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중화패권주의 ⑤] 사회주의 무너진 자리 차지한 민족주의

'저우언라이'마저 매국노로 몰리다 

▲ 신병전입식? 지난 9월14일 압록강 유람선에서 바라본 북한 신의주의 모습. 북한 군인들이 모여서 무엇인가 회의를 하고있다.
ⓒ2004 오마이뉴스 김태경

지난 9월 12일 북한 신의주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있는 단둥(丹東). 이미 9월 중순에 접어들었지만 부둣가에는 압록강 유람을 즐기는 관광객 수백명이 몰려있었다. 유람선을 타면 신의주 부두 10m까지 접근이 가능했다.

물놀이하는 어린이들, 낚싯대를 드리운 노인,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는 어부…. 국경이라는 긴장감은 전혀 없었다. 북한군 20여명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장면도 포착됐다. 마치 신병 전입식을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유람선에 탄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한국인들이었다. 그러나 신의주 주민들은 익숙한 듯 일부는 미소를 짓고 손까지 흔들었다.

'중조 우정의 다리'(中朝友宜橋)란 이름이 붙어있는 압록강 철교 바로 위쪽으로 위화도가 있다. 압록강의 중국 쪽 영토에서 거리가 불과 100m도 안됐다. 현재 위화도는 북한 땅이다.

단둥의 재중동포들 사이에는 1962년 북한과 중국의 국경획정 때의 야사가 전해오고있었다. 이는 물론 사실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 것이다. 즉 국경 협정 때 당시 김일성 주석이 직접 협상에 나서 단둥과 서북쪽 50㎞ 지점에 있는 펑청(鳳城)이 역사적 근거로 볼 때 분명한 조선의 영토였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현재 한국 학자들이 말하는 서간도 지역이다.

북한의 주장에 곤혹스러웠던 중국은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가 나서서 백두산 천지의 55%를 북한에 주고, 압록강의 섬 126개 전체를 역시 북한에게 양보했다는 것이다. 당시 저우언라이 총리는 "만주족도 백두산을 자신들의 성지라고 주장하니 절반 정도 나눠서 가지면 되지않느냐"고 북한을 달랬다는 것이다.

지난 2000년 국내 언론에 의해 공개된 당시 국경협정문을 보면 북한의 영토는 이전보다 서울시 면적의 45%정도인 280㎢가 늘어났다. 백두산 천지의 55%가 북한에 속한 것을 비롯해 압록강과 두만강에 있는 섬과 사주(모래톱) 총 451개 가운데 북한이 264개, 중국이 187개를 차지했다. 두만강의 경우 246개의 섬과 사주 가운데 137개가 북한에, 109개가 중국에 귀속됐으며 압록강은 205개 중 북한이 127개를, 중국이 78개를 차지했다.

남한에서는 "한국전쟁 참전 대가로 북한이 백두산 천지를 팔아먹었다"는 주장이 당연한 듯 일반인들 사이에 나돌고 있다. 그러나 북한과 중국의 국경지대에는 이같이 전혀 다른 소문이 돌고 있다.

자본주의 도입 뒤 사회주의적 국제주의 폐기

▲ 백두산 천문봉에서 바라본 천지의 모습. 1962년 북한과 중국의 국경협정으로 천지의 55%가 북한에 속하게됐다.
ⓒ2004 오마이뉴스 김태경
한국의 학계에서는 북한과 중국의 국경획정 때 간도가 중국 영토에 속한 것을 들어 이 협정을 통일 이후 한국이 승계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한국과 정 반대의 소리가 나오고있었다.

재중동포 학자인 최아무개씨는 "요즘 중국에서는 젊은 학자들을 중심으로 저우언라이 총리를 '중국 땅을 북한에 팔아먹은 매국주의자'라는 비판 목소리가 나고있다"며 "1962년 중조변계조약 때 너무나 많은 양보를 했다는게 그 이유"라고 말했다.

최씨는 "내가 아는 베이징의 유명한 한족(漢族) 학자들도 사석에서 '현재 동북공정 논리는 전형적인 문화 대국주의적 경향'이라고 비판한다"며 "중국이 국력이 커지니까 자기들 나름대로 자신감이 생기면서 중화민족주의가 거세지고있다"고 분석했다.

지난 8월 설훈 전 국회의원이 공개한 바에 따르면, 1963년 6월 28일 저우언라이 총리는 조선과학원 대표단 접견시 중국과 조선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 1964년 중국 저우언라이 총리
"요하(遼河), 송화강松花江)유역에는 모두 조선민족의 발자취가 남아있다. 이것은 요하와 송화강 유역, 도문강(圖們江)유역에서 발굴된 문물, 비문 등에서 증명되고 있으며 수많은 조선문헌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 도문강, 압록강 서쪽은 역사 이래 중국 땅이었다거나, 심지어 고대부터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황당한 거짓말이다."

