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연재] 제자, 스승에게 길을 묻다

문 "오늘날 우리는 후손에게 무엇을 남겨야 하나요"
답 "역사가 목적대로 되나… 反面敎師가 돼야지"

조유전(趙由典·62)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은 ‘한국 고고학의 산 증인’으로 불린다. 서울대 고고인류학과를 졸업한 뒤 발굴 현장 속으로 뛰어든 그는 1971년 무령왕릉 발굴을 시작으로 1977년 경주고적발굴조사단장을 맡으며 30여년 동안 안압지·황룡사지·감은사지·천마총 등 한국사 주요 유적의 발굴조사를 주도했다.

현재 동아대 초빙교수와 문화재위원이며 ‘한국 선사고고학사’(공저) ‘발굴 이야기’ ‘한국사 미스터리’ 등의 저서를 냈다. 김용민(金容民·39)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장은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하고 1993년 조 소장이 국립문화재연구소 유적조사연구실장일 당시 학예관으로 들어오면서 인연을 맺었다. 부소산성·미륵사지 등지의 조사 현장에서 지도를 받았고, 학교의 선배이자 직장 상사로서 학문과 인생에서 많은 가르침을 받아 왔다.

김용민 =선생님께서는 고고학과 문화유산 발굴에 평생을 쏟으셨습니다. 몇 년동안 국립민속박물관장을 지내기도 하셨지만 대부분 국립문화재연구소에 계셨지요. 선생님은 62학번이시고 저는 83학번인데, 1984년도로 기억되는데요. 학과 신년하례식 때 삼불(三佛) 김원용(金元龍·1922~93) 선생님께서 “국내 고고학 박사 1호가 탄생했다!”며 조유전 선생님을 자랑하셨던 생각이 납니다. 그 뒤로 발굴현장에서도 숱하게 뵈었죠.

조유전 =서울대 고고인류학과를 졸업하고 워낙 발굴 현장을 보따리 장수처럼 돌아다녔어요. 참 주마등처럼 지나갔어요. 학부를 졸업한 지 꽤 시간이 흐른 뒤에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삼불 선생님께서 학위심사를 하셨어요. 결과적으로 국내에선 제자 중에 학위를 준 첫 번째였다는 얘긴데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더 정진해야 하는데 부끄러울 뿐이지요.

김 =지금은 국내 고고학도 매우 세분화됐습니다만, 선생님께선 고고학의 전 분야를 두루 섭렵하신 세대이셨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저희 학교 다닐 때 공부했던 선생님의 여러 논문 중에 ‘한반도 무문토기 문화의 전개’가 생각납니다. 우리나라 고고학의 획을 그었던 논문들이 아닙니까? 그 당시 발굴 못지않게 정력적으로 글을 쓰셨지요?

김 =제가 2학년 때 경주로 유적답사를 갔었습니다. 선생님과 이건무(李健茂·현 국립중앙박물관장) 선생님이 동행하셨지요. 그때 이 선생님께서는 저희들에게 “서울대라고 자만하지 말고, 이론에 치우쳐서 현장을 무시해선 안 된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조 선생님께선 “당구를 하다 보면 ‘스리 쿠션’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파이브 쿠션’이 될 수도 있다”는 말씀을 하셨던 게 기억이 납니다. 그게 무슨 뜻이셨는지요?

