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바로보기] 신라와 고려, 통일의 의미

김춘추가 당 태종을 찾아갔을 때 당 태종은 “내가 두 나라를 평정하면 평양의 남쪽과 백제 땅은 모두 신라에 주리라”(구당서)라고 맹약했다. 하지만 당 태종은 고구려 정벌이 잇달아 실패로 끝난 뒤 죽으면서 “고구려를 정벌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초조한 김춘추는 당의 의관제도를 따르고 당의 연호를 쓰면서 종주국으로 받들었다. 그러면서 김인문을 비롯한 아들 셋을 당의 사절로 보내고 번갈아 숙위(宿衛·일종의 인질)로 삼게 하는 따위의 충성심을 보였다.

660년 3월 당나라 군사 12만명은 백마강을 거슬러 올라와 사비성 아래로 침입했고, 신라군은 육로로 황산으로 내달았다. 수륙 양면의 협공작전으로 백제군은 궤멸했다. 백제를 멸한 뒤 소정방은 점령지를 완전하게 손아귀에 넣으려는 음모를 꾸미고 신라군을 공격하려는 작전을 세웠다. 신라군도 일대 결전의 채비를 갖추었다. 소정방은 신라의 저항이 완강함을 알고는 작전을 수정하여 백제 땅에 다섯 도독부를 두어 점령지 정책을 수행케 했다. 당 고종은 개선한 소정방에게 신라를 치지 않았음을 꾸짖었다.

당나라에서는 고구려 정벌을 서둘러 신라군과 연합해 두차례 평양을 공격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고구려 명장 연개소문이 666년 죽고 난 뒤에도 몇 차례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하지만 고구려의 국력은 심하게 소모되었다. 668년 고구려는 마침내 항복했다. 나당연합군은 오랜 숙원을 이룬 것이다. 당나라는 50년 동안 모든 국력을 쏟은 끝에 신라의 지원을 받아 고구려를 멸망시켰고, 신라 또한 당의 힘을 빌려 숙원을 이룬 것이다.

당은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두어 점령지 정책을 시행케 했다. 당 나라는 고구려 땅을 산산 조각내 분할시켰다. 신라는 포로 7,000여명을 이끌고 돌아온 것 이외에는 다른 전리품을 거의 챙기지 못했다.

고구려 세력의 저항은 거셌다. 고구려 부흥군의 지도자 안승은 신라의 협조를 얻었다. 이들 연합군은 때로 압록강을 넘어가 당군과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당은 7년간의 전투끝에 안동도호부를 요동으로 옮겼다. 쫓겨간 것이다.

신라는 백제 땅을 야금야금 차지했다. 신라는 나아가 백제 땅 전부와 고구려 남쪽 땅을 정식 주군으로 삼아 행정관리를 배치했다. 분노한 당은 675년 군사 20만명을 동원해 신라를 공격케 했으나 패전한 뒤에 물러갔다. 이로 인하여 안동도호부와 웅진도독부는 요동으로 옮겨가고 말았다. 이로써 신라는 대동강과 원산만 남쪽의 고구려 땅과 백제의 땅을 영토로 확보했다.

10세기 첫 무렵, 신라 땅은 다시 세 나라로 갈라졌다. 궁예는 자신이 신라의 후예인 데도 옛 고구려 땅이었던 철원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후고구려라 명명했다. 옛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왕건은 쿠데타로 왕위를 찬탈한 뒤 수도를 송악으로 옮기고 주저함이 없이 국호를 고려라 했다. 궁예의 흔적을 지우려 하면서도 국호만은 고구려 계승의 의지를 승계한 것이다.

왕건은 더욱이 신라 보호정책을 펴면서도 신라의 계통을 잇는다고 표방하지 않았다. 왕건은 천수(天授)라는 연호를 사용했으며 모든 의식에서도 황제의 나라에 걸맞은 용어를 사용했다. 곧 임금을 전하가 아닌 폐하라 부르게 했다.