1978년 중국이 개혁·개방을 추진하기 전까지만 해도 중국에는 아직 사회주의적 국제주의 관념이 남아있었다. 단둥의 원래 이름은 안둥(安東). 당나라 때 안동도호부가 있던 곳이어서 안둥이라고 불렸다고한다. 그러나 봉건왕조의 제국주의적 냄새가 난다고해서 1965년 단둥으로 고쳤다. 랴오닝성에는 가이현(蓋縣)이 있다. 원래 이름은 가이핑(蓋平縣)현이었다. 당나라 때 고구려의 연개소문(淵蓋蘇文)을 토벌해 평정했다고 해서 개평현이라고 불렸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과거 봉건왕조의 유산이라고 해서 가이현으로 이름을 고쳤다.

그러나 중국의 사회주의적 국제주의는 개혁·개방이 실시된 이후 자본주의 이념이 급속도로 퍼지면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12억 인구와 56개 민족을 묶는 끈이 사회주의였으나 자본주의가 도입되면서 상황은 바뀐 것이다.

연세대학교 동서문제연구소 김우준 교수는 "중국이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도입하면서 이전의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는 폐기됐고 대체이념으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강조하게 됐다"고 분석했다.

한 중국 학자는 "90년대 중반, 특히 덩샤오핑의 남순강화 이후 중국 공산당은 가진 자들의 정당으로 변모했다"며 "중국의 개혁 개방은 과거 사회주의 혁명의 유산을 점진적으로 부르조아 계급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과정에 불과하다, 비유를 하자면 중국공산당 총서기를 한 기업의 회장으로 변화시켜가는 과정"이라고 평가했다.

사회주의적 국제주의로 묶였던 중국, 그러나 현재는...

중국은 개혁·개방 이후 특히 90년대 들어와 상당한 성과를 이룩했다. 1840년 아편전쟁 이후 150년동안 서구 세력에 주눅들었던 중국은 이제 자신의 실력에 자신감을 갖게 된 것이다.

1978년 이후 2002년까지 25년 동안 중국의 국내총생산은 29배, 수출액은 33배가 늘었다. 중국 국가통계국 집계를 보면 지난 2002년 현재 중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는 8184위안으로, 달러로 환산하면 990달러에 이른다. 올해는 1100달러 정도 될 것으로 예상된다. 외환보유액은 2004년 6월 현재 4706억달러, 외국인 직접투자는 2002년말까지 누적 투자액이 4462억 5500만 달러에 이른다.

중국 정부는 오는 2020년 1인당 GDP 3000달러, 국내 총생산이 미국과 비슷한 규모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고있다. 지난 2002년 현재 중국의 국내총생산은 달러로 환산하면 1조2767억달러로 10조4456억달러였던 미국의 12% 수준이다.

중국, 한국, 미국의 주요 경제지표
  구    분                     중    국   미국(2002년)  한국(2002년)
 1978년  2002년
 국내총생산  3624억 위안  10조4790억 위안(=1조2671억달러)  10조4456억달러  5683억달러
 1인당 GDP  379위안  8184위안(=990달러)  3만6704달러  1만1493달러
수출(억달러)  98  3256  6935  1628
 총 교역액(억 달러)  206  6208  1조8955  3148

외국인직접투자(억 달러)

 104(1979~1984년 누계)

 4463(1979~2002년누계)

 1285(1993~2002년 누계)

 847(1962~2002년누계)

 외환보유액(억 달러)

 212(1993년 기준)

 4706(2004.6월기준)  859

 1745(2004.9월기준)

 인구(만명)  9억6259  12억8453  2억8840  4614
 도시화율  17.92%  39.09%  77.7%  88%
ⓒ 오마이뉴스 김태경

중국 역사상 한족 왕조 가운데 한나라·당나라에 이어 최고의 극성기를 맞을 단계가 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역사나 영토와 관련되어 중국 정부가 추진하는 주요 프로젝트가 모두 90년대 들어와 시작된 것도 바로 이같은 국력 신장이 바탕이 됐다.

노골적인 중화민족주의의 고양은 한편으로 국내 지역간·계층간 소득격차로 발생하는 불만을 무마하려는 시도로도 해석된다. 지난 9월 14일 <오마이뉴스> 취재팀이 백두산에 올랐을 때 중국인 관광객 500여명이 있었다. 그런데 이들은 베이징어가 아니라 대부분 상하이어나 광둥어를 사용하는 남방 사람들이었다. 3000㎞가 넘는 길을 달려 백두산까지 여행을 올 수 있는 여유가 이들에게 있었던 것이다.

지난 9월 6일 허난성 정저우에서 베이징으로 가는 열차표를 구하지 못한 취재팀은 할 수 없이 12시간 걸리는 장거리 침대버스를 탔다. 침대 한칸당 150위안이었다. 그러나 버스는 순식간에 입석을 산 민공(民工) 40여명으로 점령되어버렸다. '민공'이란 일자리를 찾아 대도시로 몰려드는 농촌출신 노동자를 일컫는 말이다.

