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중화패권주의 ⑥] 티베트 유혈진압·동북공정 몸통

후진타오, 그 미소 속에 감춰진 것은? 

▲ 후진타오 중국 공산당 총서기
ⓒ2004 연합뉴스
1989년 3월5일 1만명의 티베트인들이 라싸 인민광장에 몰려들었다. 티베트 국기인 '설산사자기(雪山獅子旗)'를 든 군중들은 "달라이라마가 돌아와 티베트를 통치하는 것을 환영한다"고 외쳤다.

그 해 3월10일 중국의 티베트 강점에 반발한 무장 봉기 30주년을 앞두고 고조되던 긴장이 마침내 폭발한 것이었다. 59년 봉기 때 티베트인 10만여명이 사망했다.

독립요구 시위는 87년부터 간헐적으로 벌어졌다. 그러다 베이징에 사실상 연금상태로 있다 89년 초 티베트로 돌아온 제10대 판첸라마가 51살의 나이로 1월28일 입적하자 심각해졌다. 티베트인들 사이에는 "독립요구 발언을 하던 판첸라마가 암살됐다"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 퍼졌다.

3월5일 흥분한 군중들은 중국 무장경찰과 충돌했다. 20여대의 소방차와 경찰차가 불에탔다. 다음날 시위대에는 화염방사기와 기관총이 난사됐다. 무장경찰들은 거리를 휩쓸며 시위자들을 수색했다. 잡혀온 많은 사람들은 진압 곤봉에 맞아죽었다. 3월7일 시위는 완전하게 진압됐고 다음 날 라싸에는 계엄령이 선포됐다.

중국 정부는 티베트인 16명과 무장경찰 한 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티베트 망명정부는 250~300여명이 사망하고 350여명이 실종됐다고 반박했다.

3월7일 <티베트일보>에는 이 지역의 최고 권력자인 티베트 공산당 서기가 철모를 쓰고 계엄군과 함께 라싸 거리를 장악한 사진이 실렸다. 이 젊은 서기는 티베트에 부임한 지 불과 2개월 밖에 안됐다. 또 그는 1965년 티베트 자치구가 성립 이후 부임한 공산단 서기 가운데 군인 출신이 아닌 유일한 인물이었다.

계엄군을 진두지휘하며 라싸 거리를 피로 물들였던 당시 티베트 공산당 서기가 바로 후진타오(62)였다. 불과 3개월 뒤 6·4 천안문 사태로 1400명이 사망했을 때 후진타오의 티베트 공산당 위원회는 중앙당을 적극 지지하는 전보를 보냈다.

"영리하지만 과단성이 없다"는 꼬리가 따라붙었던 후진타오는 티베트 사태의 처리 뒤 덩샤오핑으로부터 "그는 원칙문제에 있어 입장이 분명하다. 절대 연약한 사람이 아니다"라는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티베트 독립시위 강경 진압으로 승승장구

1989년은 중국 공산당 최대 위기의 시절이었다. 티베트 독립시위와 천안문 사태가 발생했다. 10월에는 달라이라마가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그리고 11월에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이런 와중에 후진타오의 티베트 처리는 그가 승승장구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1992년 10월 50살의 후진타오는 한꺼번에 3계단을 뛰어올라 중국 정치의 최고 지도부인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7명 안에 들어갔다. 장쩌민 공산당 서기는 원래 후진타오를 수리부장에 임명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덩샤오핑이 "내 보기에는 후진타오가 괜찮은 사람이오"라는 단 한마디로 그의 운명은 결정됐다.

92년 당 서열 7위였던 후진타오는 97년 15회 당 대회 때는 5위로 올라섰다. 2002년 16차 당 대회 때는 공산당 총서기, 2003년에는 국가 주석이 됐다.

지난 9월19일 장쩌민 중앙군사위 주석이 자신의 자리를 물려줌으로써 후진타오는 당·군·정을 모두 장악했다. 그에 대한 언론들의 평가는 대부분 호의적이었다.

후진타오는 '온건파' 또는 '중국의 정치개혁을 선도할 개혁파'로 분류됐다. 잘 생긴 얼굴에 세련된 매너가 돋보였다. 후진타오의 기본적인 정치철학은 '이인위본(以人爲本·국민을 우선에 둠)'이라고 소개됐다.

