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의 동북아 정책, 제 2의 청일전쟁 불러온다

외교는 중국, 군사는 일본을 파트너로… 충돌 불가피

부시 미 대통령이 케리 민주당 후보를 꺾고 재선에 성공함에 따라, 6자회담을 기조로 한 미국의 동북아정책이 향후 상당기간 그대로 유지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에 따라, 자연히 우리의 관심은 '6자회담 구도의 장기화가 한반도 정세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가'에 집중되지 않을 수 없다.

6자회담과 더불어 미국의 동북아정책을 특징짓는 또 하나의 요소는 미국과 일본의 군사적 제휴가 점차 강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9·11 이후의 대테러전쟁 구도 하에서 특히 강화된 6자회담과 미-일의 군사적 제휴는, 다른 말로 하면, 미국이 자국의 동북아정책을 수행하기 위해 두 개의 파트너를 두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외교적으로는 중국을, 군사적으로는 일본을 자국의 파트너로 삼고 있는 셈이다.

이 같은 미국의 이중(二重) 파트너 체제는, 한편으로는 미국 국력의 한계에 기인한다는 측면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구도가 장기적으로 중일전쟁을 촉발할지 모른다는 측면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현재의 이중 파트너 체제가 중일전쟁을 촉발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언급이기도 하지만,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에 기인한다.

첫째, 현재의 이중 파트너 체제 하에서 중국과 일본은 미국의 비호 하에 국력을 극대화하고 있다. 중국은 6자회담을 통해 동북아외교의 주도권을 잡으려 하고 있으며, 일본은 아시아․태평양 미군이 주일미군을 중심으로 재편되는 기회를 이용하여 자위대를 강화할 기회를 잡으려 하고 있다.

특정 국가가 국력을 강화하려 할 때에는 주변 국가들이 대개 견제를 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지금 중국과 일본은 각각 외교와 군사 방면에서 사실상 견제 없는 쾌속 드라이브를 질주하고 있다. 미국이 이들을 비호하는 상황에서 다른 동북아국가들인 한국과 북한이 중국과 일본을 견제할 가능성이 약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둘째, 이중 파트너 체제 하에서 중․일이 국력을 극대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얼마 안 있으면 미국이 동북아를 떠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특히, 일본이 자체적인 MD 체제를 구축하게 될 2010년대 초반이면, 일본 입장에서 과연 어느 정도나 미국을 필요로 하게 될 것인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꼭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한계점에 다다른 미국의 국력을 고려할 때에, 미국이 제2의 먼로선언을 할 날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쉽게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주한미군의 완전 철수가 점차 가시화되고 있다는 점도 그것을 입증하는 한 측면이 될 것이다.
미국이 동북아를 떠나게 되면, 그때 남는 것은 누구인가? 동북아 외교와 군사를 각각 장악한 비대해진 중국과 비대해진 일본만 남게 될 것이다. 미국이라는 단독 패권자가 떠나 버린 상황에서 동북아는 새로운 패권자를 선택할 것이고, 그러한 선택은 결코 평화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중․일이 충돌한다면, 가장 피해를 입을 지역이 어디인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자명한 일이 될 것이다.

아직 발생하지도 않은 일에 대해 이와 같이 우려를 나타내는 것은, 유사한 현상이 이미 19세기말에 발생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동북아 국제정치를 논의함에 있어서 19세기 모델은 아직도 유효하다. 왜냐하면, 현재의 동북아 정치구도는 기본적으로 1860년 중국-러시아간 베이징조약 이후에 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베이징조약 이후 동북아 국제정치의 특징은, 한반도를 전략적 요충지로 하여 여러 개의 열강들이 상호 대립하였다는 것이다. 베이징조약을 통해 중국으로부터 연해주를 획득함으로 인해 러시아가 한반도 바로 위쪽에까지 진출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한반도가 유사 이래 처음으로 동북아의 전략적 요충지가 된 것이다. 1860년 이전까지만 해도 한반도는 일본과 더불어 동북아의 변방에 불과하였으며, 전략적 중요성도 높게 평가되지 않았다. 그때 발생한 동북아의 국제구도가 지금도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1860년 이후의 모델은 지금 현재에도 유효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1860년대 현재 세계 최강국은 영국과 러시아였다. 영국과 러시아는 1815년 비인회의(Congress of Wien) 이후 세계의 양대 최강국으로서 세계 곳곳에서 패권 대결을 벌였다. 러시아는 어떻게든 남하하려 하고 영국은 그때마다 이를 극력 저지하는 현상이 발칸반도․중앙아시아 등에서 전개되었다.

