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사 책자 배포중단, 외교부 외압 사실로 드러나

▲ 고구려연구재단의 '업무협의 간담회 결과 보고' 문건. 지난 1일 관계부처 차관회의에서 이수혁 외교부 차관이 고구려사 읽기자료의 배포를 유보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음이 나타나 있다.
ⓒ2004 구영식

외교통상부가 중국과의 외교적 마찰을 우려해 고구려연구재단에서 만든 '고구려사 읽기자료'의 배포를 유보하도록 외압을 넣었다는 의혹이 사실로 드러났다.

특히 지난 8월 24일 우다웨이 중국 외교부 부부장이 방한해 5개항의 구두양해 합의가 이루어진 직후 외교부를 비롯해 관련부처(기관)들이 서너차례 회의를 열고 '읽기자료의 배포를 유보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한 것으로 드러나 우다웨이 부부장 방한 당시 중국측의 배포중단 요청이 있었던 것 아니냐는 의혹마저 일고 있다.

또한 중국의 집안시가 지난 3월부터 고구려를 '변방의 소수민족정권'으로 기술한 '시민수책'('시민수첩'에 해당하는 소책자)을 학생·시민에게 무료로 배포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 우리 정부의 저자세 외교에 대한 비난은 더욱 거세질 전망이다.

우다웨이 부부장 방한 후 3차례 관련부처 회의 "읽기자료 배포 유보해야"

교육부가 유기홍(열린우리당)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외교부와 교육부 등 관련부처들(기관)은 세 차례 회의를 열고 읽기자료의 배포를 유보해야 한다는 주장을 강하게 제기한 것으로 확인됐다.

먼저 8월 25일에는 동북아시대위원회에서 주관하고 외교부와 국가안정보장회의(NSC), 고구려연구재단, 교육부 등이 참석한 '고구려사 관련 학술지원팀 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는 읽기자료와 관련 "한·중간 구두양해사항 합의가 있었으므로 향후 '고구려사 읽기자료'의 내용, 배포시기 및 방법 등에 대해 관계부처간 협의"가 있어야 한다는 요청이 있었다.

또한 9월 7일 동북아시대위원회에서 주관한 '한·중·일 역사문제 관련 학술지원팀회의'에서도 "'고구려사 읽기자료'가 완성되면 배포 전에 관계부처간 상호 협의(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어 지난 10월 1일 국무조정실장이 주재하는 통일·외교·안보분야 관계부처 차관회의에서도 이와 똑같은 내용이 언급됐다.

이러한 회의를 거치면서 교육부를 통해 일선학교에 배포하기로 했던 연구재단의 애초 계획은 홈페이지를 통해 신청자에게만 배포한다는 쪽으로 수정됐다. 현재는 인쇄마저 유보된 상태다.

또한 외교부가 읽기자료의 배포를 유보하도록 압력을 넣었다는 사실은 21일 <오마이뉴스>가 입수한 연구재단의 '업무협의 간담회 결과 보고'(10월 2일) 문건에 잘 드러나 있다. 문건에는 '읽기자료 배포에 대한 각 부처의 입장'이 다음과 같이 요약돼 있다.

외교통상부 : 차관회의에서 외교통상부 차관이 배포를 유보할 것을 강하게 주장

교육부 차관 : 정부의 입장이 외교부 의견대로 편중되는 경향이 있음을 부총리께 보고

부총리 : 재단에서 제작한 내용을 재단 홈페이지에 등재하여 수요자가 다운받아 활용할 수 있는 방안 등을 제시

여기에서 '차관회의'란 앞서 언급한 10월 1일 국무조정실장 주재로 열린 관계부처 장관회의를 가리킨다. 문건의 내용은 이날 회의에서 이수혁 외교부 차관이 "읽기자료의 배포를 유보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연구재단 문건 "정부의 요구에 의해 읽기자료 내용 수차례 수정"

▲ 현재까지 빛을 못본 '고구려사 읽기자료' 가인쇄본 표지.
ⓒ2004 구영식
또한 당시 회의에 참석한 김영식 교육부 차관도 "정부의 입장이 외교부 의견대로 편중돼 있다"고 안병영 교육부총리에게 보고했고, 이에 안 부총리가 "읽기자료 내용을 홈페이지에 실어 다운받아 이용할 수 있도록 하자"며 외교부쪽의 압력에 한발 물러섰음을 알 수 있다.

문건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읽기자료의 발간주체인 연구재단의 고민을 적시한 대목이다.

