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역사지도가 필요한가

김성환 / 본지 편집위원

최근 나는 『아틀라스 한국사』(사계절 출판사)라는 책을 편집해 세상에 내놓았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 역사를 지도를 통해 이해하는 이제까지와는 색다른 역사책이다. 사실 그동안 한국사 관련 책들이 많이 출판되어 왔지만 역사지도와 관련한 출판은 극히 보기 드물었다. 기껏해야 중고등학교 시절 학기 초에 배부받아 책꽂이 한켠에 내내 꽂아만 두었다가 졸업할 때 쯤이면 이걸 처분해야 하나 보관해야 하나 고민하면서 다시 한번 들춰 보곤 하던 『역사부도』가 역사지도를 보여주는 책의 유일한 예일 것이다. 그래서 이번엔 『아틀라스 한국사』를 만들면서 느꼈던 우리 나라의 역사지도 연구 수준에 대해 폭로(?)해 볼까 한다.

최근 중국이 동북공정을 통해 고구려사를 자기네 지방정권의 역사라고 우겨 우리를 분노케 했다. 언론들은 앞 다퉈 정부와 학계를 질타하며 ‘국사 교육’을 강화하라고 난리를 쳤다. 그런데 그건 정말 웃기는 일이었다. 국민 필수과목인 국사를 달달 외우며 학교를 다닌 우리 국민들 중에 고구려사가 우리 역사인지 아닌지 헷갈려 하는 사람이 많아서 문제라는 말인가. 턱도 안 되는 소리다. 오히려 우리 국민들은 중국이 왜 저러는지에 대해 헷갈려 하고 있다. 그렇다면 강화해야 할 것은 국사 교육이 아니라 중국사 교육이 아닐까. 솔직히 중국사가 포함된 세계사야말로 선택과목으로 밀려나 학교에서 찬밥신세를 못 면하고 있고 이것이 우리 국민들이 세계 여러 나라들을 바라보는 전반적인 시각의 수준을 떨어뜨리고 있다.

그러나 언론들의 지적 가운데 일부분은 타당한 측면이 있다. 즉 ‘국사 교육’이 아니라 ‘국사 연구’가 문제인 것이다. 대학 강단에서 고대사를 가르치고 있는 한 교수의 말에 따르면 현재 고구려사로 박사학위를 받은 연구자는 50명이 채 안 된다고 한다. 이 정도 가지고는 중국과 ‘쪽수’로도 게임이 안 될 것이다. 현재 우리 학계의 수준이 고구려사의 편년조차 제대로 확립해 놓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니 무얼 더 말하겠는가.
이렇게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 역사학계의 연구 수준이 부실한데, 그 중에서도 특히 연구가 안 돼 있는 분야가 바로 ‘역사지도’다.

부실한 지도 인프라

역사지도를 말하자면 그에 앞서 지도 그 자체에 대해 먼저 말해야 한다. 지도에는 우선 지형이 표시되어야 한다. 해안선으로 육지와 바다의 경계를 구분하고, 등고선으로 지형의 높낮이를 표현한다. 그리고 그 위에 지명과 국경선 등을 그려 넣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지도의 상세도는 축척으로 분류한다. 얼마나 고해상도의 축척을 구현했으냐에 따라 지도의 질이 결정된다. 문제는 바로 이 축척에 있다.

우리 정부에서 등고선을 측정하고 이를 통해 지도를 작성하는 곳은 건설교통부 산하의 국토지리정보원(구 국립지리원)이다. 이것에서 우리는 우리 나라에 관한 상세한 등고선 데이터를 제공받을 수 있다. 축척은 보통 2만 5천분의 1이면 충분한데, 5천분의 1까지도 가능하다. 이 정도면 지도의 해상도는 상당히 높은 수준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때의 ‘우리 나라’의 범위이다. 국토지리정보원에서 말하는 ‘우리 나라’는 어디까지나 휴전선 이남 즉, 남한만을 가리킨다. 북한에 관한 지리 고해상도 등고선 데이터는 없다는 말이다. 말하자면 북한 지역에 존재했던 고구려나 고려의 역사지도를 그리려고 할 때 해방 이전에 측정한 저해상도 등고선 데이터 밖에는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조선이나 근현대의 역사지도도 반쪽 밖에 그리지 못한다. 평양성과 그 주변의 지형과 입지를 자세하게 보여줄 수 없고, 백두산 천지 부근의 지형이 어떻게 생겼는지 입체적으로 보여줄 수도 없다는 말이다.

