BC 108년 고조선 멸망 후 그 지역에 한사군이 설치되었다.

[ 제도-정치 ]

고조선은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아래 제정일치시대의 최고통치자인 단군왕검을 중심으로 한 신권정치(神權政治)를 이루었으며 점차 연맹왕국으로 성장하여 갔다. 《위략(魏略)》에 의하면 BC 4세기경에 조선의 후(侯)가 중국의 연과 거의 같은 시기에 <왕>을 칭하였다고 하였는데, 왕을 칭한다고 하는 것은 단지 지배자의 칭호가 달라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부족사회가 분명한 국가형태를 갖추게 된 것을 선포하는 정치적 변화였던 것 같다. 따라서 BC 3세기경에는 부왕(否王)과 그의 아들 준왕 등 강력한 왕이 등장하여 왕위를 세습하였으며, 그 아래 상(相)·대부(大夫)·장군 등의 관직을 두었다. 또 위만의 손자인 우거왕 때의 관리 이름을 보면 조선상(朝鮮相) 노인(路人), 상(相) 한음(韓陰), 이계상(尼谿相) 삼(參), 장군 왕협 등 4명이 있었는데 <상(相)>은 고구려의 상가(相加)와 비슷하므로 부족장적 성격을 띤 것으로 보인다.

[ 제도-사회·경제 ]

고조선사회는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를 받아들임으로써 한반도에 있어서 다른 어느 부족사회보다도 문화상의 발전이 현저히 앞서 있었다. 이러한 고조선사회의 일반 사회상을 알 수 있는 것으로는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남아 있는 팔조법금(八條法禁)이 전한다. 그 가운데 현재 전해지고 있는 3가지조목은 ①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하며 ② 사람을 상해한 자는 곡물로써 배상하게 하고 ③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노비로 삼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원시적인 복수전투가 아니라 정치권력의 중재에 의해 싸움을 해결하는 사회의 법칙이며, 이로써 농경사회의 중앙집권적인 정치권력이 성립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법금은 미개사회에 공통되는 만민적인 성질을 띤 것으로, 이러한 금법을 통해서 고조선과 같은 부족연맹적인 사회에 있어서는 이미 권력과 부(富)의 차이가 생겨나서 모권사회(母權社會)로부터 부권사회(父權社會)로 이행, 가부장제적(家父長制的) 가족제도가 성립되고 재산에 대한 사유 관념이 생기면서 형벌노비도 발생된 것을 볼 수 있다. 철기의 사용과 더불어 경제적인 생활은 청동기시대보다 훨씬 발달하였으나 증가된 부는 사회지배층에 점유되어 빈부의 차이는 점점 확대되어 갔다.

[ 문화 ]

