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 외교적인 사기인가 역사적 사실인가

외교통상부가 국정감사 자료에서 '간도협약 무효' 입장을 밝힌 것을 계기로 간도문제가 주목을 끌고 있다. 이에 대해 중국사 전공자인 박선영 포항공대 인문사회학부 교수가 기고를 보내왔다. 박 교수는 "한국의 주장은 날조", "명과 청이 간도지역을 방임하고 조선의 영토요구에 관대했기 때문" 등 간도문제에 대한 중국 쪽의 논리를 비판하면서 한국 정부의 종합적인 대응을 촉구했다.... 편집자 주

▲ 1855년 파리지리학회지에 실린 지도의 일부. 1846년 김대건 신부의 지도라고 설명이 붙어있다. 오른 쪽 상단의 지도를 보면 압록강 이북도 조선영토로 되어있다. (박선영 교수 제공)

복잡하고 민감한 문제 간도

중국의 동북프로젝트(동북공정)가 '고구려사=중국사'로 알려지면서 우리는 고구려 열풍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필자는 고구려연구재단 성립 이전부터 동북프로젝트의 핵심이 고구려사 왜곡에만 있는 게 아니라 간도문제에 있음을 지적했다. 요즘 고구려 열풍이 사그러드는가 싶더니 간도문제가 수면위로 부상하고 있다.

간도는 매우 복잡한 문제다. 1712년 백두산정계비 설정, 1885년(1차)과 1887년(2차) 국경 담판, 1909년의 간도협약 등의 역사 뿐만 아니라 압록강 대안(서간도), 두만강 대안(동·북간도)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간도 범주가 현 연변자치주 정도의 범주로 구체화되는 공간적인 문제, 간도의 명칭, 간도에 거주하는 조선인 문제 및 간도에 대한 국가의 행정적 통치 행위 등 소위 간도 문제 전반에 걸쳐 한·중간에 일치되는 견해가 거의 없다.

또한 간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협상 주체들, 즉 한국(북한, 통일한국)·중국·일본 등도 다양하게 얽혀 있다. 이 글에서는 중국이 어떤 논리로 간도문제를 설명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 그 한계를 지적하고자 한다.

날조론과 역사적 사실

외교라인 간도문제 혼선?

간도문제에 대한 외교 라인에서 서로 다른 목소리가 나오고있다.

반기문 외교장관은 14일 정례브리핑에서 간도협약 문제와 관련 "간도협약은 여러나라가 관련되어 있는 복잡하고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에 고증을 위한 역사적 자료를 수집하고 전문가들의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신중하게 다뤄나가겠다"고 말했다.

"신중하게 다뤄나가겠다"고 말했지만 고증을 위한 역사 자료 수집, 전문가들의 연구결과 참조 등을 언급한 것은 이전에 간도문제를 '소 닭 보듯'하던 한국 정부의 태도에 비하면 상당히 적극적인 것으로 평가됐다.

일부 간도문제 전문가들은 "국감자료에 간도협약 문제를 넣었다가 뺀 것은 간접적으로 정부의 의중을 알리려 한 것 아니냐"는 식으로까지 해석하기도했다.

그러나 같은 날 청와대 정우성 외교보좌관은 평화방송 라디오 시사프로 <열린세상 오늘>'과의 인터뷰에서 간도협약 무효론 확산을 우려했다.

"간도협약이 유무효 논란에 대한 한국정부의 입장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정 보좌관은 "단순히 유효, 무효를 정할 수 없다. 더 크게 봐야 한다. 조약 문구라든지 법리적으로 볼 것은 아니고, 간도 문제가 불거져 중국과 우리 사이에 영토와 국경 문제로 번지는 것은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정 보좌관의 말은 아예 간도문제를 제기해서는 안된다는 시각으로 보인다. / 김태경 기자

첫째, 중국은 간도 문제를 날조론·허구론으로 설명한다. 중국은 간도라는 지명과 간도의 지리적 위치, 조선인 거주시기, 간도문제 발생 요인 등 소위 간도문제 전반이 날조라는 것이다. 중국은 간도라는 지명이 원래 중국 고유의 명칭이 아니라 조선과 일본에서 의도를 가지고 만든 명칭이라고 하여 연길(延吉)이라고 부른다.

중국은 간도문제를 조선인이 위조하여 외교적으로 사기 친 것이라고 본다. 1712년 목극등(穆克登)이 세운 정계비가 소백산에 있었는데 개간에 불리하다고 판단한 조선인들이 정계비를 옮겨 중국에게 영토를 요구한 국제 외교 사기극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1712년 백두산 정계비 설치, 1885년 을유감계담판, 1887년 정해감계담판, 1909년 간도협약 등의 역사적 사실을 단순하게 허구적인 날조라고 치부할 수는 없다. 중국의 간도 날조론, 허위론에 대해 한국의 간도(墾島, 艮土, 閑土, 間島) 이해는 주로 역사적인 의미 부여에 치중하여 언어학적, 민족적, 지리적, 역사적인 측면에서 해석하고 있다.

최남선(崔南善)은 <백두산근참기(白頭山覲參記)>에서 중국의 위압적인 자세와 우리의 퇴영하는 자세가 어느새 압록강 지역을 관습상의 국경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중국의 죠우언라이(周恩來) 전 총리는 만주족이 빠르게 흥기하여 백두산 이동에서 요하 유역의 광대한 지역을 장악하면서 조선인을 동쪽으로 밀어넣어 압록강과 두만강 이동으로 밀리게 하였다고 설명했다.

