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바로보기] 23. 고구려·백제·신라는 한 민족인가

요즈음 많은 독자들이, 삼국은 한 민족이었는지를 물어온다. 흔히 민족의 구성원리는 혈연, 언어, 풍속(문화)이 동일한지를 기준으로 삼는다. 이런 일반적 기준에 맞추어 요약해서 이 문제를 풀어보려 한다.

중국에서는 고대 동방의 여러 종족을 뭉뚱거려 동이족(東夷族)이라 불렀다. 동이족의 갈래로는 구이(九夷)가 있다고도 했고 예맥족(濊貊族), 말갈족(靺鞨族), 한족(韓族), 왜족(倭族)으로 나누어 부르기도 한다.

동이족을 거주지역으로 보면 오늘날의 만주(동삼성), 한반도, 일본과 러시아 일부 지역을 포괄한다. 아주 광범위한 개념의 용어였다. 오늘날 중국 학자들은 ‘동북공정’의 이론적 기초로, 고구려를 다민족으로 구성된 국가로 규정한다.

실제로 예맥족(또는 부여족), 말갈족과 일부 북쪽의 선비족, 흉노족 등이 포함되어 있어서 정확하게 말하면 이 규정은 틀린 것이 아닐 것이다.

- # 北 부여계―南 한계 결합 삼국 형성 -

하지만 예맥족이 고구려를 건국하고 지배세력으로 군림했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예맥’은 ‘더럽고 사납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夷)는 초기에는 ‘어질다’거나 ‘활을 잘 쏘는 사람들’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었으나 차츰 오랑캐로 변질되어 갔다. 예맥은 이런 의식에서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물론 그들 스스로는 이런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다.

고구려는 북쪽에서 살아온 부여의 한 갈래였다. 다시 말해 부여와 고구려는 같은 계통이었으며 마지막 단계에서는 통합되었다. 고구려의 한 갈래인 비류계와 온조계는 남쪽으로 내려와 백제를 건국하면서 부여계임을 표방했다. 따라서 고구려와 백제를 세운 민족은 같은 혈연관계를 지녔다.

그러면 한족은 어떤 관계에 있었던가? ‘한’(韓)은 크게 마한·진한·변한 등 셋으로 나뉘어져 있었다고 한다. 마한이 한때 종주국 노릇을 했다. 삼한은 대체로 오늘날 경기도·충청도·전라도·경상도를 영역으로 했다.

백제는 마한지역에서 일어나 마한을 흡수했다. 진한 땅에서 신라가 건국되었으며 변한은 백제와 신라에 병합되었다. 따라서 북쪽의 부여계와 남쪽의 한계가 결합하는 모양새였다. 신라계는 말할 나위도 없이 북쪽(고조선)에서 이주해온 집단이었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우리 민족의 기원을 몽골계라 규정해 왔다. 이는 까마득한 옛적부터 북방으로부터 끊임없이 따뜻하고 농사 짓기에 좋은 한반도 남쪽으로 이주해왔다는 의미이다. 또 한반도 해안에서 일본의 규슈 등지로 건너간 것이다. 이로 보면 일본도 광의의 동이족의 범위에 든다.

어느 민족이든지 살길을 찾아 끊임없이 이동한다. 그래서 여러 종족의 혈통이 뒤섞여 개체를 구별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유전자 분석에 따르면 동이족에 드는 민족이 동일의 혈통임이 증명된다고 한다. 다시 말해 동이계는 러시아계나 중국계와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맥이니 한이니 하는 구별은 의미가 없다는 말이 될 것이다.

한자 영향속 ‘이두’로 표기…통역 불필요

다음으로 언어를 알아보자. 같은 언어의 사용은 민족의 동질성을 확인시켜주는 가장 기본 원리에 속한다. 아무리 혈연관계가 있더라도 같은 언어를 사용치 않으면 이질감을 갖게 된다. 삼국은 모두 한자를 사용하는 언어권에 속했다. 하지만 우리 고유의 언어는 한문 구조와 사뭇 다르다.

하나의 손쉬운 보기를 들면 어순부터 달랐다. “나는 경주에서 왔다”고 표현할 적에 한문 어순은 ‘아래 경주’(我來慶州)로 표기한다. 곧 목적어와 보어가 한문은 도치되어 있으나 우리말은 목적어나 보어를 중간에 두는 것이다. 한문은 영어투와 같다. 하지만 몽골어·만주어·일본어는 우리 어순과 같다.

 

그러니 우리말을 한자 또는 한문 투로 쓸 적에 여간 장애가 놓여있는 것이 아니었다. 고구려는 먼저 이두를 만들어 사용했다. 이두는 한자를 빌려 우리 음과 문장을 표기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고유명사로 우리 음인 땅 이름, 사람 이름, 벼슬 이름 또는 우리말의 어순에 따라 의사를 표기하는 방식이다.

고구려에서 처음 사용한 이두는 백제·신라는 말할 것도 없고 고려·조선으로 이어져왔다. 뜻글자인 한문을 소리글자로 바꾼 것이다. 이두는 공문서와 가사 또는 편지에서 사용되어 우리말의 고유성을 살렸던 것이다.