농경생활을 한 고조선시대는 청동기문화를 기반으로 성립되었다. 청동기문화의 유물로서는 청동검(靑銅劍)·청동모와 각종 말갖춤[馬具]·거여구(車輿具) 등이 있다. 그리고 뒷면에 특수한 기하학적 잔금무늬[細線紋]가 있고 2개의 꼭지가 달린 거울인 다뉴세문경(多紐細紋鏡)과 복식용으로서 허리띠에 쓰인 동물형띠고리[動物形帶鉤]도 있다. 이와 같이 고조선인들은 독특한 형식의 청동기를 변형·발전시켜 사용했는데 매우 예리하게 만들어져 세형동검(細形銅劍)이라 불리는 청동검과 청동꺾창[靑銅戈]은 한국에서만 발견되는 독특한 양식으로 유명하다. 또한 대륙과 만주에 있어서의 정세변화에 따라서 일어난 중요한 사실은 철기문화(鐵器文化)의 전래이다.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나타나게 된 철기문화는 만주에서 다시 북방계 청동기문화와 섞이면서 한반도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러한 중국의 철기문화와 이와 섞인 청동기문화의 전래시기는 BC 4세기에서 3세기에 걸친 것으로 여겨진다. 그 문화가 한반도로 파급되어 온 경로는, 요동반도에서 한반도 서북부에 걸쳐 분포되어 있는 전국시대 연나라의 화폐인 명도전(明刀錢) 유적으로 미루어보아 압록강 중류를 거쳐 청천강·대동강 상류유역으로 들어와 한국 서북지방에 정착된 듯하다. 이러한 철기문화의 영향으로 철제농구를 사용함으로써 농업경제가 크게 발달하였으며, 철제무기도 등장하였다. 그리하여 고조선 전역의 지배계급은 말이나 청동제마차를 타고 청동제뿐만 아니라 철제의 검(劍)과 투겁창 등 새로운 무기를 휘두를 수 있었고 석기에 대신해서 괭이·보습·낫 등 발달된 농구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철기문화의 보급은 고조선 지방사람들의 생활양식에 많은 변화를 일으켰다. 주거를 한 움집 바닥에는 온돌장치를 하고 가옥은 지하 움집에서 지상의 목조가옥(木造家屋)으로 변해 갔다. 무덤의 축조도 달라졌는데 넓은 구덩이[土壙]에 시체를 묻는 널무덤[土壙墓]과 2, 3개의 항아리를 맞붙여서 널[棺]로 쓰는 무덤의 2가지 양식이 새로이 행하여졌다. 따라서 한국에는 한족(漢族)의 철기문화와 스키타이 계통의 청동기문화가 들어와 대동강유역은 금속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이 두 계통의 금속문화는 계속 남하하여 종래의 민무늬토기문화[無紋土器文化]와 혼합되면서 일본으로 전파, 일본의 야요이문화[彌生文化]를 이루었다.

기자동래설 [ 箕子東來說 ]

은(殷)나라 현인 기자가 조선에 건너와 왕이 되었다는 설. 은의 주왕(紂王)의 숙부로 이름이 서여(胥餘)인 기자가 기국(箕國)에 봉해져 그렇게 불려졌다. 《죽서기년(竹書紀年)》과 《상서(尙書)》 등에 따르면 기자는 주왕의 실정을 간(諫)하다가 감옥에 갇혔으나 주(周)의 무왕 (武王)이 은을 멸하면서 석방시켰다고 한다.

은(殷)나라 현인 기자가 조선에 건너와 왕이 되었다는 설. 은의 주왕(紂王)의 숙부로 이름이 서여(胥餘)인 기자가 기국(箕國)에 봉해져 그렇게 불려졌다. 《죽서기년(竹書紀年)》과 《상서(尙書)》 등에 따르면 기자는 주왕의 실정을 간(諫)하다가 감옥에 갇혔으나 주(周)의 무왕 (武王)이 은을 멸하면서 석방시켰다고 한다. 무왕은 기자에게 세상을 다스리는 법인 홍범(洪範)을 배웠다고 기술되어 있는데, 즉 《상서》 <홍범편>은 무왕의 질문에 기자가 천지의 대법(大法)을 이른 것이라 한다. 그러나 《상서대전 (尙書大傳)》 <은전(殷傳)>에서는, 기자가 무왕에 의해 감옥에서 풀려나지만 은나라가 망하자 조선으로 망명하여 나라를 세웠고, 무왕이 그 소식을 듣고 그를 조선에 봉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의 기사는 《사기(史記)》 <송미자세가 (宋微子世家)>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지만 기자가 봉함을 받은 뒤 나라를 세웠다는 점에서 전후관계상의 차이를 보인다. 중국의 문헌 기록 가운데 진(秦)나라 이전의 내용은 대개 <기자는 덕과 학문이 뛰어나고 어진 이>로 기술되어 있는데, 이후의 기록에서는 <기자가 조선으로 건너가 지배자가 되었다>는 내용으로 일관하고 있다. 한국사 영역에서 기자·기자조선·기자동래설 등에 관한 견해로는 긍정론과 부정론 및 부분긍정론 등이 제시되고 있다.

① 긍정론: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문헌기록인 《삼국유사》와 《제왕운기(帝王韻記)》 등에 이러한 내용이 들어 있는데, 이 중 《제왕운기》에서는 단군을 전조선(前朝鮮)의 시조로, 기자를 후조선(後朝鮮)의 시조로 보고, 기자를 곧 문명화의 상징으로 인식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사대외교(事大外交)와 맞물리면서, 기자와 같은 중국의 현인이 조선왕조와 국호가 같았던 고조선에 와 백성을 교화한 사실이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여겨 기자동래설을 긍정적으로 수용하였다.