문제는 북한에만 그치지 않는다. 고구려와 발해는 물론 그 이전의 부여와 고조선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우리 역사의 시간 길이는 대충 4천년 정도 된다. 5천년 우리 역사의 80%다. 그 80%의 역사가 전개됐던 무대에 관해 역사지도로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현재 중국 영토이기 때문에 직접 측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역사부도』에 그려진 우리 고대사 지도들이 ‘허접’해 보이는 것은 바로 이렇게 정밀한 지도 데이터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를 해결할 방법은 없는가. 아니다.

할 일 안 하는 정부

등고선 데이터는 대개 직접 측량을 통해 얻어진다. 그러나 요즘은 직접 측량하지 않고 인공위성을 통해 등고선 데이터를 얻는 방법이 이미 개발돼 있다.
나는 작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에서 캐나다 국적의 한 위성지도 업체를 발견했다. 그들은 인공위성을 통해 표고 데이터를 얻은 뒤 이를 통해 역으로 등고선을 그리는 작업을 하고 이를 전세계에 팔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평양 지역에 대한 높이 10미터까지 식별이 가능한 상세지도를 샘플로 보여줄 것을 요청했고, 얼마 뒤 약속한 자료를 보내왔다. 능라도 경기장 모습까지 판독이 되는 정밀한 지도였다.

 그런데 우리 국토지리정보원을 통해서는 이런 지도를 입수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만주든 중국이든 어디든지 정확한 위도와 경도 범위만 알려 주면 언제든 고해상도 데이터를 제공해줄 수 있다고 말했다(다만 사용료가 비싼 게 흠이었지만).
우리 정부가 인공위성이 없어서 이런 지도를 못 만드는가. 아니다. 우리도 여러 개의 인공위성을 띄워 놓고 정밀 사진을 찍고 있다. 따라서 얼마든지 캐나다 업체와 같은 방식으로 북한지도, 만주지도를 만들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믿는다.

결국 문제는 인식과 의지이다. 고구려사가 우리 역사라고 목소리만 높일 것이 나니라 고구려 땅이었던 곳에 어떤 산들이 솟아 있고 어떤 강이 굽이쳐 흐르는지 상세지도 정도는 만들어 놓고 무슨 주장을 하더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닐까.
또 한 가지, 지도의 구현방식에 관한 문제가 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평면적인 등고선 지도에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요즘 선진국들의 지도 출판물에서는 등고선 대신 실제 높낮이를 실감할 수 있도록 입체화한 지도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지도를 힐 셰이딩(hill shading) 지도 혹은 음영기복도라고 한다.

이러한 입체 지도를 만드는 과정은 이렇다. 등고선 데이터를 원자료로 삼아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입체화시키고 그것을 가지고 다시 일레스트레이터가 붓의 터치로 다듬어 완성시킨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같은 곳에서 낸 지도책을 보면 이런 입체지도를 흔히 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 수준은 어떤가. 역사지도의 경우 지도 위에 여러 가지 역사 정보들이 담겨야 하기 때문에 등고선을 그려 넣으면 지도가 너무 복잡해진다. 그렇다고 등고선에 따라 색을 입히는 고전적인 방법으로는 입체감이 살아나지 않는다. 결국 역사지도야말로 음영기복도를 사용하는 것이 필요한 분야이다.

