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외교부인가, 중국 외교부인가

애초 외교부에 '자주적 외교'를 기대했던 것은 무리였던 것 같다. 기자는 최근 외교부가 고구려 연구재단에서 제작한 '고구려사 읽기자료'를 일선학교에 배포하는 것에 강력하게 제동을 걸었다는 의혹을 취재를 통해 사실로 확인하면서 그런 생각이 더욱 강고해졌다.

고구려 연구재단은 지난 7월에 자료제작에 착수해 8월 말 초안을 내놓은 데 이어 이후 몇가지 수정을 거쳐 최근 가인쇄상태에 이르렀지만 현재 배포는 물론 본인쇄조차 못하고 있다. 이유는 외교부가 중국과의 외교적 마찰을 걱정해 배포 유보를 주문했기 때문이다.

내용까지 수정하라고 해놓고 인쇄까지 막다니...

▲ 외교부 등의 외압으로 세상에 못나오고 있는 고구려 연구재단의 읽기자료 가인쇄본.
ⓒ2004 구영식
외교부는 그동안 회의 채널들을 통해 읽기자료 배포문제를 논의한 것으로 드러났다. 8월 25일과 9월 7일, 10월 1일 열린 회의에서 외교부는 "향후 '고구려사 읽기자료'의 내용, 배포시기 및 방법 등에 대해 관계부처간 협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읽기자료의 배포를 유보해줄 것을 요구했다.

또한 안병영 교육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은 지난 22일 교육부 국감에서 "10월 14일 관계부처 협의가 있었는데 외교부가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고려해 배포를 유보해줄 것을 다른 부처에 요청했다"고 증언했다.

그러니까 총 네 차례의 회의에서 읽기자료 배포문제가 논의됐다는 얘기다. 특히 읽기자료의 배포문제를 처음 논의한 8월 25일 회의는 우다웨이 중국 외교부 부부장이 방한했다가 귀국한 직후에 열렸다는 점에서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이와 관련 외교부의 읽기자료 배포 중단 외압 의혹을 처음으로 제기했던 유기홍 의원은 지난 22일 교육부 국감에서 "우다웨이 부부장이 방한한 뒤 읽기자료 배포와 관련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며 "8월 25일 회의에서 발간주체와 배포시기, 내용 등에 대한 수정이 논의됐다"고 주장했다.

또한 유 의원은 "우리 정부는 우다웨이 부부장이 방한한 뒤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에 무대응하고 있다"며 "외교부 라인이 중국을 자극하지 말고 가만히 있자는 굴종적 자세마저 보이고 있다"고 외교부의 저자세를 강하게 비판했다.

심지어 우다웨이 부부장이 방한했을 때 중국쪽에서 읽기자료의 배포를 중단해 달라고 우리 정부쪽에 요청했을 것이라는 의혹마저 제기됐다. 중국 정부가 연구재단이 100% 정부 출연기관이라는 점을 들어 배포 중단을 요청했을 수 있다는 것. 특히 우다웨이 부부장이 방한하기 전에 이미 교육부가 외교부에 읽기자료 초안을 건넨 것으로 알려져 그런 의혹이 더욱 짙어진 상태다.

연구재단의 '업무협의 간담회 결과보고' 문건에는 읽기자료 배포에 대한 외교부의 의견이 정확하게 드러나 있다. 이 문건은 "차관회의에서 외교부 차관이 배포를 유보할 것을 강하게 주장"했다고 적고 있다. 즉 10월 1일 열린 관계부처 차관회의(국무조정실장 주재, 통일·외교·안보분야)에서 최영진 외교부 차관이 읽기자료의 배포 중단을 강력히 주장했다는 것.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외교부 등의 강력한 요청에 의해 읽기자료의 내용이 수차례 수정되었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한 연구재단의 문건은 "대중국정부 비난 내용 대신 우리나라 고구려사 내용의 올바른 이해 및 역사지키기 중요성을 주된 내용으로" 수정했다고 적고 있다.

유 의원쪽도 "표현도 완곡하게 고치고 왜곡의 근거도 3개에서 2개로 축소하는 등 수정을 가했다"고 주장했다. 이는 결국 읽기자료의 톤이 외교부의 압력에 의해 낮아졌음을 뜻한다.