조 =내가 당구를 좋아해서 그런 말을 했던 것은 아니고…. 그건 이런 뜻이었습니다. ‘스리 쿠션’이라는 것은 정식 코스이지요. 하지만 어디 반드시 그 코스대로만 가게 되겠습니까? 길을 가다 보면 목표에 빨리 도달할 수도 있고, 돌아갈 수도 있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한 말입니다. 발굴이 꼭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발굴현장이라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고, 누구나 그걸 느끼지 못하면 고고학자가 될 수 없겠지요. 그런데 너무나 이론에만 치우쳐서 파기 시작하면 ‘여기 있을 것이다’ ‘저기 있을 것이다’ 이렇게 속단할 수가 있는데, 이런 것은 정말 금물입니다. 내가 항상 강조하는 말 중에 “땅 속은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게 있습니다. 유물이나 유구(遺構·옛 구조물의 흔적)가 어디로 도망갈 리는 없지 않습니까? 사심이나 선입견을 가지고 발굴하면 안 된다는 게 내 소신입니다. 예컨대 ‘기록상으로 봐서 틀림없이 여기에 우물터가 있을 것’이라는 사고방식을 버려야 합니다. 조사를 해 보면 명백히 나오는 것이고, 그것이야말로 고고학자의 입장에서 고고학적으로 접근하는 태도입니다. 고고학은 기록을 가지고 하는 학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발굴을 하면 우물터도 나오고 살림살이도 나오는데, 어설픈 기록을 보고 찾으려다 보면 망치고 실수하기 쉽다는 교훈이 있습니다.

김 =지금까지 그렇게 많이 참여하셨던 발굴조사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입니까?

조 =역시 1971년의 공주 무령왕릉 발굴입니다. 고고학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확실한 ‘왕릉’의 발굴이었지요. ‘백제 사마왕(斯麻王)’이라 적힌 명문이 발견된 것은 그야말로 꿈에도 잊지 못할,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감격스런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관 장식, 돌짐승, 베개 같은 숱한 유물들…. 그때 발굴단 막내였던 나 역시 너나없이 흥분했던 그 날의 기억이 생생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2~3년이 걸려도 끝나지 않을 대발굴인데, 당시엔 11시간만에 후다닥 끝냈습니다. 그 일이 머리에서 지워진다면 거짓말이겠고, 나는 그 일에 대해 두고두고 고백성사를 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세계에 없는 유물을 찾아냈고 아무도 손대지 않은 무덤을 발굴했다는 기쁨도 있었던 반면, 완전히 이 세계를 떠나고 싶은 갈등도 있었지요. 이 일은 교훈이 돼야 합니다. 다시는 이런 졸속 발굴이 있어선 안 될 것입니다. 비록 조사원으로 참여한 사람이라 해도, 팀장의 지도가 잘못된 것이었다고 해도 궁극적으로는 다 같이 책임을 져야 하는데…. 비록 하루를 가서 품을 팔더라도 우리는 역사적인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유적만큼은, 함부로 덤벼서는 안 됩니다.

김 =제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근무하던 1987년에 경복궁 서문 쪽으로 밤 10시쯤 퇴근하다보면 당시 국립문화재연구소 건물 5층에 있던 유적조사실에 늘 불이 켜져 있었습니다. 항상 밤늦게까지 연구하셨던 건가요?

조 =그 당시에 국립문화재연구소 유적조사실이야말로 우리나라 고고학을 아우를 수 있을 중요한 계기였습니다. 하지만 인력이 없어 결국 몸으로 때울 수 밖에 없었고…. 밤늦게까지 정리하고 보수하고 준비하다 보니 그런 게 다반사였습니다. 아마 지금 그렇게 한다면 후학들은 모두 도망갈 겁니다. 사실 군대로 친다면 우리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일선의 야전군이고 박물관은 후방의 지원부대 격이지요. 연구소에서 발굴현장을 누비고 정확히 조사하고 발굴하면, 그런 중요한 유물들을 박물관에서 연구해서 그것을 다시 업그레이드하고 사회교육적인 차원에서 모든 국민들에게 서비스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항상 최전선에서 뛸 필요가 있어요.

김 =지금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직제 발전방향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문화재 연구의 행정하고만 관련됐지, 국민과의 문화재 교감을 도외시하는 결과를 낳지는 않을까요?