그러면 삼국이 같은 언어를 사용했다는 증거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신라의 장수 거칠부는 고구려를 염탐하기 위해 고구려 땅으로 들어갔다. 그는 고승 혜량(惠亮)의 설법을 들었다. 거칠부가 고구려를 공격할 때 길가에서 혜량을 만났다. 거칠부는 혜량이 신라로 망명하러 오는 것을 확인하고 인도했다. 고구려의 승려 도림(道琳)은 백제로 들어와 간첩 노릇을 했다. 그는 개로왕과 바둑을 두면서 백제를 피폐시키는 공작을 꾸몄다. 혜량과 거칠부, 개로왕과 도림은 통역을 두지 않고 의사소통을 했던 것이다.

초기 신라는 후진 곳에 도읍을 정하고서 중국의 나라들과 교류를 거의 트지 않았다. 백제와 신라가 동맹을 맺고 우호관계를 유지할 무렵, 신라는 백제에 중국 남쪽 나라들과 교류를 주선해달라고 부탁했다. 어느 때 신라와 백제의 사절일행이 중국 남쪽으로 들어갔다. 이때 백제의 사절이 중간에서 신라말을 통역해 의사를 전달하였다.

신라와 백제 사람들은 의사를 소통할 적에 통역이 필요치 않았으나 중국 사람들을 상대할 때에는 달랐던 것이다. 그러니 세 나라 사람들은 통역이 필요치 않을 정도로 같은 언어를 사용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지역에 따라 방언이 남아 있는 걸 보면 세 나라는 의사소통이 가능할 정도의 방언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온돌·주름치마등 中과 다른 문화 공유

다음 풍습(문화)을 알아보자. 풍습의 유사성은 여러 분야에서 확인된다. 사상과 신앙에서 중국의 영향을 받아 공통으로 유불선을 추구한 것 말고도 건축 미술 등의 분야에서 중국과 아주 다른 경향들이 많다. 풍습에서는 더욱 차이가 많다. 보기를 몇 가지만 들어보자.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여자들이 주름치마를 입고 있는 모습들이 그려져 있다. 중국 여자들은 주름치마를 입지 않는다. 주름치마는 몽골과 한민족이 입었다.

온돌은 고구려에서 전래되었다. 중국 사람들은 침상(寢牀)에서 잠을 자지만 한민족은 온돌에서 잠을 잔다. 백제와 신라 사람들도 침상을 거의 사용치 않았고 오늘날에도 주거생활에서 한민족이 온돌방을 유지하고 있다. 음식에서도 한민족은 밥이 주식이었고 조리법도 시루와 솥을 이용한다. 중국 사람들은 빵을 주식으로 하고 조리법도 주로 프라이팬을 이용한다.

그밖에 씨름, 윷놀이와 주택, 무덤 등에서 삼국이 공통성을 지니고 있었고 그 양식이 고려·조선으로 이어져 왔다. 중국과 사뭇 다른 양식이었던 것이다. 위의 몇 가지를 통해서도 삼국은 민족의 동질성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만주의 150만 조선족은 고구려 아닌 신라후예 ?

지금 중국의 동삼성(만주)에는 ‘조선족’이라 부르는 한민족이 약 1백50만명 살고 있다. 그 유래는 아주 길고 복잡하다. 1860년대부터 연길지방으로 집단 이주를 시작한 뒤 해마다 늘어났다.

특히 한일병합이 이루어진 뒤 많은 독립지사들이 만주로 이주했다. 그리하여 1930년에는 만주지역에 우리 동포 70여만명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1932년 위만(僞滿, 만주제국)이 성립된 뒤에는 사정이 달라졌다. 일본 당국은 만주지방의 광대한 농토를 개간하고 풍부한 지하지원을 개발키 위해 이른바 농업이민을 장려하거나 강요했다.

그 결과 종전보다 5배의 증가율을 보였다. 이들을 집단개척민이라 불렀다. 1942년 무렵에는 만주지방 동포의 숫자가 1백56만여명을 헤아렸다.

1939년 집단개척민의 지역별 분포를 보면, 충청도 25%, 전라도와 경상도 35%, 강원도 5%였다. 개척민은 거의 3도에 집중되었음을 알려준다. 이때의 개척민은 함경도와 평안도의 선주이민과 구별된다.

근래 필자는 베이징에 다녀온 적이 있다. 그곳에서 할아버지가 충청도 출신인 길림성에서 온 한 청년을 만났다. 그의 입에서 두 가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어릴 적에 중국 아이들은 자신을 보고 “거우리 팡스”라고 욕질을 했다고 한다. 곧 ‘고구려 새끼’라는 얕보는 뜻을 담았다.

또 자신은 비록 조선족학교에 다니면서 한국어를 배웠으나 한국 역사는 배운 적이 없다고 한다. 중국 당국은 소수민족 우대정책으로 자치구를 두고 언어 풍습을 유지케 했으나 자신의 뿌리를 알 수 있는 한국역사는 결코 가르치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근래 ‘동북공정’이 추진된 뒤 새로운 사태가 발생했다. 조선족 특히 삼남지방 출신들을 “고구려 후예”라 하지 않고 “신라의 후예”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멋모르는 조선족들도 이에 따라 “신라의 후예”라고 서슴없이 대답한다는 것이다. 고구려는 중국 소수민족이 세운 나라이므로 조선족과는 관련이 없다는 뜻이다.

자, 조선족은 고구려의 후예인가, 신라의 후예인가? 교묘한 분리정책이 아닌가?

<이이화 / 역사학자>

(경향신문 2004-1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