② 부정론: 근대 이후 역사연구에서는 기자조선의 실체 규명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기자동래설 부정론>이 대두하였으며, 기자조선의 등장은 곧 토착사회 내에서의 세력교체일 뿐이며 중국의 춘추시대에서 전국시대로 이어지는 시기의 한반도 북서지방에 한씨조선(韓氏朝鮮)이 성립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것은 위만(衛滿)에 의해 멸망한 기자조선 마지막왕 준왕(準王)의 성이 한씨였다는 데에 근거를 둔다. 후한시대 왕부(王符)의 《잠부론(潛夫論)》에 의하면 <주(周)의 선왕(宣王) 때 한후(韓侯)가 연(燕)의 부근에 있었는데, 그 후 … 위만에게 격파되어 해중으로 쫓겨갔다>는 기사가 보인다.

③ 부분긍정론: 기자의 동래는 부인하지만 기자를 조상신으로 섬기는 기자족의 평양지역 이동설이 제기되어 기자조선의 존재를 긍정하는 견해로서, 기자족은 동이족 안에 있었던 하나의 씨족단위였고, 산시성[山西省] 일대를 시발점으로 하여 동쪽으로 이동하였다는 것이다. 즉 산시성 일대의 지역에서 기국을 세우고 있던 기자족이 은나라 말기에 은나라의 제후국이 되었는데, 은·주 교체기와 춘추전국시대와 같은 정치적 격동기에 롼허강[澯河]하류지역으로 이동하여 기자조선을 세웠고, 다시 요서와 요동을 경유하여 평양지역으로 전면적인 이동을 한 것으로 보았다.

이 밖에 고조선과 기자가 전혀 무관하다는 입장으로, 중국의 작은 국가인 기국과 고조선은 롼허강을 사이에두고 접경을 이루었을 뿐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원래 기국은 지금의 허난성[河南省]지역에 있다가, 은·주 교체기에 롼허강하류지역으로 이동, 진(奏)이 중국을 통일한 이후 롼허강 중·하류 동부연안으로 다시 이동하여 고조선과 경계를 접하였다고 한다. 기자조선의 실체에 대해 한국 역사학계는 부정적인 편이다. 따라서 1102년(고려 숙종 7)에 건립되었다는 기자묘중수기적비(箕子墓重修記蹟碑)의 사료나 현재 전하고 있는 평양시 을밀대(乙密臺) 아래의 기자묘 등은 당시의 사대사상에 따른 왜곡된 부산물일 뿐이며 기자동래설은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설에 그친다.

위만조선 [ 衛滿朝鮮 BC 194∼BC108 ]

위만이 세운 고대국가. 위씨조선이라고도 한다. BC 206년 한(漢) 고조가 천하를 통일한 뒤 여러 나라에 공신을 봉하여 제후로 삼았다. 이때 노관은 연왕(燕王)으로 옛 연나라 땅을 다스리게 되었다.

위만이 세운 고대국가. 위씨조선이라고도 한다. BC 206년 한(漢) 고조가 천하를 통일한 뒤 여러 나라에 공신을 봉하여 제후로 삼았다. 이때 노관은 연왕(燕王)으로 옛 연나라 땅을 다스리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한이 주위의 제후들을 시기하여 제거하기 시작하자, 노관은 흉노로 도망하고 연나라에서 살던 노관의 부장(部將) 위만은 1000여 명의 망명인을 이끌고 고조선 마지막 왕인 준(準)에게 항복한 뒤 박사(博士)에 임명되어 서쪽 변방 100리의 땅을 수비하였다. 그러나 위만은 진번조선(眞番朝鮮)·연·제(齊)의 유민들을 통솔하고 그들과 결탁하여 세력을 키운 뒤, BC 194년 준왕을 내몰고 왕검성(王儉城)에 도읍을 정하여 조선왕이라 일컬었다.