영국과 러시아의 대결 무대가 동아시아로까지 확대된 배경은 이러하다. 크림전쟁(Crimean War, 1853~1856) 당시 러시아와의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영국은 국면전환을 위해 1854년 8월 29일 프랑스를 끌어 들여 오호츠크해와 베링해 사이에 있는 캄차카반도의 페트로파블로프스크를 기습하였다. 이로 인해 영․러간의 세계적 대결이 동아시아로까지 확대된 것이다.

그런데 태평천국운동(1851~1864)을 통해 중국 민중의 거대한 파워를 확인한 영국과 러시아는 1860년대부터 동아시아에서의 상호 대결을 자제하였다. 이로 인해 동아시아에서는 ‘힘의 공백’ 상태가 출현하게 되었다.

당대 최강국들인 영국-러시아가 상호 대결을 자제하는 틈을 타서 일본․프랑스․독일․미국․중국 등이 동아시아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개시하였다. 프랑스가 병인양요(1866)를 일으킨 것도, 미국이 신미양요를 일으킨 것도(1871), 일본이 운요호사건(1875)을 도발하고 오키나와를 합병(1878)한 것도, 청나라와 일본이 임오군란(1882)에 개입한 것도, 프랑스가 베트남을 장악(1885)한 것도 모두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점은 이것이다. 이 같은 힘의 공백 상태에서 영․러가 취한 정책이 결과적으로 청일전쟁(1894)의 원인이 되었다는 점이다. 1860년대 이후 동아시아에서 영국과 러시아는 서로가 상대방을 직접적으로 견제하는 대신, 다른 국가, 다시 말해, 제휴 파트너 혹은 대리인을 내세워 상대방을 견제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러한 영․러의 동아시아정책을 신속히 파악하고 자국의 국력 증대를 도모한 국가는 바로 청나라와 일본이었다. 그리고 이들 양국은 영․러의 묵인 속에 자국의 국력을 극대화하는 정책을 취했다. 청나라는 외교방면에서 영향력을 강화했고, 일본은 군사력 특히 해군 방면에서 실력을 강화했던 것이다. 지금 중국과 일본이 취하고 있는 행보와 상당히 유사한 것이다.

당시 청나라의 실권자 이홍장(李鴻章)은 한반도를 방패막이로 삼아 중국의 안보를 유지한다는 구상을 갖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1882년에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조선정부의 공식적 파병요청도 없는 상태에서 북양함대를 파견하여 정변을 진압하고 일본군마저 제압하였다.

이홍장은 동북아의 전략적 요충지인 조선을 장악한 후에 ‘중국의 조선 장악이 국제적인 세력균형과 동아시아의 평화에 유익하다’는 논리를 내세워 영국․러시아․일본의 묵인을 얻었다. 요즘 중국이 6자회담을 빌미로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고 있듯이, 당시의 중국도 세력균형논리를 내세워 조선을 자국의 영향권 안에 넣었던 것이다.

영국과 러시아는 조선이 상대방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일시적으로 청나라의 영향력 안에 있는 것이 낫다는 판단을 하여, 청나라가 조선을 장악하고 이를 통해 동북아 외교의 균형추 역할을 하는 것을 묵인했다.

이렇게 중국이 외교 방면에서 동북아에서의 지위를 향상시키고 있는 사이에, 일본은 군사적인 면에서 실력을 강화하였다. 일본은 1883년부터 1889년까지 7개년 동안 해군력 증강을 추진하여, 1889년경에는 동해에서 러시아 해군을 압도할 수 있을 정도의 해군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일본이 이같이 군사력을 강화하는 동안, 서로 상대방을 견제하는 데에만 치중하던 영․러는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전혀 견제하고 이를 묵인하였던 것이다. 일본이 1889년에 조선을 상대로 방곡령사건을 일으켰던 것은, 축적된 군사력을 바탕으로 청나라와의 전쟁을 일으키기 위한 일본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영․러의 묵인 속에서 각각 외교력과 군사력을 축적한 청나라와 일본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을 핑계로 조선에 군대를 파견했고, 이 때 조선에서 조우한 청나라․일본은 결국 충돌하고 말았다(청일전쟁).