외교부의 외압은 발간주체와 배포방법에도 영향을 미쳤다. 연구재단은 "정부에 부담되지 않도록" 순수 민간단체를 통해 자료를 배포하는 방안을 모색하기도 했다.

또한 교육부를 통해 일선학교에 직접 배포하려고 했던 계획도 완전히 바뀌었다. 연구재단은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신청을 받아 신청한 학교나 개인에게만 배포하기로 하고 실제 신청자를 받은 후 인쇄를 준비했다. 심지어 안병영 부총리도 직접 배포가 어렵게 되자 "재단에서 제작한 내용을 재단 홈페이지에 등재하여 수요자가 다운받아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제안하기도 했다.

▲ 중국의 집안시가 지난 3월부터 시민과 학생들에게 무료배포해온 <시민수책>. 이 책자는 고구려를 '변방의 소수민족정권'으로 주장해온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의 전형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2004 구영식

외교부, 중국이 3월부터 고구려사 왜곡한 책자 무료배포해도 무대응

중국에서는 이미 지난 3월부터 고구려사를 왜곡한 내용이 들어간 소책자를 시민과 학생들에게 무료로 배포해왔다. 지난 3월 집안시에서 발행한 <시민수책>(시민들이 알아야 할 내용을 정리해놓은 소책자)이란 소책자에는 고구려가 "중국 동북지방의 소수민족정권"으로 왜곡돼 있다. 관련내용을 발췌해보면 이렇다.

"집안 땅 위에 일찍이 존재했던 중국 동북지방 소수민족정권 고구려. 고구려는 일개 민족의 명칭이고 또한 그 민족 정권의 명칭이다. 고구려의 선조들은 아직 부락상태에 있을 때 주나라에 조공하고 신복(信服)했다. 기원전 108년 한나라가 조선반도 및 압록강 유역에 한 사군을 설치했을 때 고구려는 현토군 관할에 속했다.

고구려는 존속하는 동안 자신들의 힘이 강할 때든 약할 때든 항상 중원 및 북방 심지어 강남 정권들의 책봉을 받았다. 중원 각 왕조에 신복했고 조공했다. 역사상 기록에 의하면, 장수왕 53년부터 안원왕 초기까지 북위(北魏)에 조공한 것이 80여 차례나 된다. 건국에서 멸망까지의 고구려 역사는 모두 705년이다. 고구려는 중국 고대 동북변강의 공고화와 민족융합에 공헌을 했고 찬란한 민족문화를 창조했다. 그리고 대량의 유적 유물을 남겼다."

한마디로 고구려는 중국 변방의 소수민족정권(지방정권)이었기 때문에 고구려사는 중국사의 일부라는 주장이다. 중국쪽에서 흔히 써먹는 고구려사 왜곡의 전형이다. 또한 <시민수책>은 고구려의 유적과 유물인 호태왕릉과 장군총, 환도산성, 고구려 벽화 등의 사진까지 싣고 자신들의 역사인 양 선전하고 있다.

그런데 기자는 중국이 이렇게 왜곡된 내용이 담긴 책자를 시민들에게 무료로 배포하고 있는 것에 대해 외교부가 어떤 대응을 했는지 들은 바 없다. 아마도 외교적 마찰을 우려해 알고 있더라도 무대응했거나 아니면 아예 무관심해서 그런 사실조차 몰랐을 것이다.

중국의 교묘한 고구려사 왜곡에 대해선 무대응(혹은 무관심)하던 외교부가 왜 연구재단에서 정성껏 제작한 읽기자료에 대해서는 배포 유보를 주문할 정도로 민감하게 반응한 것일까. 한 외교부 관계자는 진의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자료의 배포를 유보하라고 요구한 적이 없다"고 잡아 뗀 뒤 "교육부의 소관사항이니 교육부로 문의하라"며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물론 외교부는 중국과의 외교적 관계를 고려해야 하는 현실적 고민이 있을 터다. 하지만 누가 먼저 공격을 했는지 생각해보라. 더구나 그 공격이 부당한 공격이라면 공격을 받은 쪽에서는 최소한의 방어활동에 나서는 게 정상이자 상식이다.