이제 막 중학교를 졸업한 듯한 어린 나이의 처녀부터 60살이 넘은 노인들까지 각양각색이었다. 중국 정부의 공식 발표로는 실업률은 4%대에 불과하다. 그러나 실질 실업율은 10%가 넘는다는 게 많은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극심한 소득격차와 민족주의 이데올로기

▲ 천안문에 걸려있는 마오쩌뚱의 초상화. 왼쪽에는 "중화인민공화국 만세", 오른쪽에는 "세계인민대단결 만세"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사회주의적 국제주의'를 상징하는 이 문구는 이제 천안문에서만 과거의 유물로 볼 수 있다.
ⓒ2004 오마이뉴스 김태경
2002년 중국 국가통계국 통계를 보면 1인당 GDP의 경우 상하이는 4025달러, 베이징은 2730달러, 광둥성은 1810달러, 저쟝성 1678달러 등이다. 그러나 구이저우는 373달러, 안후이성 563달, 티벳 605달러 등에 불과했다. 중국 국가 통계국 수치인만큼 실제 격차는 이 보다 더 클 것이다.

중국 인구 12억6583만명 가운데 농촌에 살고 있는 사람은 8억739만명이나 된다. 농촌 주민 대부분은 아직도 가난에 시달리고있다. 중국의 절대 빈곤층은 2억명이나 된다는 추정도 있다. 중국의 지니계수가 이미 90년대 말 0.45를 넘어 프랑스 대혁명 당시 수준을 넘었다는 보고까지 있다.

이런 불만을 무마시키고 국민들을 단결시키는데 '중화 대민족주의'는 좋은 이데올로기다. 중화 민족주의는 과거의 영광을 상기하는 차원에서 끝나지 않는다. 과거 중국의 영토나 속국으로 삼았던 나라를 다시 자신들의 영역하에 둬야 한다는 움직임으로까지 이어진다.

서울사이버대 중국통상학과 박병석 교수는 "현재의 중화민족주의는 중국인 특유의 자대(自大) 의식의 발로"라고 혹평했다. 그는 지난 1999년 펴낸 <중국의 재건과 해체>(교문사)라는 책에서 이미 중국이 고구려사 및 고조선사 등을 중국사로 편입시키려는 작업을 마쳤다고 경고했었다. 그의 예고는 정확히 맞았다.

박 교수는 "중국인들에게는 자신들 역사의 거의 절반을 소수민족에게 정복당했다는 열등감과 함께 한편으로는 이를 심리적으로 극복하려는 과대망상증이 있다"며 "서구 제국주의에 상처를 받았던 중국은 이를 만회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영토는 확실히 장악해야하고 과거의 잃어버렸던 영토를 회복해야한다는 목표가 정해졌다"고 분석했다.

중국이 생각하는 잃어버린 과거의 영토는 청나라 때 러시아에 할량한 연해주를 비롯해 한반도, 베트남·캄보디아·미얀마·라오스 등이 있는 인도차이나반도, 네팔과 부탄, 중앙아시아, 대만 등이다.

중국에 많은 지인이 있는 국내의 한 학자는 "동북공정에 대해 구구한 해석이 많은데 결론은 하나"라며 "결국 중국이 한반도 전체를 다시 자신들의 속국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라고 잘라말했다. 

중국이 생각하는 자신들의 영토는?
한반도도 되찾아야 할 땅으로 생각

▲ 지난 1954년 중국 베이징에서 발간된 청나라 때 영역을 표시한 지도. 조선을 비롯해 연해주, 파키스탄, 네팔, 인도차이나 반도 등을 모두 앞으로 중국이 수복해야할 영토로 표시해놓았다.
지난 10월 8일 고려대학교 국제관 국제회의실에서는 만주학회와 국사편찬위원회 주최로 '중국의 동북공정 논리와 근 한계'라는 제목의 학술발표회가 있었다.

이 자리에서 고구려연구재단 윤휘탁 박사는 중국 학자들이 생각하는 역사적 중국의 영토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설명했다. 윤 박사에 따르면 크게 5가지 견해가있다.

▲청나라 때 최대 판도인 1750년대부터 1840년 아편 전쟁 이전까지의 중국 영토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 ▲역사상의 다양한 시기에 형성된 통일적 다민족 국가의 영토 ▲한족문화 또는 유교문화를 받아들인 지역 ▲한족이 세운 오아종의 판도 등이다.

이 가운데 4번째 의견은 최근 10년 사이에 거의 제기되지 않았고, 5번째 의견은 점차 자취를 감췄다. 현재 절대 다수의 중국 학자들이 제기하고 있는 역사상 중국의 영토는 첫번째 의견이다.

이는 현재 중국 영토안에서 벌어진 모든 사건은 중국사라는 중국 정부의 주장과도 모순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문제는 청나라 때 최대 판도로 할 때 중국과 조공 책봉 관계를 맺고 있던 모든 지역을 중국의 영토로 본다는 말이다. 이 논리에 의하면 한반도 전체도 중국의 영토다.

(오마이뉴스 / 김태경 기자 2004-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