그러나 국토지리정보원에서는 등고선 데이터만 제공할뿐 이러한 음영기복도는 제공하지 않는다. 그래서 민간 업체에서 국토지리정보원으로부터 등고선 데이터를 받아 3D 프로그램을 통해 입체화시켜 판매하고 있다. 현재 그 주 쓰임새는 도로교통지도일 것이다. 요즘 서점에 전시돼 있는 최신 도로교통지도를 보면 이런 방식으로 음영기복도를 사용한 책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래서 적어도 남한의 경우 역사지도를 만들 때 이들 업체로부터 제공받은 음영기복도를 통해 입체적인 역사지도를 만들 수 있다. 그리고 북한이나 만주의 경우에는 다른 나라 업체로부터 데이터를 제공받을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하다 보면 엄청난 비용이 추가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국토지리정보원에서 만들어서 무료 혹은 염가로 제공해주면 될 일을 하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 고구려사는 우리 역사라고 핏대만 세우는 것이 내 눈에는 코미디로 보인다.

학자들의 안이한 연구 태도

역사지도에서 지도의 문제는 인프라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에 반해 연구자들의 연구 수준은 콘텐츠의 문제이다. 즉 역사지도를 그리려고 해도 거기에 담을 내용이 너무 빈약하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아마도 국경선 문제일 것이다.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에서 마지막 왕조인 조선에 이르기까지 그 어느 국가에 대해서도 현재 ‘이것이다’라고 정설로 확정된 국경선은 없다. 물론 근대 이전의 시대에 국경선 개념은 오늘날과는 전혀 달라 말뚝 박고 철조망 치는 식이 아니었다. 대개 왕조의 통치력이 미치는 한계 범위 정도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따라서 국토 영역의 지리적 범위는 어느 정도 확정지을 수 있다. 그럼에도 이에 대한 정설이 없다는 것은 연구자들이 그러한 문제에 깊이 파고들지 않은 결과일 뿐이다.

특히 발해의 국경선과 관련해 유의해야 할 점은 우리 학계에서 그리는 것과 중국에서 그리는 것에 큰 차이가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학계는 발해의 남쪽 경계선을 신라의 북쪽 경계선인 대동강에서 함흥을 잇는 선 정도로 그리고 있다. 그리고 남서쪽으로는 요하를 경계로 당 나라와 맞대고 있는 것으로 그린다. 그러나 중국의 공식 출판물인 <중국역사지도집 >에 보면 압록강 중류에서 평안도 일대까지가 전부 당 나라의 영토로 표시돼 있다. 우리나 중국이나 모두 자국에 유리하게 그렸다고 볼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객관적 사실(史實)을 무시할 수는 없다.

독도가 우리 땅인 것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발해의 영토에 대해서도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밝혀내고 이를 토대를 중국 역사학계에 당당하게 문제를 제기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 역사학계가 그런 점에 대해 유념하고 있다는 모습은 도무지 찾아볼 수 없다.

역사지리와 관련해 해묵은 논쟁은 고려 때 윤관이 함경도 지방의 여진족들을 몰아내고 쌓았다는 동북 9성의 위치에 관한 것이다. 일제시대 일본 역사학자들로부터 시작해 이후 해방 이후까지 계속된 논쟁의 줄기는 어떻게 보면 지극히 비학문적이었다. 즉 일본인 학자들은 9성의 위치를 오늘날의 함흥 일대로 비정했고 이에 반해 우리 민족주의 사학계에서는 그 위치를 두만강 건너 만주 평원까지 확장시켰다. 그렇게 본 각각의 속셈이 비학문적이었다는 얘기다. 일본인들은 고려의 영역을 될 수 있는 대로 작게 축소시키려고 하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고, 우리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은 그에 대한 즉자적 대응으로 고려의 영역을 한없이 넓히려고 한 것이다. 말하자면 개관적 사실에 대해서는 양족 다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자국의 국가적 이익을 좇는 이데올로기의 포로가 된 것이었다.

