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새 제작의 종합보고서 「보인소의궤」

조선 고종 13년(1876) 11월4일, 왕의 침전(寢殿) 인 경복궁 교태전(交泰殿)에 불이 났다. 이 화재로 그 안에 소장돼 있던 보인(寶印) 이 소실됐다.

보인은 쉽게 말해 도장이다. 그러나 보통 도장이 아니라 왕권 및 차기 왕위 계승권자인 세자의 권위와 동의어인 왕실 도장이다. 일반에는 흔히 옥새(玉璽)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보인은 텔레비전 사극에서 흔히 볼 수 있듯 왕권 그 자체의 상징물이 다. 이 옥새를 얻어야만 진정한 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옥새들이 타 버렸으니, 다시 만들 수밖에 없다. 이에 고종은 화재 후 나흘이 지나 무위소(武衛所)라는 관청에 명해 옥새와 인장을 새로 제조하게 했다.

본디 보인은 호조에서 제작을 맡았으나, 재위 11년(1874)이 돼서야 아버지 흥선 대원군 이하응으로부터 실질적 통치권을 넘겨 받은 고종은 이 일을 자신이 직접 창설한 군대조직인 무위소에 맡겼다.

이렇게 해서 그 해 12월 27일까지 각종 보인 11과(科=개)가 제조돼 고종에게 헌상됐다. 이 때 만든 보인을 구체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대보(大寶) ▲시명지보(施命之寶) ▲유서지보(諭書之寶) ▲세자궁옥인(世子宮玉印) ▲조선왕보(朝鮮王寶) ▲대조선국주상지보(大朝鮮國主上之寶) ▲소신지보(昭信之寶) ▲이덕보(以德寶) ▲과거지보(科擧之寶) ▲선사지기(宣賜之記) ▲무위소(武衛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된 조선시대 희귀문헌 중에는 「보인소의궤」 (寶印所儀軌)라는 것이 있다. 이 의궤가 바로 이 때 있었던 보인 제조에 관한 저간의 사정을 상세히 기록한 종합보고서이다.

이 「보인소의궤」가 특히 중요한 것은 조선시대 국왕(왕실)과 관련된 보인 제작 전통을 엿보게 하는 거의 유일한 자료이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한반도 문화권에서 왕권을 상징하는 보인은 이미 단군 신화에서 보이고, 고구려의 경우 건국초기인 대무신왕(大武神王) 5년(서기 22년)에도 존재가 엿보인다. 그러나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떤 종류의 보인이 제조됐으며, 거 기에 들어간 재료는 무엇이었는지 등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보인소의궤」에만 남아 있다.

최근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책임연구원 손환일(孫煥一) 박사가 해제하고 도서출판 학연문화사에서 원색으로 영인해 단행본으로 선보인 「보인소의궤」는 인장(印章) 혹은 옥새라는 문화유산을 소개하는 훌륭한 지침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연합뉴스 / 김태식 기자 2004-1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