조 =1969년에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전신인 문화재관리국 산하 문화재연구실이 발족할 당시는 경주 관광개발 10개년 계획이 마련될 때였어요. 중앙박물관이나 경주박물관이 발굴담당을 맡을 처지가 못 됐던 때니까 만들어졌던 것이지요. 발굴이 자꾸 폭주하니까 1975년에 문화재연구소로 격상되고, 문화재를 관리하는 행정기관으로서의 책임을 맡았던 것이지요. 나름대로 시대상의 발전과 맞물려 들어간 것으로 볼 수 있어요. 경주 10개년 계획에 유적 정비가 포함돼 있던 것 자체는 긍정적인 것이었지만, 황룡사를 발굴하는 데 3년, 안압지도 준설이나 하자는, 이런 식의 계획은 발굴하다 보니까 무리인 게 드러났습니다. 그 후에 1987년 문화재연구소 산하에 유적조사연구실이 탄생했다는 것은 획을 하나 긋는 사건이었지요. 1990년엔 경주·부여·창원 등 문화권별로 지방 문화재연구소를 만들었지요. 지금 생각하면 그때 더 만들었어야 하는 건데…. 나주·광주에 마한(馬韓)문화권 연구소를 만들고 충북엔 중원문화권 연구소가 있었어야 했지만, 당시 여건은 그렇게 되지 않았어요. 지금 문화재청이 차관급으로 격상되지 않았습니까? 예전엔 문화재관리국이 2급, 문화재연구소가 3급이었어요. 사실 나름대로 연구기관을 우대하기 위해서 동급으로 하려고도 했지만 행정이란 게 질서가 있는 거니까, 질서상으로 문제가 있다고 해서 그렇게 한 것이었어요. 그런데 지금 연구소는 여전히 3급으로 있습니다. 이제는 그만큼 업그레이드된 문화재청이 연구기능을 강화한다는 새로운 하나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는 시의적절한 기회가 온 것입니다. 앞으로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어떻게 잘 해야 하는가는 여러 가지 방법과 이상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중국의 사회과학원처럼 발전할 수 있으려면 지금은 연구소 안에 기능이 포함돼 있는 영역을 뽑아 ‘국립고고학연구소’ ‘국립민속학연구소’ 등 고유의 전문가집단으로 마련돼야 옳을 것입니다. 사실 ‘문화재’라고 하면 공기 빼고 삼라만상이 모두 문화재라고 할 수 있지요. 백두산 청정지역은 공기마저도 문화재가 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말하자면 여러 분야가 종합적으로 들어 있는 ‘백화점’과 같다는 겁니다. 더구나 연구직이라고 해서 행정을 도외시해선 안되지요. 행정은 대민봉사이기 때문에 연구를 하는 사람도 그것을 경험할 필요가 있어요. 내가 국립문화재연구소장으로 있을 때 순환근무를 하도록 한 것이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결국 국립문화재연구소는 보다 큰 ‘국립문화재연구원’으로 격상하고 그 밑에 전공분야의 연구소를 둬야 경쟁력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뼈대를 잘 세워야 10년이고 20년이고 튼튼히 갈 수 있는데, 유적조사연구실의 기능부터 당장 강화해야 합니다. 현재 매장문화재 발굴이 1년에 1000건이 넘어요. 이미 행정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단계에 왔습니다. 일선에서 모든 걸 다 아울러야지, 전공별로 “이게 급하다”고 잇속을 차리는 차원이어선 안 됩니다. 그럼 해답이 나오겠지요. 예를 들어, 서울은 한성(漢城) 백제의 수도였던 곳인데 왜 유적조사연구실이 없는 겁니까? 땅속을 다루는 중심기관이 필요합니다. 설사 그렇게 가지 않더라도 당장 급한 것이, 한성 백제를 다루는 서울연구소를 둬야 할 필요성도 있는 겁니다. 근본적으론 앞으로 어떻게 변해야 한다는 중장기계획을 세워놓고 해야 할 겁니다.