이데올로기만 강요해온 역사

나는 해방 이후 오늘날까지 우리 역사학의 흐름이 지나치게 이데올로기에 편중돼 왔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윤관이 쌓은 동북 9성 우치에 관한 논쟁은 그런 점에서 우리 학계를 비추는 하나의 거울이라고 볼 수 있다.

해방 이후 우리 역사학계에 주어진 시대적 사명은 일제가 만들어 놓은 식민사관을 극복하는 것이었다. 일제 식민사관의 핵심은 조선민족은 열등하다는 것을 역사적 증거를 통해 증명하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를 극복한다는 것은 우리 민족은 절대로 열등하지 않다는 것을, 오히려 세계 어떤 민족보다도 우수하다는 것을 논증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그래서 우리는 조선 후기의 정치를 좌우한 당쟁이 나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대의 여야 정당간 토론과 경쟁에 견줄 만한 자랑스런 유산이라는 강변을 들어야 했다. 석굴암 건축의 과학성은 현대 과학자들마저 감탄해 마지 않는 세계 제일의 수준이었으며, 고려 청자의 아름다움은 당시 중국과 일본 자기들은 감히 넘보지 못할 높은 수준이었다. 중요한 건 사실이 아니라 사실의 해석이었다. 그리고 그 해석은 언제나 우리 민족 제일주의로 귀결되었다.

그러다 70년대에서 80년대에 걸쳐 청년 학자들을 중심으로 또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등장했다. 유신 독재의 가혹한 탄압으로 민주주의가 질식하던 그 시절, 그들은 독재를 물리치고 민주를 가져올 힘은 민중에게 있다고 보고 역사 속에서 역사를 발전시켜온 민중의 힘을 확인하려고 했다, 이른바 민중사학이다. 역사 속에서 민중만 찾아 헤매다 보니 다른 것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를테면 노비 만적이나 홍경래는 중시하면서도 세종이나 이순신에게는 의도적으로 눈길을 주지 않았다.

우리는 이런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역사란 무릇 과거의 사실을 밝히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다. E.H 카아가 『역사란 무엇인가 속에서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한 것은 현재를 사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과거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를 품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해방 이후 오늘날까지 자의든 타의든 역사에 우리가 원하는 이데올로기를 강요해 왔다. 그 결과 우리는 현재의 위안은 얻었을지 모르지만 과거의 사실 자체는 잃었다. 단적으로 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를 보라. 우리 역사 속에 빛나는 많은 영웅들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없다. 각 왕조를 빛낸 왕들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도 없다. 한마디로 이야기가 없는 역사다. 풍성한 가지와 우거진 잎은 없고 오로지 줄기만 멋없이 곧게 솟은 볼품 없는 나무와 같다.

사실 규명의 기회

나는 역사에서 모든 이념이 제거돼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념에만 매달려 사실을 밝히는 기본 작업을 도외시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 역사에는 아직도 발굴을 기다리는 많은 사실들이 있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한 분야가 역사지도이다.

우리 역사학계가 이상한 점 하나는 고고학과의 학제간 교류나 공동연구가 너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심하게 말하자면 고고학은 현장 발굴 중심으로 연구하고, 역사학은 문헌 준심으로 연구하는 것이라는 이상한 원칙이 통용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이 들 때도 있다. 실제로 그동안 역사학계에서 나온 논문들은 대부분 문헌을 중심에 두어 왔다. 이번에 『아틀리스 한국사』를 편찬하면서 그러한 논문들을 토대로 역사지도를 작성하는 것은 아주 고역이었다. 사료에 나온 고지명이 오늘날의 어디인지, 당시 도로망은 어떤 체계였는지에 관해 너무도 무관심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내적으로는 과거사 청산의 기회를, 외적으로는 고구려사에 대한 도전을 맞이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활용하기에 따라서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다른 어느 것도 아닌 사실을 밝히는 기회 말이다.

(디지털말 2004-1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