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한국 국제학교장이 서울에 띄운 편지

"자유 찾아온 탈북자 29명 안내보내면 학교 문닫을판"
1년 35만달러 주고 교실임대… 中 건물주는 "공안에 넘겨라"

지난 22일 중국 베이징 한국국제학교에 탈북자 29명이 진입했다. 당시 교장실에서 이들의 갑작스러운 진입을 맞았던 김태선(金泰善) 교장이 조선일보에 글을 보내왔다. 김 교장은 ‘이번 일로 한국국제학교가 겪게 될 어려움, 국제학교 학생들이 배운 것’에 대해 쓰고 싶었다고 했다. 다음은 김 교장 글 요약.

탈북자와 함께한 2박3일

“교장 선생님, 살려 주십시오.” 일군의 낯선 이들이 교장실로 들어와 말했습니다. ‘살려 달라니, 이들이 대체 누구란 말인가?’

한국국제학교 신축기금 조성 문제로 통화 중이던 수화기를 그대로 든 채 대표자 격인 젊은 남자의 ‘살려 달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말이 온몸을 타고 흘러내렸습니다. 누구냐고 물어볼 틈도 없었습니다.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추측이 순식간에 지나갔으며 그중의 하나가 적중하였습니다.

‘탈북자!’

시끌벅적한 등교가 끝나고 교실에서는 막 1교시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북에서 온 29명의 우리 학교 더부살이는 시작되었습니다. 북경한국국제학교의 영어 명칭 머리글자는 ‘KISB’이고 이를 한국어로 발음하면 ‘기습’인데, 정말 기습 작전과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탈북자들이 한국학교에 들어온 것은 처음 있는 일입니다. 우리는 대사관의 지침을 기다리며 대책 회의를 열었습니다. 회의 결과 그들이 이곳에 머무는 동안 성의껏 돌봐 주자는 견해가 많았습니다. 탈북자들 중에는 노인과 어린이도 함께 섞여 불안하고 긴장된 눈빛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한국 내에서는 이들에 대해 부정적인 분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탈북자의 배후에는 이들의 정착금을 노리는 세력이 있다거나, 정말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은 따로 있다, 혹은 이렇게 대거 탈북자들이 들어오면 사회적 혼란은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등 여러 가지 염려하는 부분에 대해 고민도 하였습니다.

정말 어려웠던 문제는 다른 데 있었습니다. 우리 학교는 아직 자체 건물이 없어서 1년에 35만불의 임차료로 중국 학교 일부를 임차하여 쓰고 있습니다. 건물의 주인인 중국학교 재단측에서 수시로 찾아와 공안(경찰)이 그들을 잡아가게 하라는 식으로 강력하게 요구했습니다. 중국 학부모들이 탈북자들이 폭력을 휘두를지 모른다면서 중국학교측에 탈북자를 방치한다고 거세게 항의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학부모들을 무조건 나쁘다고 할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저를 놀라게 한 것은 이 문제가 조속히 해결되지 않으면 우리 학교와의 임대계약을 파기할 수밖에 없다는 충격적인 말이었습니다.

‘그러면? 또 이사를 해야 해?’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개교 후 지금까지 6년간 무려 네 차례나 이사를 해야 했습니다. 학생과 책걸상, 교구 등을 끌고 다시 다섯 번째의 이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기가 막혔습니다.

중국에서는 외국인에게 학교 건물을 빌려주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어렵사리 세든 학교에서도 태극기를 걸고 조회를 하다가 공안에 불려간다든지 또 중국의 고위인사가 시찰 온다고 하여 우리 학교 전교생의 수업을 중단하고 하교시켜야 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이제 800여명의 대가족을 이끌고 어디로 가야 한다는 것인지 막막하였습니다.

이런 한편으로는 중국의 고구려 역사 빼앗기인 동북공정이나 이번 탈북자 사건은 우리 학생들에게 뜨거운 역사의 현장을 제공하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믿습니다. 이곳에서 산 교육을 받은 우리 학생들이 누구보다 조국의 소중함을 체득하여, 장차 애국인으로 또 중국 전문가로 성장해 줄 것을 말입니다.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이어서 발생하는 이 형언 불가한 비극이 언제나 종결지어질는지 아득하지만 더 이상 목숨을 걸고 탈북하는 이들이 발생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되기를 바라며, 오늘 아침에도 우리 학생들이 밝은 웃음으로 등교하는 것을 바라봅니다.

(조선일보 2004-1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