제후는 수도를 도(都)나 (京)을 붙일 수 없었으나 수도를 개경(開京)이라 명명했다. 더욱이 역대 임금의 시호를 ‘왕’이라 붙이지 않고 중국 황제와 같이 조(祖) 또는 종(宗)이라 붙이는 조종법(祖宗法)을 따르게 했다.

왕건은 즉위하자 평양에 대도호부를 두고 서경(西京)이라 부르면서 제2의 수도로 삼았다. 평양은 당시 신라는 말할 나위도 없었고 북쪽의 발해와 거란이 관심을 거의 두지 않았던 곳이었다. 그 무렵 평양은 풀이 우거지고 건물 터에는 주춧돌만 덩그러니 놓여 있을 정도로 황폐해 있었다. 왕건은 고구려 시조 동명왕릉을 받들게 하고 양가의 자녀들을 서경에 옮겨 살게 하는 등 평양 재건에 온갖 힘을 기울였다.

이어 18년 동안 서경을 중심으로 성을 쌓았다. 그리하여 청천강 주변에 행정관서를 설치하고 서북쪽으로는 대동강 이북지역에서 압록강까지 통치력을 확보했으며 동북쪽으로는 과거 신라의 경계였던 원산만을 넘어 지경을 계속 확대해 나갔다.

926년 거란은 요(遼)를 세우고 발해를 멸망시켰다. 발해의 왕자 대광현과 고위 벼슬아치, 일반 백성들 10만여명이 대거 고려로 귀화해 왔다. 왕건은 이들을 서북지방에 살면서 서북지방 개척에 나서게 했다.

고려 말기에 이룩된 ‘제왕운기’에는 “고구려의 장수 대조영은 나라를 열어 발해라 이름하였구나”라든지 “우리 태조(왕건) 여덟째 을유년에 온 나라 신하들이 왕경에 조회하였도다”라는 구절을 넣어 고려가 발해를 계승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또 이규보는 고구려의 건국과 그 시조를 찬양하면서도 신라의 시조 혁거세를 빼놓았다.

이는 고려는 단군조선을 비롯한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정통성을 계승함을 강력하게 내세운 것이다. 그리하여 이 정신과 의지에 따라 후기에 와서 압록강을 개척하여 완전한 국경선으로 삼았으며 여진을 정벌하여 두만강 넘어 지금의 간도지대까지 개척했던 것이다. 이런 국경정책은 조선 초기까지 이어졌다.

그러면 두 통일의 민족적 과업에 대해 평가를 내려보기로 한다.

당나라가 점령지 지배방식으로 간접통치를 실시할 때 고구려·백제 유민들이 복종하지 않고 신라와 연대한 것을 두고 단일적 민족의식의 발로였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혈연·언어·풍습이 비슷하여 동족의식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더욱이 옷차림 언어와 풍습이 완전히 다른 당 나라 사람들을 보고 이질감을 더욱 느꼈을 것이다.

후세의 사기들은 신라가 외세를 끌어들여 통일했다는 비난이 일어나기는 하나 쪼가리 통일이나마 역사적 공로는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이보다 더 책임을 물어야할 일은 고구려 영토의 회복의지라든지 북방으로의 진출의지가 전혀 없었다는 점일 것이다.

고려는 명실에 맞는 통일을 이룩했다. 적어도 외세를 끌어들이지 않고 독자의 힘을 바탕으로 했다. 거란 등 외침이 있을 때에도 변함없이 만주지역이 고구려 영토임을 내세우고 그 회복의지를 보여주었다. 이처럼 고구려를 정통성으로 내세우고 끊임없이 북방진출 의지를 보여주었다. 고려 말기 요동정벌론의 대두도 이에 힘입은 것이다. 삼국에 대한 동류의식 또는 민족의식도 신라보다 고려의 통일과정에서 더 확실하게 드러난다. 오늘날 우리는 신라의 통일보다 고려의 통일이 더 많은 시사와 교훈을 줄 것이다.

<이이화 / 역사학자>

(경향신문 2004-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