당시 중국 한나라도 건국 초기여서 국가적인 체제가 느슨하였고 계속되는 흉노 침입에 급급하여 조선에 대한 정책은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정치적 변동에 불안을 느낀 한나라는 요동태수로 하여금 위만에게 만이(蠻夷)가 한나라의 변경을 침입하지 못하게 하고, 만이의 군장들이 한 황제를 입현(入見)하려 할 때 막지 말 것 등을 요구해 왔고, 이를 맹약한 위만은 한나라로부터 병력과 물자를 원조받아 고도의 정치세력을 구축하고 이웃 작은 마을과 진번(眞番)·임둔(臨屯) 등을 복속시켜 세력을 키워나갔다.

위만이 죽고 그의 손자 우거왕(右渠王)에 이르러서는 세력이 매우 강성해져 한나라에 대항하고, 입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진국(辰國)이 입조하려는 것을 막아, 당시 체제를 정비하여 사방으로 세력을 뻗치던 한나라와 마찰을 일으켰다. 이에 한나라는 수륙양면으로 군사를 일으켜 조선정벌에 나섰다. 조선은 한의 침공을 맞아 1년여 동안 항쟁을 하였으나 화전양론(和戰兩論) 대립으로 내부분열이 일어나 우거왕은 살해당하고 BC 108년에 3대 87년간 이른 위만조선은 멸망하였다. 한나라는 위만조선의 세력권 내에 낙랑(樂浪)·진번·임둔·현도의 4군을 설치하였다.

(파란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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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

BC 108년까지 요동과 한반도 서북부 지역에 존재한 한국 최초의 국가.

《삼국유사》를 쓴 일연()이 단군신화에 나오는 조선()을 위만조선(滿)과 구분하려는 의도에서 ‘고조선’이란 명칭을 처음 사용하였고, 그뒤에는 이성계()가 세운 조선과 구별하기 위해서 이 용어가 널리 쓰였다. 지금은 단군이 건국한 조선과 위만조선을 포괄하여 고조선이라고 부른다. 고조선의 건국시기는 확실하지 않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단군신화에서는 기원전 2333년에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고 기술하였으나, 그대로 믿기 어렵다. 건국연대를 위로 끌어올린 이유는, 역사가 오래될수록 그 왕조는 권위가 있으며 민족도 위대하다는 인식의 반영에 불과하다. 고조선이 처음 역사서에 등장한 시기는 기원전 7세기 초이다. 이 무렵에 저술된 《관자()》에 ‘발조선()’이 제()나라와 교역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또 《산해경()》에는 조선이 보하이만[] 북쪽에 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들 기록에 나타난 조선은 대체로 랴오허[] 유역에서 한반도 서북지방에 걸쳐 성장한 여러 지역집단을 통칭한 것이다. 당시 이 일대에는 비파형동검()문화를 공동기반으로 하는 여러 지역집단이 성장하면서 큰 세력으로 통합되고 있었다. 단군신화는 고조선을 세운 중심집단의 시조설화() 형식으로 만들어졌다가, 뒤에 고조선 국가 전체의 건국설화로 확대된 것으로 여겨진다. 중국 전국시대()에 들어와 주()나라가 쇠퇴하자 각 지역의 제후들이 왕이라 칭하였는데, 이때 고조선도 인접국인 연()나라와 동시에 왕을 칭하였다고 한다.

더욱이 고조선은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연을 공격하려다가 대부() 예()의 만류로 그만두기도 하였다. 이렇게 고조선은 BC 4세기 무렵 전국칠웅()의 하나인 연과 대립하고, 또 당시 중국인들이 교만하고 잔인하다고 표현할 정도로 강력한 국가체제를 갖추었다. 그러나 BC 3세기 후반부터 연이 동방으로 진출하면서 고조선은 밀리기 시작하였다. BC 3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연의 장수 진개()가 요하 상류에 근거를 둔 동호족()을 원정한 다음 고조선 영역내로 쳐들어왔다. 이때 연은 요동지방에 요동군()을 설치하고 장새()를 쌓았다. 그 결과 고조선은 서방 2,000여 리의 땅을 상실하고, 만번한(滿:랴오둥의 어니하 및 그와 합류한 청하의 하류지역에서 동북으로 성수산을 잇는 선을 중심으로 한 지역 일대)을 경계로 연과 대치하였다. 이 무렵 고조선은 그 중심지를 요하 유역쪽에서 평양지역으로 옮긴 것으로 여겨진다.

