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정부가 파룬궁을 탄압하는 이유

파룬궁(法輪功)은 지난 1992년 5월 13일 중국 지린성 장춘 출신의 리홍즈(李洪志)가 세상에 처음 소개했다. 파룬궁은 중국 전통의 심신수련법과 불교적인 요소를 가미해 발전시켰다고 하는데 곧 대중들의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1999년 초 중국 안에서의 수련자가 7000만명에서 1억명까지 추산될 정도였다. 특히 중국 정부의 관리나 공산당원, 군 간부들도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중국 정부는 처음에 파룬궁에 대해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 파룬궁 측은 "초기 4년 동안 중국정부는 적극적으로 파룬궁 수련을 권장했다"며 "이는 수련자들의 건강 증진으로 정부의 의료비를 절감시켰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있다.

그러나 1996년부터 <광밍일보(光明日報)> 등 관영 언론이 파룬궁을 비판하는 기사를 싣기 시작했다. 조금씩 강화되던 중국 정부의 파룬궁에 대한 견제는 1999년 4월25일부터 본격적인 탄압으로 전환됐다.

이날 공산당 지도자들의 공관이 있는 베이징 중난하이(中南海) 부근에 파룬궁 수련생 1만여명이 모였다. 이들은 이틀전 텐진에서 파룬궁을 비방하는 책을 펴낸 출판사 앞에서 항의시위를 하다 체포된 동료 45명의 석방을 요구하는 평화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이를 파룬궁 수련생들이 최고 지도부가 있는 중난하이를 포위해 공포감을 조성한 무력 시위를 벌이는 등 권력에 정면 도전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해 7월 27일 파룬궁과 관련된 모든 출판물의 소개가 금지되는 등 파룬궁 자체가 금지됐다. 중국 정부는 파룬궁이 미신을 조장하며 대중들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사교(邪敎)라고 비판했다. 파룬궁에 국가전복죄가 적용되기 시작했다. 파룬궁은 지금까지 중국 안에서 1600명의 수련생이 고문을 받아 사망했다고 주장하고있다.

파룬궁 측은 자신들에 대한 탄압은 장쩌민 당시 국가 주석의 개인적인 권력강화 욕구에서 비롯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파룬궁이 장쩌민의 정치적 라이벌(파룬궁 측은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고있다)에 의해 움직일 수 있는 조직으로 생각했고, 이에 위협을 느껴 탄압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중국 정부는 왜?

중국 역사를 찬찬히 살펴보면 중국 정부가 파룬궁을 금기시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중국은 역사적으로 전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민중들의 반란이 많았다. 물론 기아와 굶주림, 관리들의 학정이 원인이었다. 중국 농민들의 인내심은 유명했지만 한계를 넘어서기만하면 순식간에 정권을 무너뜨리거나, 결정적으로 약화시켜 정권이 바뀌는 계기가 됐다.

농민반란의 이념적 기반은 거의 예외없이 도교나 불교, 특히 미륵불교 계통의 민간 신앙이었다. 한국의 갑오농민전쟁이 본질상 계급운동이었다고 하지만 동학이 이념적 매개였던 것과 마찬가지다.

중국을 최초로 통일했던 진나라는 기원전 209년 진승과 오광이라는 농민들의 반란으로 사실상 무너졌다. 진승은 "왕후장상이 따로 씨가 있는가"라는 말을 남겼던 인물이다.

한나라를 일시적으로 무너뜨렸던 왕망의 신(新)나라는 녹림과 적미라는 농민반란으로 결정적으로 약화됐다. 후한은 삼국지에서 볼 수 있듯이 서기 184년 태평도와 오두미도가 일으킨 반란(황건적의 난)으로 무너졌다. 태평도와 오두미도는 모두 참위설과 음양오행설, 신선설 등의 신비사상과 유가 및 도가사상이 가미되어 만들어졌다. 황건적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지방 호족들의 세력이 강대해졌고 황제권력은 급격하게 약화됐다.