조선은 청일전쟁의 직접적 당사자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이를 계기로 16년 후에는 일본에게 국권을 강탈당하는 치욕을 겪었던 것이다.

당시 조선이 패전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외세에게 국권을 빼앗긴 것은 역사적으로 볼 때에는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B.C. 108년에 고조선이 한나라에 패배한 이래, 한반도가 외세와의 전쟁에서 패해 국권을 내준 경우는 없었기 때문이다.

A.D. 668에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게 패해 멸망하기는 했지만, 그때는 한반도 남부의 신라가 당나라와 제휴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한반도 내부의 분열이 있었기에 중국이 한반도를 군사적으로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반도가 단결한 상태에서 외세에게 패전하고 그 때문에 국권을 내준 경우는 없었다. 1270년에 몽골족의 원나라와 화친을 체결했지만, 그때도 전쟁에 패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고려와 더 이상 전쟁을 치를 수 없는 몽골 측의 사정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었다. 그리고 1636년 병자호란 때 조선이 청나라에 패배하기는 했지만 그 때문에 국권을 상실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1644년 이후에는 조선의 발언권이 더 강화되었다.

이처럼 민족이 단결한 상태에서는 한번도 전쟁을 통해 국권을 빼앗긴 적이 없는 한반도가 1910년에 패전도 겪지 않은 채 국권을 빼앗긴 것은 위와 같은 국제적 역학관계 때문이었다. 세계 최강대국 영․러의 묵인 속에 청․일이 외교․군사 방면에서 동북아패권을 확보하게 된 상황 속에서, 조선은 외교적으로도 주변국이 되고 군사적으로 약체국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조선이 이 시기에 외교와 군사 방면에서 실력을 키울 수 없었던 것은, 청나라․일본의 조선에 대한 착취가 영․러에 의한 국제적 묵인까지 얻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그때와 동일한 현상이 지난 911 이후로 다시 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이 중국에게 동북아 외교의 주도권을 인정하는 상황에서 한국은 외교의 주변부로 밀려나 있으며, 미국이 일본에게 군사적 대리권을 인정하는 상황에서 한국은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그저 쳐다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미국은 한국의 장거리 미사일 개발을 방해하면서도 일본의 군사대국화는 있는 힘껏 지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미국의 ‘사랑’을 받지 않고도 혼자서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는 민족이지만, 미국이 이처럼 우리 민족의 발전을 방해하는 한편, 중․일의 국력 강화를 도와주고 있는 현실에 우리는 분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서두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지금처럼 중국․일본이 실력을 강화하고 있는 상태에서, 미국의 조정력이 약해지는 때가 되면 중일간의 물리적 충돌이 발생할 것이 뻔하다. 그렇게 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가 입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이 지금의 과도기 국제정세에서 살아남고 다음 국제정세에서 동북아의 한 축이 되기 위해서는, 신속히 남북간의 통일을 완수하는 한편, 6자회담을 통한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견제하고 또한 미군 재편을 이용한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견제하여야 할 것이다.

케리를 꺾음으로써 부시는 한층 더 발언권을 얻게 되겠지만, 그렇다고 하여 우리는 제2기 부시행정부의 동북아정책에 묵묵히 순응만 할 수는 없다. 우리의 살 길은 이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것밖에 없다. 우리가 미국의 이중 파트너 체제를 묵인한다면 미국이 떠난 이후에 중일전쟁의 싸움터가 될 수밖에 없지만, 우리가 미국의 동북아전략에 적극 대응하고 스스로 살 길을 모색한다면 적어도 50%의 승산은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김종성 PaxPeaceNet 동북아평화포럼 수석집행위원>

이 기사는 「김종성의 중국외교자료실」(http://www.jkim0815.com)에서 제공한 것입니다.

(디지털말 / 이종태 기자 2004-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