그뒤 진()나라가 연을 멸망시키고(BC 222), 요동군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였다. 고조선의 부왕()은 진의 공격이 두려워서 복속할 것을 청하였지만, 직접 조회()하는 것은 거부하였다. 부왕이 죽고 아들 준왕()이 즉위할 무렵 진()이 내란으로 망하고, 대신 BC 202년 한()이 중국을 통일하였다. 한은 진과 같이 동방진출을 적극 꾀하지 않고, 다만 과거 연이 쌓은 장새만을 수축하고 고조선과의 경계를 패수(浿)로 재조정하였다. BC 195년 연왕() 노관()이 한에 반기를 들고 흉노로 망명한 사건이 일어나자, 연지방은 큰 혼란에 휩싸이고 그곳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고조선지역으로 망명하였다. 이들 가운데 위만(滿)도 무리 약 1천 명을 이끌고 고조선으로 들어왔다. 준왕은 위만을 신임하여 박사()라는 관직을 주고 서쪽 1백리 땅을 통치하게 하는 한편, 변방의 수비 임무를 맡겼다. 그러나 위만은 BC 194년 중국 군대가 침입하여 온다는 구실을 허위로 내세우고, 수도인 왕검성()에 입성하여 준왕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다. 패배한 준왕은 뱃길로 한반도 남부로 가서 한왕()이 되었다. 이때부터 일반적으로 위만조선이라고 부른다.

위만은 유이민집단과 토착 고조선세력을 함께 지배체제에 참여시켜 양측간의 갈등을 줄이고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였다. 중국문물을 적극 수용하여 군사력을 강화하고, 이를 기반으로 주변의 진번 ·임둔 세력을 복속시켰다. 위만의 손자 우거왕() 때는 남쪽의 진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가 한()과 직접 통교하는 것을 가로막고 중계무역의 이익을 독점하였다. 이에 불만을 느낀 예군() 남려() 세력은 한에 투항하였다. 이즈음 한은 동방진출을 본격화하였는데, 그것은 고조선과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양측은 긴장관계를 해소하기 위해서 외교적 절충을 벌였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한은 BC 109년 육군 5만과 수군 7천을 동원해 수륙 양면으로 고조선을 공격하였고, 고조선은 총력을 다하여 이에 저항하였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고조선 지배층 내부가 분열 ·이탈되었다. 조선상() 역계경(谿)은 강화()를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신의 무리 2000여 호를 이끌고 남쪽의 진국으로 갔다. 또 조선상() 노인(), 상() 한음(), 이계상(谿) 삼(), 장군() 왕겹() 등은 왕검성에서 나와 항복하였다. 이러한 내분의 와중에서 우거왕이 살해되고 왕자 장()까지 한군에 투항하였다. 대신() 성기()가 성안의 사람들을 독려하면서 끝까지 항전하였으나, BC 108년 결국 왕검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한은 고조선의 영역에 낙랑 ·임둔 ·현도 ·진번 등 4군을 설치하고 관리를 파견하여 통치하였다. 이때 많은 고조선인들은 남쪽으로 이주하였고, 그들은 삼한사회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고조선이 한의 대군을 맞아 약 1년 동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고조선의 철기문화와 이를 기반으로 한 군사력이 막강하였기 때문이었다. 고조선 후기에는 철기가 한층 더 보급되고, 이에 따라 농업과 수공업이 더욱 발전하였고, 대외교역도 확대되어 나갔다. 이를 바탕으로 고조선은 강력한 정치적 통합을 추진하였지만, 기본적으로 여러 세력의 연합적 성격을 극복하지는 못하였다. 각 지배집단은 여전히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보유하고 있었고, 고조선 정권의 구심력이 약화되면 언제든지 중앙정권으로부터 쉽게 이탈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고조선 말기 지배층의 분열도 그러한 성격에 말미암은 바가 컸다.

