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역사에 쓰인 고구려,고구려인] 연개소문(淵蓋蘇文) · ⑥끝

역사서엔 "잔인·난폭"… 소설·京劇선 "전설적 인물"

우리나라의 인물로서 중국인들에게 연개소문 만큼 강렬한 인상을 준 인물도 드물 것이다. 예컨대 중국인들이 가장 즐기는 경극(京劇)에서도 연개소문이 주인공의 한 사람으로 등장한다.

중국 역사상 최고의 현군(賢君)으로 알려진 당 태종에게 뼈아픈 패배를 안긴 고구려의 지도자 연개소문은 그 당대만이 아니라 두고두고 중국인의 뇌리 속에 깊게 각인된 인물이었다. 그래서 연개소문의 행적은 당나라 이래 청 왕조에 이르기까지 소설·잡극·연의·경극 등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끊임없이 재생산되면서 중국인에게 영원한 ‘적장(敵將)’으로 남게 되었다.

물론 이런 무대의 진정한 주인공은 연개소문에게 쫓겨 궁지에 몰린 당 태종을 극적으로 구출하는 당나라 장군 설인귀(薛仁貴)였다. 연개소문은 단지 그의 맞수로서 그를 돋보이게 하는 존재일 뿐이지만, 오히려 당 태종보다는 더욱 영웅적인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는 점도 눈길을 끈다.

그렇게 연개소문과 설인귀는 오랜 세월 중국 대중의 상상력 속에서 하나의 전설로 전해왔다. 지금도 요동 지역 곳곳을 답사하다 보면 이 두 영웅이 일전을 겨루었다는 설화를 적잖게 만날 수 있다.


▲ 1967년 중국 상하이 부근의 명나라 때 무덤에서 발견된 고서에 실린 연개소문과 설인귀의 전투 장면 그림. 칼을 든 사람이 연개소문, 활을 쏘는 이가 설인귀이며 뒤에서 지켜보는 사람은 당 태종이다.


그런데 연개소문에 대한 중국의 공식적인 사서(史書)의 기록은 이보다 훨씬 편협하다.

우선 ‘당서(唐書)’에는 “연개소문이 성질이 잔인하고 난폭하였기 때문에 그가 아버지의 직위를 계승하는 것에 대해 주위의 반대가 심했다”고 전하고 있다.

나아가 다음의 일화를 소개하면서 연개소문을 무자비한 권력의 화신으로 그리고 있다. “(연개소문은) 몸에 다섯 자루 칼을 차고 다니는데, 주위 사람들도 감히 쳐다볼 수 없었으며, 언제나 그의 관료를 땅에 엎드리게 하여 이를 밟고 말을 타고 내린다. 행차할 때에는 반드시 군대를 벌이고 행인들을 피하게 하는데, 백성들이 너무 두려워 저마다 구렁으로 뛰어들어 피하였다”고 한다.

중국측 역사서의 이러한 기사는 연개소문을 의도적으로 깎아내리려는 불순한 혐의를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아마도 연개소문으로 인해 받은 자존심의 타격이 그만큼 컸던 것이 아닌가 한다.

연개소문이 고구려 최후의 집권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한국의 전승 기록은 의외로 거의 전해지지 않는다. 심지어 ‘삼국사기’의 연개소문 열전(列傳)조차 많은 부분이 중국측 기록에 의거하여 기술되었다. 따라서 역사 기록상으로는 연개소문에 대해 부정적인 편견이 담긴 중국인의 붓으로 쓰여진 기록만이 남아 있을 뿐이며, 그러기에 연개소문의 참 모습을 알기에는 의외로 정보가 부족하다.