김 =현재 전국에 발굴 조사기관이 난립하고, 전체적으로 통일되지 않은 문제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떻게든 국가가 공적으로 관여하고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매장문화재 센터’가 만들어져야 할텐데요?

조 =우선, 최근 매장문화 관련 공청회에서 나온 얘기들처럼 대학 나와 3D업종을 무릅쓰고 현장에서 발굴하는 사람들은 매도돼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그런 현실적인 제도적 문제점들을 해결하려면, 각 시·군별로 발굴조사를 담당할 수 있는 문화재연구실을 만들어서 문화재청·국립문화재연구소와 연결한다면 하루아침에 해결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게 불가능하다면 현실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건 ‘매장문화재센터’를 만드는 겁니다. 문화재연구소는 일시에 직원을 늘릴 수는 없으니 감독이 가능한 체제로 가야겠지요. 또 박물관과 연구소의 전문가 집단이 유기적으로 연결해서 난립된 체제를 아우를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매장문화재센터를 만든 뒤 각 지역에 브랜치(branch)를 두는 겁니다. 현재의 여러 발굴 관련 법인들을 흡수하는 거지요. 발굴을 허가하는 문화재청과 독립특수법인인 매장문화재센터, 그리고 실제 발굴 관련 기관들이 유기적으로 삼위일체가 되는 것입니다. 마치 지역분할처럼 ‘이 지역은 다른 데서 못 들어간다’는 사고도 지양할 수 있게 되지요.

김 =최근 선생님께서 ‘발굴 이야기’ ‘한국사 미스터리’ 같은 저서를 내셨는데 지금까지 전문분야의 영역으로 생각되던 고고학 분야의 이야기들을 일반인들도 알기 쉽게 풀어 쓰셔서 많은 호응을 얻었습니다. 이 책들을 쓰신 동기는 무엇입니까?

조 =원래 평생을 ‘연구소 맨’으로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무슨 기관장이 된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요. 1994년에 느닷없이 국립민속박물관장직을 맡게 됐어요. 그렇게 4년을 있었는데, 1996년이 되니 “광복 이후 최초의 유적발굴인 1946년의 경주 호우총 발굴이 반세기가 됐구나”라고 깨닫게 됐습니다. 이제 내 발굴 인생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래도 ‘발굴 인생’이었으니까 뭔가 나름대로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조유전 개인의 입장에서 바라본 우리나라 50대 발굴의 어려움을 써야겠다고 결심했지요. 이런 걸 다음에 후학들에게 맡기면 그 위에 접목해서 나아갈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학문적으로 접근하면 독자가 외면할 것이고, 여태까지 고고학에 접근하지 못했던 일반인들이 다가올 수 있게 써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유적 발굴은 곧 파괴”라는 게 중요합니다. 따라서 발굴이라면 학술적인 의미에서의 발굴 역시 ‘유적 파괴’인 것이죠. 우리가 유적 파괴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것이 평생을 발굴에 종사한 입장에서 얻어 낸 결론입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떠밀리듯 발굴을 합니다. 우리 국민들이 착각하는 게 있어요. 문화재보호법의 근본 취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 법의 취지는 ‘개발을 용납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매장문화재 발굴을 통해 개발을 풀어주기 위한 ‘면죄부’인 것처럼 오해되고 있습니다. ‘부득이한 경우 발굴할 수 있는 것’인데 주객이 전도된 것이지요. 실제로 사전에 건설계획부터 입안하고 발굴이 통과의례처럼 돼 버립니다. 매장문화재 정책은 뒷전으로 밀리는 것이지요. 사실 땅 속에 두면 다 보존되는 것인데, 개발 때문에 파괴될 것을 우려해 학술적으로 접근하고 문화적으로 보존하려는 것일 뿐이지요. 결과적으로는 개발하는 사람들을 위하는 것인데 오히려 문화재 발굴을 이유로 개발을 방해하는 것처럼 잘못 생각하고 있어요. 구제발굴(개발로 인해 파괴를 피할 수 없는 곳에 대한 긴급한 발굴)은 위험합니다. 아파트 짓고 길 내서 신나고 좋은 것 같지만, 우리 조상이 남겼던 문화유산을 다 깔아뭉갠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결국 발굴해서 기록을 남길 뿐 개발하게 해 주는데도 “돈이 든다” “시간이 든다” “왜 막냐”라고들 하는데, “우리가 개발 때문에 죄를 짓고 있으니까 충분한 학술적 자료를 확보한 뒤에 그나마 면죄부를 받아야 한다”는 의식의 전환이 절실합니다. 궁극적으로는 우리 매장문화유산을 다 없애버린다면 반드시 후회할 날이 오게 됩니다. 개발은 천천히 해도 될 일인데 이것을 밀어붙이다 보니 파괴되는 것이지요.