수나라는 고구려 원정에 실패한 뒤 전국적으로 터진 농민반란으로 해체됐고, 당나라는 소금장수 출신 황소의 난(875년)으로 명운이 다했다. 황소의 난을 진압했던 주전충에 의해 당나라는 멸망했던 것이다.

수호지의 배경이 된 방랍의 난(1120년)은 송나라를 뒤흔들었다. 방랍은 마니교를 배경으로 활동했다. 마니교는 고대 페르시아의 조로 아스터교에 불교와 기독교적인 요소가 가미됐다.

원나라 말기에는 백련교라는 아미타불의 왕생을 믿는 민간 종교를 바탕으로한 홍건적의 난(1135년)이 발생했다. 홍건적 무리 가운데 한 명이던 주원장은 원나라를 멸망시키고 명나라를 건국했다.

명나라는 1644년 농민 반란군의 영수 이자성이 베이징을 점령하고 마지막 황제 숭정제가 나무에 목을 메고 자살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만주족이 세운 후금(이후 청나라)은 이자성의 난을 틈타 중원을 점령했다.

청나라는 1795년 백련교의 난을 진압하면서 막대한 재정 소비로 약화되기 시작했다. 1851년 홍수전이 일으킨 태평천국의 난으로 청나라는 멸망의 길로 접어들게된다. 태평천국은 중국의 전통 신앙에 기독교적인 요소를 가미한 배상제회(拜上帝會)가 이념적 배경이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마오쩌뚱의 사회주의 혁명도 중국 역사에서 빈번했던 농민반란의 연속선상에 있다.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는 도시의 노동자 계급이 주도하는 혁명을 상정했다. 마르크스는 "농민들은 마대 자루에 들어있는 감자와 같은 존재"라며 그들의 소 자산계급적 지위 때문에 오히려 반동정권의 기반이 될 수도 있다며 폄하했다.

그러나 마오쩌뚱은 정통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와는 달리 농민 중심의 혁명운동을 벌였고 성공했다. 마오는 러시아 10월 혁명을 그대로 중국에 적용하려던 리리산 등과 격렬한 논쟁을 벌였는데, 이는 중국의 역사적 경험에서 얻은 결론이었다.

급격히 악화되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

90년대 들어 개혁·개방의 성과로 중국의 국력은 놀랍도록 성장했다. 그러나 극심한 소득격차가 발생했다.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보편적이 된 것이다. 그런데 파룬궁의 수련생은 최고 1억명에 이를 정도로 중국 대중들 상당수가 몰려들었다. 민주적인 선거제도도, 언론 자유도 없는 중국에서 대중들의 불만을 표출할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진 것이다.

1989년 천안문 사태는 표면적으로는 중국 대학생들의 정치적 민주화 요구 시위에서 촉발된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처음 대학생들의 민주화 요구시위에 일반 대중들이 가세한 것은 결국 개혁·개방으로 인한 극심한 소득격차, 관료들의 부패에 대한 대중들의 불만이 자리잡고있었다.

파룬궁 수련생 1억명은 중국 공산당원 6800만명을 초과하는 숫자다. 중국에서 최대의 조직은 공산당인데, 파룬궁의 힘은 정식 국가기구를 능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천안문 사태로 정권 붕괴의 위험까지 겪었던 공산당 입장에서 파룬궁은 대단히 위험한 조직이었다.

더구나 파룬궁에 관료나 당원, 군 간부들이 참여한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중국의 역대 농민반란도 처음에는 일자 무식꾼인 농민들이 일으켰다. 그러나 중간에 관리나 군인들이 참가하기 시작하면서 급속도로 세력이 커지는 패턴을 보여왔다.

파룬궁의 세력 확장은 역대 중국 농민반란의 그것과 대단히 유사했다.

(오마이뉴스 / 김태경 기자 2004-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