지배층 사이의 취약한 결속력은 고조선 멸망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고조선 사회에 대해서는 기록이 전하지 않아 자세하게 알 수 없으나, 지금 전하는 범금팔조()를 통해 볼 때 계급의 분화가 상당히 진전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유재산제 ·신분제가 존재한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기자조선 []

중국 은나라 말기에 기자(箕子)가 조선에 와서 단군조선에 이어 건국하였다고 전하는 나라.

기자가 조선에 와서 왕이 되었다는 사실을 전하는 대표적인 역사책은 복생()의 《상서대전()》, 사마천의 《사기()》, 반고의 《한서()》 등인데, 사서마다 내용이 약간씩 다르다. 그 밖의 기자에 관한 기록들은 모두 이들 세 사서에 그 유래와 근거를 두고 있다.

《상서대전》에는 주()의 무왕()이 은()을 멸망시키고 감옥에 갇힌 기자를 석방하자, 그는 이를 탐탁치 않게 여겨 조선으로 달아났다. 무왕이 이 소식을 듣고 조선왕으로 봉하였다. 주의 책봉()을 받은 기자는 부득이 신하의 예를 차려야 하였으므로 BC 1100년경(무왕 13)에 주나라에 가서 무왕을 만났는데, 무왕은 그에게 홍범9주()에 대해서 물었다고 한다.

또 《사기》 송미자세가()에는 무왕이 은을 정복한 뒤 기자를 방문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방도를 묻자 홍범9주를 지어 바쳤다. 이에 무왕이 그를 조선왕으로 봉해주었으나, 기자는 신하의 예를 갖추지 않았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한서》 지리지 연조()에는 은나라가 쇠하여지자 기자가 조선에 가서 그 백성에게 예의와 농사 ·양잠 ·베짜기 기술을 가르쳤더니, 낙랑조선() 사회에서는 범금팔조()가 행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들을 근거로 《삼국지》에 인용된 《위략()》에서는 위만에게 왕위를 빼앗긴 준왕()을 기자의 후예로 기술하였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기자조선의 실체를 인정하였지만, 최근에는 이를 부정하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먼저 문헌상으로 기자가 조선에 와서 왕이 되었다는 것을 입증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기자는 기원전 1100년 전후의 인물인데, 기원전 3세기 이전에 쓰여진 《논어》 《죽서기년()》 등에는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는 기록은 없고 기자의 존재 자체만 언급하고 있다. 기자동래설이 사실이라면 이들 기록에 그에 관한 언급이 있을 법한데 그렇지 않다. 그런데 기자의 동래 사실을 전하는 사서들은 한결같이 모두 기원전 3세기 이후에 쓰여진 것들이다.

따라서 이를 근거로 한 기자동래설은 기원전 3~2세기 무렵에 중국인들이 중화사상에 입각하여 조작해낸 것이 아닌가 의심된다. 실제로 기자가 조선에 와서 왕이 되었다면, 황하유역과 만주 ·한반도 지역의 청동기문화가 긴밀하게 관련되어야 함에도, 동북아시아의 청동기문화는 비파형()동검문화로 특징되듯이, 계통상으로 중국 황하유역의 것과 뚜렷하게 구분된다. 뿐만 아니라 기자가 조선에 와서 예의범절과 문화를 전하였다면, 은나라에서 사용된 갑골문()이 고조선지역에서 발견되어야 함에도 현재 발견된 예가 전혀 없다.

이처럼 기자동래설의 모순점이 밝혀지면서 이에 대한 여러 가지 새로운 해석이 제기되었다.

먼저 기자조선을 고조선 내부에서 등장한 새로운 지배세력, 즉 한씨조선()의 등장과 동일한 것으로 파악한 견해가 있었다. 즉 후한 왕부()의 《잠부론()》에 “주나라 선왕() 때 한후()가 연나라 근처에 있었다. 그후 한의 서쪽에서도 성()을 한()이라 하더니 위만(滿)에게 망하여 바다로 옮겨갔다”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바다로 간 자는 바로 준왕()이므로 그의 성은 기씨()가 아니라 한씨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기자조선은 중국인이 세운 나라가 아니라 바로 한인()이 단군조선을 이어 세운 국가로 볼 수 있다는 주장이다.