그런데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에 대해 가장 선두에 서서 대처해야 할 외교부가 강력한 대처는 고사하고 연구재단에서 공을 들여 마련한 자료의 배포를 막는 현실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동안 미국에 고개숙여온 외교부가 이제는 '떠오르는 용'인 중국을 새로운 사대주의의 파트너로 삼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울 뿐이다. 끝으로 기자는 외교부에 이런 우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우리나라 외교부는 어느 나라 외교부입니까?"

(오마이뉴스 / 구영식 기자 2004-10-25)

'고구려사 읽기자료'에 대체 무슨 내용이 있길래

외교부가 고구려사 읽기자료의 배포에 제동을 건 것이 사실로 드러난 가운데 지난 22일 교육부 국정감사에서는 그 문제의 읽기자료 가인쇄본이 공개됐다. 가인쇄된 읽기자료의 제목은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역사를 빼앗기면 미래는 없다'로 표지 포함 총 28쪽에 달한다.

읽기자료의 서문에는 "지금 중국은 자랑스러운 우리의 고구려 역사를 자신들의 역사라고 우기고 있다"며 "우리가 중국의 터무니없는 역사 왜곡에 대항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은 역사의 진실 뿐"이라고 발간배경이 드러나 있다.

중국의 억지 주장 조목조목 반박..."학문적 노력과 함께 외교적 노력 더해져야"

읽기자료는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의 의미와 배경을 짚은 뒤 대표적인 왜곡내용 6가지를 조목조목 반박했다.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의 배경에 대해 "현재 중국 동북 3성(지린성·랴오닝성·헤이룽장성)에 살고 있는 조선족들에게 중국인이라는 확고한 국가관을 가지게 하려는 것"이라며 "조선족들이 중국인이라는 확고한 국가관을 가지지 않을 경우 중국의 소수민족 통치에 지장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또한 읽기자료는 "남북통일과 그 이후 한반도 정세변동에서 중국이 주도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고구려사를 중국사라고 억지 주장하고 있는 것"이라며 이렇게 설명했다.

"남북이 통일된다면 연변자치주에 있는 조선족들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언어, 생활풍속, 역사적 기억도 같고 어려울 때는 국경 너머 서로 도와주었던 조선족들이 계속해서 중국인으로 살아가고 싶을까? 중국은 바로 이점을 두려워하고 있다. 남과 북이 통일되었을 때 연변조선족들이 동요하게 되면 55개 다른 소수민족에게도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어 읽기자료는 ▲고구려인의 조상은 중국사람이다▲고구려의 왕은 중국의 신화였다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이 중국 땅이었다 ▲고구려와 수·당전쟁은 중국의 집안싸움이었다 ▲중국으로 끌려간 고구려 유민들이 더 많기 때문에 그 역사도 중국사다 ▲고구려와 고려는 이름만 닮았다 등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내용 6가지에 대해 각각 우리쪽의 반박의견을 내놓았다. 그 내용을 각각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고구려인의 조상은 중국사람이다

중국인들 주장의 근거가 되는 <일주서>라는 책은 편찬자와 편찬연대가 불명확한 역사서이다. 또한 전욱 고양씨가 실존인물이라고 가정하더라도 전욱 고양씨는 기원전 2500년경, 고이는 기원전 10세기경 사람이기 때문에 두 사람 간에는 무려 1500여년이라는 긴 시간차이가 난다. 따라서 전욱 고양씨는 고구려인의 선조가 될 수 없다. 고구려인의 조상은 중국의 한족이나 유목민족이 아니라 만주와 한반도 일대에서 농경생활을 하던 동이족의 일족이었다.

(2) 고구려의 왕은 중국의 신화였다

전근대시기에 중국과 주변국가 간에 이루어진 조공과 책봉은 명분과 실리라는 측면에서 고려해야 한다. 조공과 책봉을 통해 중국은 세계 질서의 으뜸이라는 명분을 얻을 수 있었고, 주변국가는 경제적·문화적 실리를 취할 수 있었다. 따라서 조공과 책봉이라는 외교형식을 근거로 삼아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라고 보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만약 중국의 주장처럼 조공과 책봉이 중국에 대한 종속의 근거라면 백제와 신라, 왜 등도 모두 중국의 지방정권이어야 한다.