"당초 교육인적자원부의 지시로 읽기자료를 제작하였고 현재 제작이 완료되어 재단 및 관련단체의 홈페이지를 통해 일선학교의 교사로부터 배포신청을 받고 있는 상태에서 이를 취소할 경우 신청한 분들께 재단에서 정부의 유보입장 사유를 자세히 설명해야 하는 부담이 따르며, 금년 8월 11일 국회 교육위에 업무보고시 읽기자료의 조속한 제작 및 배포를 보고한 상태에서 합리적인 이유없이 이를 지연시킬 경우 정부에 대한 비난이 예상될 뿐만 아니라,

그동안 정부의 요구에 의하여 읽기자료의 내용을 수차례 수정하여 대중국정부 비난 내용 대신 우리나라 고구려사 내용의 올바른 이해 및 역사지키기의 중요성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는 점에 비추어 읽기자료는 일단 인쇄에 착수하고 배포방법은 정부에 부담이 되지 않도록 하는 방안을 모색하도록 함.(예 순수 민간단체를 통하여 배포)"

여기에서 "그동안 정부의 요구에 의하여 읽기자료의 내용을 수차례 수정하여 대중국정부 비난 내용 대신 우리나라 고구려사 내용의 올바른 이해 및 역사지키기의 중요성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다"는 대목은 상당히 충격적이다. 이는 중국과의 외교적 마찰을 우려한 외교부쪽의 요구로 읽기자료 내용을 일부 수정했다는 것이다. 연구재단은 실제로 표현도 완곡하게 고치고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의 근거들도 축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유기홍 "외교부는 중국을 자극하지 말자는 굴종적 자세마저 보이고 있어"

지난 4일 교육부 국감에서 처음으로 '외교부의 읽기자료 배포 중단 압력' 의혹을 제기했던 유기홍 의원은 21일 교육부 확인감사(국회 교육위 회의실)에서 "우다웨이 중국 부부장이 다녀간 뒤로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에 무대응하고 있는 것 아닌가 우려스럽다"며 "외교부라인이 중국을 자극하지 말고 가만히 있자는 굴종적 자세마저 보이고 있다"고 외교부의 저자세 외교를 강한 톤으로 비판했다.

유 의원은 "빛을 보지 못하고 사산될 위기에 처한" 읽기자료의 가인쇄본('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역사를 빼앗기면 미래는 없다')을 처음으로 공개한 뒤 "읽기자료를 만들어 배포한다는 것은 국민과의 약속이었다"며 "그럼에도 중국과의 외교적 마찰을 고려해 배포가 유보되고 있다는 것은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유 의원은 "우다웨이 부부장이 방한한 뒤 읽기자료 배포와 관련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며 "우다웨이 부부장이 다녀간 다음날인 8월 25일 관련부처들이 회의를 열고 발간주체와 배포시기, 내용 등의 수정을 논의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심지어 우다웨이 부부장이 왔을 때 읽기자료의 배포를 유보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추측까지 나오고 있다"고 덧붙였다.

또한 유 의원은 9월 7일 회의에 참석한 인사의 말을 빌어 "교육부쪽 참석자도 원래의 입장에서 후퇴해 민간단체가 희망하는 사람에게만 배포하는 방안을 제안했다"고 전하면서 "당시 회의를 주도한 외교부 담당자들이 읽기자료 배포의 유보를 강력히 주장해 원래의 약속을 못지키고 있는 것 아니냐"고 추궁했다.

유 의원은 "외교부 관계자가 읽기자료의 내용이 거칠다고 문제를 제기했다"며 "중국인이 보기에 거칠게 보일지 모르지만 우리는 먼저 한 대 얻어맞은 처지이기 때문에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에 대해 조목조목 비판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앞으로 연구재단이 해야 할 일이 많는데 초기부터 이러면 향후 무슨 무기를 갖고 중국의 역사왜곡과 싸울 수 있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교육부 "중국측 동향에 따라 관계부처 협의 거쳐 배포여부 등 결정"

이에 안병영 장관은 "결과적으로 읽기자료의 발간과 배포가 보류돼 송구스럽다"며 "10월 14일 관계부처 협의가 있었는데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고려해 배포를 유보해줄 것을 (다른) 관계부처들이 요청했다"고 답변했다.

교육부는 유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서 "읽기자료는 아직 발행되지 않았으므로 현재까지 배포된 바 없다"며 "배포시기와 방법 등은 향후 중국측의 동향에 따라 관계부처의 협의를 거쳐 결정할 계획"이라고 최종의견을 밝힌 상태다.

(오마이뉴스 / 구영식 기자 2004-1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