한 중국 학자는 "후진타오는 과학적 발전관을 내세운다. 핵심내용은 도시와 농촌, 동부연안과 내륙지역, 경제와 사회, 인간과 자연의 균형발전"이라며 "덩샤오핑의 선부론(先富論)을 고수한 장쩌민의 경제성장 우선론에 비해 훨씬 진보적"이라고 말했다.

후진타오는 빈부 격차 해소에 중점을 둔다. 젊은 시절 간쑤성에서 엔지니어로 일한 것을 비롯해, 구이저우와 티베트의 당 서기를 지냈다. 가난한 지역에서 오랫동안 근무했다. 덩샤오핑의 후원으로 상무위원이 됐다는 것 자체가 후진타오에는 '무엇인가 있다'는 신비감을 더했다. 구이저우 성 당서기로 있을 때 '자산계급 문예이론가'로 몰렸던 문학평론가인 류짜이푸에게 도피처를 제공한 것도 신선한 이미지다.

▲ 지난 2001년 7월20일 티베트 해방 50주년 기념식을 앞두고 중국 무장경찰이 라싸의 죠캉 사원 앞에서 경계를 펴고있다. 후진타오 당시 국가 부주석은 중앙대표단을 이끌고 티베트를 방문했다. 출처 : www.tibetinfo.net

소수민족 문제에 있어 대단히 강경

후진타오가 온건파라는 평가는 그가 한 때 후야오방 전 공산당 총서기의 신임을 받았다는 점 때문에 부각됐다. 1980년대 초반 덩샤오핑의 후계자로 지목됐던 후야오방은 개혁·개방을 현장 지휘한 사람이다. 그러나 정책이 급진적이고 86년부터 빈발하기 시작한 대학생들의 민주화 요구시위에 온정적이었다는 이유로 87년 1월 덩샤오핑에 의해 축출됐다.

천안문 사태도 후야오방이 89년 4월 사망하자 대학생들이 그를 추모하고 보수파를 비판하면서 시작됐다. 그의 후임자였던 자오쯔양은 강경진압을 반대하다가 실각했다.

후야오방은 소수민족 문제에 있어서 대단히 너그러웠다. 1980년 후야오방은 직접 티베트를 시찰해 비참한 주민생활을 직접 봤다. 그는 "그동안 중앙정부에서 내려보낸 지원금은 모두 란창강(중국 남서부를 흐르는 강)에 처박았나?"며 "이것은 식민통치나 다름없다"고 현지 관리들을 비판했다.

후야오방은 극좌파인 당시 티베트 공산당 서기 런롱을 쫓아내고 유화정책을 폈다. 1981년에는 망명중인 "만약 달라이라마가 귀국한다면 전국인민대표대회 부위원장으로 임명하겠다"고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그러나 1988년 12월 티베트 공산당 서기로 임명된 후진타오는 후야오방의 티베트 정책을 완전히 뒤집었다. 1994년 7월 제3차 티베트 사업회의에서는 장쩌민, 주룽지, 후진타오 등 상무위원 7명 전원이 참가한 가운데 후야오방 노선을 다시 맹비판했다. 후야오방은 사후에 다시 한번 정치적으로 매장됐다.

후진타오는 간쑤성, 구이저우성, 티베트에서 오랜 공직 경험이 있다. 모두 소수민족들의 집중 거주지역이다. 그러나 티베트 유혈 사태의 원인에 대해 후진타오는 "외부 세력이 중국을 분열시키려는 음모"라고 단정했을 뿐 소수민족 정책의 문제점은 지적하지 않았다.

후진타오는 티베트족 간부와 공무원에 대한 대대적인 사상 교육과 숙청작업을 벌였다. 지난 2002년 11월 후진타오가 공산당 총서기에 임명되자 '티베트자유운동'은 성명을 내고 "후진타오의 정책은 티베트를 과거 문화대혁명 시기로 되돌렸다"며 "그는 온건파 또는 개혁파 지도자라는 평가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비판했다.

후진타오의 최대 후원자는 강경파인 쑹핑과 치아오쓰, 특히 쑹핑이었다. 1980년 간쑤성 공산당 서기였던 쑹핑은 후진타오를 대단히 마음에들어했다. 그는 후진타오를 급속 승진시켰고 중앙 정계에 소개했다. 후진타오가 1992년 상무위원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쑹핑이 은퇴하면서 자기 자리를 그대로 물려줬기 때문이었다.