또 1970년대에는 한국 민족의 기원을 종족이동이라는 시각에서 바라보면서 기자조선의 실체를 재조명한 견해가 제기되었다. 이에 따르면, 동이족의 일파인 기자족이 화북방면에 있다가 은주교체기()와 춘추전국()과 같은 격동기에 북중국 ·남만주 ·평양으로 이동하여 기자조선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기존의 사료를 새로운 각도에서 재해석한 점에서 상당한 관심을 불러일으켰지만, 그 내용을 고고학적으로 뒷받침하지는 못하였다.

한편 기자는 특정 개인의 이름이 아니고 ‘기국()의 제후’를 가리킨다는 견해도 있다. 《춘추좌씨전》에는 주나라 초기의 제후국으로서 ‘기국’이 보이며, 《국어()》에는 기국을 정복한 진()나라 고대의 성씨에 기씨()가 있다는 사실이 전한다. 또한 기후()를 중심으로 한 기씨 일족이 주() 초기에 북방의 정복활동에 종사하다가 뒤에 산시[西]에서 산둥[]으로 이봉()되었다는 기록들을 그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고고학적으로 기국의 존재를 알려주는 ‘기후()’ ‘기()’ ‘기후방정()’ 등의 명문이 새겨진 은나라 ·주나라의 청동기가 중국 각지에서 출토되는 것도 그 견해를 뒷받침해주는 유력한 증거로 제시된다. 다만 이 견해는 기국()이 기자조선을 말하는 것인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기자조선과 고조선은 어떠한 관계였는지에 대해 합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

위의 견해 가운데 어느 것이 타당한가는 현재로서 명확한 답을 줄 수 없다. 다만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기자동래설 그 자체는 부정된다 하더라도 자료의 해석방향에 따라 그것이 다양하게 이해되고 있는 측면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상고사()에 대한 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기자조선에 관한 자료는 그 이해의 폭을 넓히는 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실제로 은주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고조선으로 이동하여 왔는데, 기자동래설은 바로 이같은 주민이동과 그에 따른 고조선의 사회변동과 어떤 형태로든 관계가 있다. 더욱이 기자동래설을 고려와 조선시대에 사실로 인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기자묘를 세우고 국가 차원에서 숭배하였다는 점에서도 기자조선 문제는 한국 사상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적다고 볼 수 없다.

위만조선 [滿]

위만(衛滿)이 집권한 이후 멸망할 때까지의 고조선(古朝鮮)

위만조선은 고조선의 역사발전 단계상에서 후기()에 해당하며, 일반적으로 왕조의 개창자를 국명으로 칭하지 않는 점에서 '위만조선'이라는 용어는 적합하지 않으므로, '위만왕조'나 '위만집권기의 고조선'이라는 개념이 보다 합리적인 것 같다.

위만조선에 대해서는 사마천의 《사기()》와 반고의 《한서()》에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조선왕 위만은 옛날 연나라 사람으로, 요동 일대로 망명하였다가 다시 무리 천여 명을 모아 동쪽으로 도망하여 준왕()의 외신()으로 있었다. 이후 차츰 진번()과 조선()의 오랑캐 및 옛 연·제 지역의 망명자를 복속시켜 거느리고 왕이 되었으며, 왕검성에 도읍을 정하였다고 한다. 그때가 바로 혜제(:BC 194~BC 180) 때이다.

이처럼 위만왕조는 이전 준왕() 단계의 통치체제를 이어받아 국호를 그대로 '조선'으로 하고, 위만을 중심으로 하는 유이민 집단과 토착 고조선인 세력을 함께 지배체제에 참여시켜 양측간의 갈등을 줄이고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였다. 한때는 위만조선을 중국인 이주자들이 지배하는 식민지정권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 점은 위만왕조 정치구조의 연구 결과 그것이 조선 독자의 체제를 갖추고 있고, 또한 지배세력의 주요 부분이 토착인이라는 점에서 부정되고 있다.

