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자를 위한 역사기록, 영웅과 독재자 두시각

전쟁의 과정에서 신라의 주역은 김유신(金庾信), 고구려의 주역은 연개소문(淵蓋蘇文)이었다. 김유신은 당시에나 후세에도 민족의 영웅으로 받들어졌다. 그가 죽었을 때 화려한 의장을 갖추어 장사 지내게 했다. 더욱이 그의 사후, 흥덕왕은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봉하고 그의 묘를 왕릉처럼 꾸미게 했다. 말이 묘이지 여느 왕릉을 능가하는 규모로 만들어졌다.

그에 얽힌 설화도 여러 가지로 미화하여 전승되고 있다. 또 민간신앙에서는 그를 장군신으로 받들어 산신 또는 서낭신으로 모셔놓고 있었다. 이런 설화와 장군신은 전국적으로 퍼져 있었다.

김유신의 영웅설화는 고귀한 혈통을 가지고 소년시절에는 지혜롭고, 청년시절에는 용맹스러웠으며, 장년에는 국가에 큰 공을 세웠으며, 만년에는 영화를 누리다가 죽은 것으로 그려져 있다. 현대에도 그의 동상이 곳곳에 세워지고 전기가 쏟아져 나와 삼국 통일의 영웅으로 우러름을 받고 있다.

이와 달리 연개소문은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에는 포악한 독재자로 그려져 있었다. 그의 성도 당나라 고조(高祖)의 이름자인 연(淵)을 피해서인지 천(泉)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그는 고구려 최고관직인 막리지의 아들로 태어나 자신도 막리지에 올랐다.

그는 반대파를 과감하게 숙청하면서 사람들을 마구 죽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마음대로 왕을 시해하고 새 왕을 추대했다고도 한다. 하지만 천리장성을 쌓아 당나라에 강력하게 맞서 싸우면서 북방민족과 단합한 사실도 기재했다. 아무튼 그가 죽고 난 뒤 그의 아들들은 내분을 겪어 스스로 무너졌다.

구한말 민족사학자들은 연개소문을 민족 영웅으로 되살렸다. 박은식의 ‘천개소문전’에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북경 봉천 등지에서 개소문의 역사와 연희를 만들어서 세인의 이목을 진동케 하거늘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의 평생을 서술한 문자도 없다. 그의 풍채를 묘사한 화첩도 없고 그의 무예와 검술을 연희하는 희극도 없을 뿐만 아니라 한번 입에 올리면 흉적이라 꾸짖을 뿐이니, 하나로서 백 가지를 덮고 죄로서 공을 가리는 것이 옳은가?”

박은식은 연개소문의 대륙적 기상과 외세와 맞선 기걸찬 삶을 적었다. 박은식의 눈으로 볼 때 연개소문은 누구보다도 뛰어난 민족영웅이었다. 인물의 역사적 평가는 이렇게 다를 수도 있고 왜곡될 수도 있다.

(경향신문 2004-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