그나마 다행스럽게 1921년 이후 낙양에서 연개소문의 아들 천남생(泉男生)과 천남산(泉南産)의 묘지(墓誌), 그리고 손자 천헌성(泉獻誠)과 고손(高孫) 천비(泉毖)의 묘지명이 차례로 출토된 바 있다. 고구려의 멸망 후 당에서 활동하다가 죽은 아들들과 그 후손의 묘지에서 우리는 다른 기록에서는 볼 수 없는 연개소문 가문에 대한 생생한 사실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이들 묘지에 의하면 그의 가문의 시조는 샘으로부터 나와서 성씨를 ‘연(淵) 또는 천(泉)’이라고 하였으며, 또 연개소문의 할아버지 자유(子遊)와 아버지 태조(太祚)는 모두 막리지(莫離支)를 역임하였고, 모두 쇠를 잘 부리고 활을 잘 다루었다고 한다. 이는 곧 그의 가문이 군사적 기반을 토대로 정치적으로 크게 성장한 신흥 귀족임을 보여준다.

한편 ‘당서’에는 그의 아버지가 대대로(大對盧)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막리지이든 대대로이든 두 관직 모두 정치 운영의 최고 자리였다. 따라서 연개소문 가문은 여러 대에 걸쳐 권력의 핵심에 있었던 고구려 후기 최고의 명문 가문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자료에 의하여 연개소문이 권력을 장악하는 데에는 가문 배경이 중요한 몫을 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고 연개소문이 단지 집안의 내력에 의존해서 정변을 일으키고 집권하였다고 볼 수는 없다. ‘삼국사기’에는 “생김새가 씩씩하고 뛰어났으며 의지와 기개가 커서 작은 것에 얽매이지 않았다”라고 전하고 있다.

또 연개소문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구당서(舊唐書)’에도 “수염과 얼굴이 매우 준수하고 형체가 걸출하였다”고 전한다. 이런저런 기록을 모아보면 연개소문은 외양이나 성격에서 나름대로 영웅적 풍모를 지니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쨌든 연개소문이 역사의 전면에 돌연히 부각되는 것은 정변을 통해서이다.

642년 10월, 영류왕과 대신들이 연개소문을 천리장성의 축조자로 내보내 권력의 핵심에서 제거하려고 하자, 반대로 연개소문은 쿠데타를 일으켜 반대파를 숙청한 후 권력을 장악하였다.

사실 이 대목에서 연개소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칭송과 비난의 양극단으로 되풀이되어 왔다. 즉 신하로서 영류왕을 죽이고 제1인자로 등장하였다는 점에서 반역자로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자신의 집권기 동안 당의 침략에 당당히 맞서 싸웠다는 점에서 사대주의자인 영류왕 등을 제거하고 민족 주체성을 지키려는 구국의 결단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또 그의 죽음과 더불어 고구려가 멸망하였다는 점에서 고구려 멸망의 책임을 온통 뒤집어 쓰기도 하고, 반대로 큰 뜻을 펼치지 못한 비운의 영웅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권력을 장악한 연개소문이 당에 대해 처음부터 강경한 자세를 취한 것은 아니었다. 당에 도교의 유포를 요청하는 등 화평책을 써서 가능한 한 당과의 전쟁을 피해 보려는 노력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던 연개소문이 강경한 입장으로 돌아선 것은, 당 태종이 고구려 침략의 명분을 연개소문의 ‘대역죄’를 징벌하는 데에서 구하였기 때문이다. 즉 연개소문의 입장에서는 당의 침략 명분이 자신의 정변에 맞추어져 있는 이상 더 이상 물러날 여지도 없었다.

연개소문은 강렬한 카리스마를 발휘하며 고구려를 이끌고 당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그만큼 그의 죽음은 곧바로 권력의 공백을 초래하여, 아들들이 권력을 다투고 많은 귀족이나 지방 세력들이 대당 항쟁의 전선에서 이탈함에 따라 고구려의 멸망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는 연개소문이 권력을 자신의 일신과 가문에만 집중시켜서 정상적인 정치 운영체계를 파탄시킨 결과였다. 따라서 연개소문은 대외 정책이나 대내 정책 모두에서 안정을 이루는 데에는 결국 실패한 셈이다.

그의 정변으로 시작된 한바탕 소용돌이 속에서 그 자신의 영웅적인 이미지는 뚜렷해졌지만, 고구려는 점차 멸망의 길로 빠져들고 있었다.

<임기환 고구려연구재단 연구기획실장>

(조선일보 2004-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