위만 집권시기는 고조선의 역사상 가장 융성했던 시기이다. 위만은 중국 국경 밖의 오랑캐를 지켜 변경을 침략하지 못하게 하는 외신()의 임무에 대한 대가로 군사적 위세와 재물을 얻어 주변지역을 침략하고, 진번과 임둔() 등도 모두 복속하여 그 영역이 사방 수천 리가 되었다고 한다. 그뒤 고조선의 마지막 왕인 우거왕() 때에 이르러서는 더욱 강성해져 남쪽의 진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가 한과 직접 통교하는 것을 가로막고 중계무역의 이익을 독점하였다. 이러한 고조선의 세력확장에 대한 불만과 고조선이 더 이상 흉노()와 연결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한()은 마침내 고조선을 침략하였다(BC 108년).

이때 위만조선은 한의 대군과 맞서 1년 가까이 버틸 수 있을 정도로 철기문화와 이를 기반으로 한 군사력이 강하였다. 이 당시의 부장품으로 압도적으로 많이 발견되는 것이 실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단검·창·도끼들이며, 또한 전차로 추측되는 거여구(輿)라는 점에서 이 당시에 고조선 사회가 정복전쟁이 잦았고 지배력이 컸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위만 집권기에는 철기문화의 보급이 한층 진전되면서 농업과 수공업이 더욱 발전하였고, 대외교역도 확대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적 발전을 기반으로 정치적 통합도 한 단계 진전되어 나갔다.

이 당시 고조선 사회는 이미 상당한 정도의 계급분화가 진척되었다. 이러한 모습은 노비제도의 존재와 사유재산에 대한 법적 보호조처를 보여주는 팔조금법()에서 대표적으로 확인된다. 이를 통해 위만조선의 사회구성은 노비·촌락의 일반민·귀족으로 대별됨을 알 수 있다. 귀족은 노예와 토지·재화 등 자신의 경제적 기반을 따로 지니고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촌락공동체를 대표하는 수장으로서의 면모도 함께 지니고 있었다. 노비는 이 시기에 상당수 존재하였으나 많은 수의 노비를 사역하는 대규모의 노비경영은 발달하지 않았다. 이는 노예제 경영이 발달된 사회에서 보이는 상품화폐경제의 진전이나 큰 도시의 발달 등의 면모가 확인되지 않기 때문이다. 촌락공동체의 일반민은 기본적인 생산활동을 담당했는데, 이들은 지역의 경제발전 상태에 따라 그 존재 양태가 균일하지 않았고, 경제적 상태와 피수탈 정도에서 차이를 나타냈다.

한편 위만조선은 사회발전에 따른 국가적 성장과 여러 사회구성원을 통치하기 위하여 어느 정도 지배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사료에는 상()·대신()·장군()·비왕() 등의 관직을 지닌 관료들이 존재하였음이 보인다. 즉 위만조선은 중앙에는 세습적 지위를 누리던 왕()을 정점으로 하여 그 밑에는 각 지역공동체에 상당한 기반을 유지하고 있는 수장()들을 중앙 관직체계에 편입시켜, 문관직인 상직()과 무관직인 장군직()으로 편제하여 국가적 체제를 갖추어 나갔다. 정치적 지배체제를 갖춘 고조선은 국가적 통치를 위해 일정 지역들을 지역적 구분을 두고 통치하는 체계를 가지고 있었음도 확인된다.

결국 위만조선의 국가 형태는 최고 수장인 국왕을 정점으로 하여 재지수장층의 누층적 지배를 기본으로 하는 국가형태였다. 그러나 위만조선 단계에는 충분한 관직 및 통치체제는 발전되지 못하였다. 다만 우세한 병기와 군사력을 바탕으로 주변지역에 대한 정복을 통해 광역의 영토를 가졌고, 정복지역에 대해 공납적 지배관계를 실현하는 국가형태를 띠고 있었다. 이러한 상태는 삼국 초기까지 이어지다가 4세기 이후 고대국가가 완성되면서 공동체적 제약을 극복하고 왕에 의한 전제적 고대국가가 완성되었다고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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