김 =좀더 근본적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도대체 땅은 왜 파는 것일까요?

조 =“불국사 다보탑 다 남아있는데 굳이 왜 땅 속을 파느냐?”고 물어보는 사람도 있어요. 앞서도 말했지만, 우리가 기록을 소상히 남겼다면 아무 걱정이 없겠지요. 경주에 가서 천마총을 본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건 분명히 5세기 신라의 어느 왕 무덤이에요. 그런데 왜 ‘천마총’이라고 합니까? 어느 왕인지 몰라서입니다. 반대로 그 무덤에 대한 기록이 소상히 남아있다면 발굴할 필요가 없겠지요. 그러나 땅 속에 있는 것을 다 파낸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계속 남겨줘야 후학들이 그것을 가지고 실제 과거의 역사를 캐낼 수 있을텐데, 일단 개발이다 해서 전기톱·불도저·굴삭기를 들이대면 순식간에 없어집니다. 대단위 아파트단지같은 걸 조성할 땐 엄청난 유적이 그대로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지기도 하지요. 이건 우리 조상들이 남긴 과거를 그대로 없애버리는 죄를 짓고 있는 겁니다. 그나마 조사를 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과거사는 그대로 암흑처럼 남을 겁니다. 모르는 것을 접근하는 게 고고학적 발굴이고 조사입니다. 개발 미명하에 다 헐면 어디서 과거사를 찾아야 합니까? 국민들의 의식수준이 높아질 필요가 있습니다.

김 =그렇다면 문화재는 왜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조 =우리 민족의 뿌리와 정체성이 집약돼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산다는 것은 단지 찰나에 불과합니다. 이미 이 이야기를 해도 금세 과거가 되기 때문에 ‘현재’라는 것은 계속 지나가고 있는 것이고, 사실 없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거시적으로 보아 정신적인 뿌리가 거기에 다 있기 때문에 우리의 문화유산을 가꾸고 찾고 보호해야 합니다. 우리 역사가 없으면, 우리 언어가 없으면 우리는 더 이상 우리 민족이 아닙니다. 앞으로도 계속 살아가야 할 것이 아닙니까? 우리 조상들이 지금의 이 순간까지 오게 한 것, 모든 삶의 뿌리가 다 문화재에 포함됩니다. 이게 골치아프다고 그냥 밀어버리고 아파트를 올려서야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라는 개념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세계화 시대에 지구는 하나라고 해서 태극기를 내릴 수 있습니까? “고구려가 우리 역사”라는 말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은 바로 실체의 유적과 유산입니다. 그렇지 않고 책에서만 떠든다면 단지 상상의 역사에 불과할 것입니다. 왜 수십만년 전의 구석기 유적을 찾고 캐내야 하는 것인지도 그런 이유입니다. 이 땅의 뿌리란 그렇게 장구한 세월 동안 면면히 이어져 온 것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물론 “태극기를 내리자”는 사람도 있고, “국사를 해체하자”는 사람도 있습니다. 만약 세계의 모든 국가가 하나로 된다면 그런 말도 별 문제가 없겠지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해당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내 지역의 뿌리’를 챙겨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김 =고고학의 매력은 무엇일까요? 요즘엔 발굴하기도 힘들고 기피 경향마저 있는데요.