(3)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이 중국 땅이었다

중국은 2002년 동북공정을 추진하면서부터 고구려사 전체를 중국사로 보고 있다. 한반도에서의 고구려사는 242년간인 데 반해 중국에서의 고구려사는 464년간이라는 점과 고구려 영토의 3분의 2가 중국의 영토 안에 속하기 때문에 고구려사는 중국사에 귀속된다는 점을 그 근거로 들었다. 또한 고구려는 중국 군현인 집안에서 시작하였고 평양은 고조선을 멸망시킨 한이 낙랑군을 설치한 곳이라는 새로운 학설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주장들은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이라는 중국의 역사인식에 위배되는 억지논리이다. 현재의 중국 땅 안에서 일어났던 일을 모두 중국사로 보는 것이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인데 평양 일대는 현재 중국이 아닌 북한 땅이기 때문이다. 고구려가 중국 군현으로 된 고조선의 옛땅 안에서 일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오히려 고구려가 건국과정에부터 중국의 침략을 물리치면서 자주적인 발전을 이룬 나라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다.

(4) 고구려와 수·당의 전쟁은 중국의 집안싸움이었다

중국의 역사서인 <구당서>, <신당서>에는 당 고조가 '고구려와 중국은 별개인데 굳이 지배하려 들 필요가 있느냐'라고 말한 내용이 기록돼 있다. 물론 고조의 이 견해는 신하들의 반대로 철회되고 결국 중국 중심의 천하 건립을 위해 고구려를 공격한다. 이처럼 고구려와 수·당 간의 전쟁은 두 국가간, 두 세력권 간의 충돌과 갈등의 결과였다.

(5) 중국으로 끌려간 고구려 유민들이 더 많기 때문에 그 역사도 중국사다

고구려가 멸망한 후 분산된 고구려 유민들 가운데 일본과 신라로 들어간 사람들보다는 중국으로 흡수된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러나 국가의 성격은 멸망 이후 유민 흡수 숫자의 많고 적음으로만 따질 수 있는 단순한 숫자놀이가 아니다. 신라로 내려간 고구려 유민들은 신라의 힘을 빌어 고구려를 부흥시키기 위해 나·당전쟁에 앞장섰고 신라는 당 침략군을 몰아내기 위해 고구려의 왕족 안승으로 하여금 금마저(전북 익산)에 보덕국이라는 나라를 세우도록 하였다.

또 후삼국시대에는 후고루려로, 이후에는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뜻의 국회를 가진 고려로 고구려 계승의식이 이어졌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고구려 계승의식을 가진 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러므로 한나라의 역사는 유민 수의 많고 적음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유민들이 갖고 있던 자의식과 역사의식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6) 고구려와 고려는 이름만 닮았다

왕건의 선조는 백두산 근처에 살다가 황해도로 내려온 사람이며, 고려라는 나라 이름도 옛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또한 고려의 정책에서도 고구려 계승의식이 잘 나타난다. 건국 직후부터 북방 진출을 꾀하여 고구려의 수도였던 서경을 중시하고 이곳을 북진정책의 전진기지로 삼았다. 거란의 침입 때에도 서희는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라는 것을 외교적 담판을 통해 확인시키고 영토까지 확장하였다. 반면 중국에는 고구려를 자신들의 역사로 기록한 역사책이 한권도 없으며 오히려 송대 이후의 역사서에는 고려를 고구려의 계승국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읽기자료는 끝으로 "역사를 지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논리적 근거와 계승의식"이라며 폭넓은 고구려사 연구 진행과 함께 "역사는 학문적 결과뿐만 아니라 외교적 노력이 더해져야 한다"고 정부쪽에 주문했다.

즉 "중국의 동북공정이 학문에 국한된 사업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도 정부 차원의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여 왜곡된 과거사가 현실정치에 악용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것.

(오마이뉴스 / 구영식 기자 2004-1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