후진타오는 국내 문제 특히 경제 분야에 있어서는 온건파라고 부를 만하다. 그러나 대외정책과 소수민족, 정치적 안정 문제에 관한한 이전 지도자들보다 더 적극적이고 강경하다.

후진타오는 신비한 인물?

후진타오는 미스테리가 많다. 일단 덩샤오핑이 1989년 장쩌민을 후계자로 만든 뒤 불과 3년만에 왜 다시 후진타오를 그 다음 후계자로 지목했느냐는 것이다. 장쩌민의 후계자는 장쩌민 본인한테 맡겨야 했는데 말이다.

그의 진짜 능력이 무엇인지도 의문이다. 1985년부터 1988년까지 후진타오는 구이저우 당서기를 지냈다. 그러나 구이저우는 여전히 중국에서 가장 가난한 곳이다. 티베트 소요 사태는 진압했지만 여전히 불안하다.

1989년 1월 가족들을 베이징 두고 티베트에 단신 부임했던 후진타오는 고산병을 얻어 1991년 1월 티베트를 떠났다. 이후 1992년 10월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 될 때까지 티베트 당서기 직함을 보유했지만 현지에는 없었다. 계속 베이징에서 업무를 봤다. 이 때문에 "후진타오를 보려면 라싸가 아니라 베이징의 병원에 가야한다"는 우스개소리가 나왔다.

후진타오의 전임 티베트 당서기 우징화는 리(黎)족 출신 소수민족이었다. 그는 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티베트 당서기 직에서 물러났었다. 그런데 같은 기준이 후진타오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공산당 조직과 이데올로기 담당

후진타오를 비롯한 제 4세대 지도부에 대해 <후진타오>(한국경제신문)의 저자 양중메이는 "새롭고 폭넓은 국제적 시야를 가지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대단히 고지식하고 강경한 민족주의자적 성향을 갖고있다"고 평했다. 이런 평가는 곳곳에서 사실로 확인된다.

후진타오는 동북공정을 직접 지시한 인물이다. 국내 언론들의 보도대로 중국공산당 헤이룽장성 헤이허시위원회 선전부 간행 <헤이허일보>는 지난해 8월5일 "동북공정은 후진타오 동지가 2000년 중국사회과학원을 통해 지시해 승인한 사회과학 연구항목"이라고 보도했다.

<한겨레>는 올 8월13일 퉁화사범대학의 고구려연구소 내부자료를 인용, "1998년 연 고구려 학술 토론회가 중앙 영도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며 "이후 후진타오 당시 국가 부주석(현재 주석) 등이 잇따른 중요한 지시를 내렸고 고구려 연구가 대대적으로 추동됐다"고 보도했다.

일부 중국 전문가들은 "작은 지방신문의 보도를 근거로 후진타오가 동북공정을 지시했다고 단정하는 것을 정확치않다"라고 반박한다. 그러나 많은 중국 소식통들은 "동북공정이 1999년 무렵 후진타오 당시 국가 부주석의 지시 또는 승인을 받고 진행됐다"고 확인했다.

이는 후진타오의 경력에서도 확인된다. 1992년 중앙상무위원으로 재직할 때 그는 공산당 조직과 함께 이데올로기 분야를 담당했다. 후진타오는 중국 공산당의 인재양성 및 최고 사상 학습 기관인 중앙당교 교장을 93년부터 9년간이나 지냈다.

현재 중국의 외교정책은 화평굴기(和平掘起)로 표현된다. "평화스럽게 중국이 우뚝 선다" 정도로 번역된다. 이 말은 2003년 10월 전 중앙당교 부교장인 정비센이 처음 사용했다. 이 발언을 후진타오가 적극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널리 알려졌다. 정비센은 후진타오가 중앙당교 교장을 할 때 그의 중요한 조수였다.

화평굴기가 '부국강병'과는 차이가 있는 개념이라는 해석도있다. 그러나 화평굴기는 기본적으로 부국강병을 전제로 한다. 이는 최근 중국 정부 지도자들이 "화평굴기에 패권주의적 냄새가 난다"는 중국 외교부의 지적을 받아들여 '화평발전'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서도 드러난다.

