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사 문제 학계차원 해결을”

정두희 서강대 교수 역사 에세이 '내안에…' 서 주장

“오늘날 전문 역사학자나 일반인을 막론하고 고구려를 떠올릴 때는 항상 광대한 만주 영토를 생각하고 중국과 한판 패권을 다투던 강대국의 모습을 그리는 것 같다. 실제 고구려 멸망 이후 10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만주 지역은 단 한 번도 한국사의 어느 국가에도 속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그 땅의 정당한 계승자인 것처럼 여기는 사람도 적지 않다.” 간도 문제를 제외한다면 지금은 국제법상으로 아무런 논쟁의 여지 없이 중국의 영토가 돼버린 만주 지역에 대한 현대 한국인들의 관념이나 고구려사의 소유권을 선언한 중국의 ‘동북공정’이 알려졌을 때 우리가 충격을 받았던 이유는 ‘고구려사는 엄연한 한국의 역사’라는 역사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조선시대 연구자인 정두희 서강대 사학과 교수는 최근 출간한 역사에세이 ‘내 안에 살아 숨쉬는 역사’(청어람미디어)의 서문을 대신한 글에서 일제의 식민사관에 맞선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와 이기백의 ‘한국사신론’ 등을 예로 들며, “고구려사가 한 국인의 역사의식 속에 깊고도 뚜렷이 각인된 데는 일제의 한국지배가 남긴 상처가 큰 역할을 했다”고 밝히고 있다. 일제 어용 사학자들의 ‘사대주의 망국론’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동북아시아 패권을 놓고 중국과 치열하게 일전을 벌였던 고구려의 모습처럼 뚜렷한 역사적 사실을 발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역사, 과연 어느 나라의 역사인가?’란 글을 통해 정 교수가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국가적 목적을 위해 역사라는 학문을 철저하게 종속시키고 이용한 중국의 역사해석도 억지이지만 우리도 고구려사가 전적으로 한국사의 전유물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고조선→삼국 →통일신라와 발해→고려’로 한국사가 이어져왔으며 만주 일대가 고조선시대부터 한국사의 중심무대였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러나 정 교수는 한국의 역사상 만주와 한반도 전체를 아우르는 통일국가가 존재했던 적이 없었던 사실을 지적하며 실제와 역사 의식 사이에 상당히 큰 간극이 있음을 강조한다. 그는 “영토가 광대했던 고구려조차 고조선 이후 만주와 한반도 각지에서 출현한 정치체 모두를 통일 한 적이 없으며, 또 그러한 통일을 국가적 목적으로 설정한 적도 없다”고 설명한다.

역사를 국가 단위로 파악할 때, ‘만주와 한반도 일대’는 현재 남·북한과 중국 등 세 개의 엄연히 다른 주권국가에 의해 나눠 져 있으며, 이 중에서도 남한의 연고권이 제일 미약하다. 우리는 쉽게 남·북 공조를 주장하지만 ‘단군조선→고구려→발해→고려→북한’으로 이어지는 북방왕조의 역사가 정통임을 주장하는 북한과 남한의 고구려사를 보는 입장이 같을 수는 없다.

이처럼 고대의 정치체나 국가들 사이에 아무런 연대의식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모두 ‘우리 민족’의 활동이라는 하나의 개념으로 묶는 것은 민족을 단위로 한 고대사관에 바탕한 것으로 남한의 현대적 역사관이 만든 결과물일 뿐이다. 정 교수는 “ 고려에서 조선을 거쳐, 현대로 이어지는 역사는 한반도가 중심 무대였다”며 “한국사에서 민족사를 아무리 강조해도, 그 민족사는 대한민국의 국가사와의 관련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지, 이와 무관한 민족 보편사를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고 비판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사학자들은 한국사가 무엇인지, 그 범위와 한계는 어떠한지에 대해 좀더 심각한 자기 반성적 성찰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 교수는 특히 고구려사 문제를 가지고 학계가 정부에 압력을 넣거나, 혹은 정부가 앞장서야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학문의 발전을 위해서나 국가의 장래를 위해서나 모두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정부는 소수민족 문제에 대한 중국의 입장을 이해하는 조용하면서도 신중한 외교를 통해 우리의 입장을 알리고, 학계도 고구려연구재단 설립으로 귀결된 정부지원 연구센터를 요구하기보다는 한국의 학문자유와 깊이가 국가의 지원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점을 품위있게 드러내는 것이 좋았을 것이란 게 정 교수의 진단이다.

원래 이 글은 역사학회에서 발간한 ‘역사학보’ 183호(2004년 9 월) 중 ‘회고와 전망’의 권두에 실릴 ‘총설’이었다. 그러나 글의 형식이나 성격이 ‘총설’과 맞지 않는다고 하여 뒤의 ‘논단’으로 밀리고 말았다. 글의 맨 앞에 이례적으로 주를 달고 “ 이 글은 역사학회의 공식 입장이 아니다”는 꼬리표까지 단 데 민족주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한국사학계의 현실을 엿볼 수 있다.

(문화일보 / 최영창 기자 2004-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