조 =내 스승 삼불 선생 때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는 중국의 전국시대에 해당하는 기원전 3~4세기에 잠깐 북한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봤습니다. 지금 세계가 인정하는 과학적 데이터로 접근하니까 기원전 15세기까지 올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뿌리를 찾는 자료는 다 땅 속에 있는 것이죠. 그런 매력이 있는 학문이기 때문에 삼복 더위 속에서 주저앉아 땅을 팔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옛날같으면 상상도 못할 수준으로 잘 우대해주는 것인데…. 아파트를 짓기 전의 역사를 다 밝혀주는 건데, 불이익을 받더라도 잘 찾아내길 도와주는 게 올바른 국민의식일텐데 말이지요.

김 =그렇게 많은 문화재와 가까이 해 오셨는데, 선생님이 보시기에 우리나라의 문화는 어땠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그야말로 천혜의 복받은 땅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역사적으로 단절된 순간이 없었다는 것이지요. 구석기 시대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됐든 우리 조상이 남긴 문화가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 옛날에 일본 사람들이야 “한국사를 거꾸로 올라가 보니 구석기도 청동기도 없는 공백”이라는 식으로 왜곡했지만 이 땅 속에는 지금까지의 역사가 모두 남아있는 겁니다. 고고학자가 없다면 그것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한마디로 이 땅에는 세계의 역사 속에 있었던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일본만 하더라도 구석기시대를 날조하다가 들통났지만, 우리는 그런 게 다 있단 말입니다. 살기가 좋지 않았더라면, 불모지가 됐더라면 그런 게 남아있지 않았을 게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 고고학자는 행복합니다.

김 =오늘날 살고 있는 우리는 미래의 후손들에게 무엇을 남겨야 하겠습니까?

조 =‘이걸 남겨야 한다’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남길 수는 없습니다. 역사란 것은 흐름대로만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돌이켜보고 어떻게 나아가야 한다는 반면교사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게 역사학자들의 몫이지요. 고고학적인 맥을 이어나가 보니, 내 생각엔 우리 역사가 앞으로 영원히 지속될 것 같습니다. 어떤 풍파를 겪는다 해도 이어질 것입니다. 역사란 그렇게 쉽게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 단절 없이 땅 속에서 이어진 것을 보면 하루아침에 크게 변화하거나 ‘우리’라는 개념이 없어질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강대국들 사이에 끼어 있다고 해도, 땅 속에 슬기로운 자취를 남긴 사람이 존재했기 때문에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이죠. 위정자들이 역사를 제대로 알고 헤쳐나가야 할 것입니다.

김 =최근 헌법재판소가 위헌 판결을 내린 천도(遷都) 문제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조 =나는 이 말만 하고 싶어요. 서울을 흔히 정도(定都) 600년이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원전 18년 온조왕이 나라를 세운 이후 서기 475년까지 500년이나 이어진 한성백제의 역사는 어디로 갔단 말입니까? 그것을 되찾아 조선시대의 수도와 접목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세계에서 이렇게 오랜 시간동안 수도를 가진 나라가 우리밖에는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서울에 사는 사람들조차도 그 앞선 역사를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풍납토성만 해도 하마터면 그냥 묻혀버릴 뻔 하지 않았습니까? 결국은 그 유적이 오랫동안 불신돼 오던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들을 사실로 입증하는 결과를 낳았지만 말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만 발굴이야말로 이런 감춰지고 잊혀졌던 사실들을 밝혀 낸다는 것을 국민 모두가 인식해야 하겠습니다. (정리=김용민 부여문화재연구소장)

(조선일보 2004-1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