▲ 지난 9월9일 중국 베이징 시내에 있는 군사박물관에서 시민들이 한국전쟁 때 중국군이 노획한 미군 탱크들을 구경하고 있다.
ⓒ2004 오마이뉴스 김태경

화평굴기는 후진타오의 구호

화평굴기는 '중국 위협론'에 대응해 나온 논리로, 평화를 강조한다. 그러나 '굴기'라는 말에서 중국의 궁극적 목표가 드러난다. 덩샤오핑이 제창했다는 '도광양회'(韜光養晦:빛을 감추고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힘을 기른다)와는 차원이 다르다.

도광양회는 중국이 개혁·개방 과정에서 미국 등 선진국의 협조가 필요했던 시절에 나온 것이다. 무엇보다 사회주의권 몰락 등 불리한 정세에서 중국이 취한 생존술이었다.

장쩌민은 도광양회를 고수했다. 그러나 2000년 초부터 중국의 젊은 학자들을 중심으로 도광양회에 대한 비판이 나왔다. "힘을 기른다면서 해야할 일이 있을 때 제대로 일을 못했다", "결과적으로 미국의 전 세계 패권주의 전략을 묵인하고 방조했다"는 것이었다.

후진타오가 화평굴기를 적극적으로 내세운 것은 그만큼 자신감이 생겼다는 말과 동시에 장쩌민 노선에 대한 비판이었다.

'중국 위협론'이 나올 정도로 적극적인 중국의 대외정책은 현실적인 요구이기도 하다. 중국 국력이 성장할 수록 해외에서의 국익 확보가 중요하다. 특히 경제성장에 필요한 에너지 확보는 핵심적이다.

중국은 10년 전만 해도 석유 수출국가였지만 지금은 소요량의 40%를 수입한다. 그런데 중동지역과 석유 수송로가 모두 미국의 영향력하에 있다. 중국 입장에서는 이에 대한 대응정책 수립이 필요하다.

베이징에 있는 군사박물관에서 가장 돋보이도록 전시된 무기 가운데 하나가 중국에서 항미원조(抗美援朝)전쟁으로 부르는 한국전쟁 때 사용한 미그 15 전투기다. 왕하이라는 조종사는 이 전투기를 타고 미군기 9대를 격추시켜 '일급 전투 영웅' 훈장을 받았다.

미군 탱크 6대와 박격포 9문 등을 파괴했다는 한 T-34 탱크에는 '215 인민영웅 탱크'라는 칭호가 붙어있다. 한국전쟁 때 중국군이 노획한 미군 탱크들, 60년대에 중국 상공에서 격추된 미군 U-2의 잔해 등도 전시되어있다. 50년 전 중국과 미국이 싸운 흔적들이다.

중국이 '굴기'하기 위해서 미국과의 충돌은 피하기 힘들 것이라는게 대체적인 관측이다. 중국은 현재 이를 준비하는 과정이다.

"중국 해외에너지개발로 한국 타격 우려"

중국이 해외 석유자원 확보에 본격적으로 나서면서 우리나라의 해외 유전개발이 큰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전망됐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10월13일 '중국의 석유자원 확보전략과 시사점' 보고서를 통해 "중국이 석유안보 차원에서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등 주변지역과 에너지 개발협정을 추진하는 등 미국과 국제정치 불안에 좌우되지 않는 에너지 공급라인 확보에 집중하고 있다"면서 "이런 노력은 해외 유전개발기회를 축소시켜 우리나라의 장기 석유개발권 확보에 큰 장애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 보고서는 "중국의 석유수요가 급증하는 상황에서 우리나라가 시베리아, 중앙아시아 등에서 안정적 석유공급선을 확보하지 못하면 향후 국제석유 시장상황에 크게 휘둘리고 에너지위기에 내몰릴 수 있다"고 우려했다. 전경련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이 세계 원유 수입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현재 3.6%에서 2025년께는 9.6%로 늘어나고 중동산 원유 의존도는 45%에서 최대 66%에 달 할 것으로 전망된다.

중국 입장에서는 미국의 영향력이 상존하고 있는 중동산 원유 의존도가 높고 또 중동-인도-동남아 해상으로 이어지는 원유 수입라인이 미해군에 의해 통제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석유안보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전경련 보고서는 "정부가 민간기업의 해외 에너지 개발에 대해 외교적 지원에 나서는 민관 합동체제가 조속히 구축돼야 한다"고 강조하고 에너지자원 확보 전략을 종합적으로 수립하고 관리하는 정부기구의 설립도 필요하다고 밝혔다. / 연합뉴스

(오마이뉴스 / 김태경 기자 2004-1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