조선인의 간도 거주 시기에 대해 중국 자체의 연구에도 역사적 근거를 바탕으로 고대 시기까지 소급하는 경우와 '원말명초 이주설', '명말청초 이주설' 등이 있지만, 최근 중국은 정책적으로 조선인의 이주를 19세기 중엽 이후로 규정한다.

그러나 <재간도일본총영사관문서(在間島日本總領事館文書)>에 의하면, 조선인은 동북지역인 고토에서 살면서 만주족처럼 쉽게 한족에 동화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조선인이 한족보다도 먼저 동북지역에 거주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동북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다고 하였다.

▲ 1907년 대한신지지 부 지도(大韓新地志 附 地圖)의 함경북도편. 영남대학교 소장. 간도 지역은 물론 토문강과 두만강이 명확하게 구별되어 있다. (박선영 교수 제공)
관대정책론과 억압

둘째, 중국은 관대정책론 혹은 방임정책론으로 간도문제를 설명하고 있다. 중국은 간도가 원래 중국의 영토인데 조선인이 불법 이주한 것에 대해 관대하게 대하였기 때문에 간도문제가 발생하였으며, 한·중 양국의 국경은 기본적으로 청천강(淸川江)과 대동강(大同江) 사이를 오가는 정도였다고 한다.

압록강이 중국과 고려의 국경이 된 것은 금(金) 태조로부터 시작되고, 명대에는 두만강 일대에 행정기구를 두고 관할을 통치하였으므로, 16세기에 이미 중국과 조선 간에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중심으로 기본적으로 국경이 형성 확정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간도문제 발생에 좋은 빌미가 된 것은 한·중 변경의 상당부분을 공지(空地)의 비군사 지역으로 삼았고 조선의 요구에 관대했던 자소(字小·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사랑해주는 것) 정책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조선인은 중국인과 달리 황무지 개간세 및 기타 잡세도 납부하지 않았을 정도로 중국이 관대정책을 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경선이 명확하게 설정되기 이전에 양국사이의 완충지대는 복수주권(multiple sovereignty) 지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중국은 무조건 자국령으로 삼고 조선인에게 관대정책을 베풀었다고 하지만, 조선인에게는 그것이 오히려 힘의 억압이지 관대정책으로 이해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영유권 결정에 있어서 선점과 행정권 행사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그런데 중국 자료인<광서조동화록(光緖朝東華錄)>에서도, 중국인이 한번도 개간을 하지 않은 곳에 조선인이 이미 대단히 많은 면적을 개간하였고 함경도 자사(刺史)가 지권을 발급하고 등록하여 그 지역을 조선령으로 간주한 것을 발견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일본의 대표적인 간도문제 연구자인 나이또(內藤虎次郞)는 <한국동북강계고략(韓國東北疆界攷略)>(1906년)에서 조선인이 간도지역을 중국인보다 먼저 개척하였음을 지적하였다. 

▲ 백두산 정계비문 탁본(왼쪽)과 내용(오른쪽). `서위압록`, `동위토문`이라는 글자가 나타나 있다. ⓒ2004

백두산정계비 유무효론과 전략

셋째, 백두산정계비의 유무효론이다. 1712년 백두산정계비를 설정한 것에 대해 중국은 정계비 유효론과 무효론으로 설명하고 있다. 중국이 양국의 변경을 정확히 모르는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조선인의 말을 듣고 백두산 절반이 조선에 속하는 정계비를 세워 많은 영토를 상실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심지어 청나라 강희제의 과실이라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정계비는 변경을 조사한 심시비(審視碑)에 불과하다고 한다. 양국의 대표가 참석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국경조약이라 볼 수 없으며, 정계의 함의도 없기 때문에 단순히 기념물적인 성격이라는 것이다.

중국이 백두산정계비를 정계비로 보려는 이유는 정계비문상의 토문이 어디인가의 논란을 제외한다면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국경선이 확인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이 백두산정계비를 심시비라고 보는 이유는 정계비문의 '동쪽으로 토문'이라는 내용에서 토문이 어디인가의 논란을 처음부터 차단하고 싶기 때문이다. 또한 양국간에 공식적인 담판기록이 없고, 비석에 대청(大淸)이라는 청나라 국명만 있고 조선이라는 국명이 없는 점 등도 양국의 국경비로 보기에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중국 스스로가 상반된 견해를 주장하는 이유는 정계비문의 '서(西)로는 압록, 동(東)으로는 토문'의 해석여하에 따라 양국의 영토범주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중국은 압록강과 두만강 이상의 어떠한 논의도 불가하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싶어 한다. 따라서 중국은 1887년의 국경담판이 최종적인 결론을 얻지 못하였지만, 조선 대표 이중하가 토문강과 두만강의 동일성을 인정했다고 하면서 양국이 합의에 이른 것처럼 설명하였다.

그러나 조선정부는 담판 시 청조의 강압이 있었다고 보고, 1888년 5월 16일에 교섭 통상사무 독판 조병식이 위엔스카이(袁世凱)에게 새롭게 국경담판을 열어야 한다고 통고하기도 하였다. 한·중 국경담판의 내용에 대해 양국이 이견을 보이고 있지만, 국경담판이 최종적인 결론을 얻지 못하였다는 점에서는 양국이 동의하고 있다. 따라서 한·중 양국사이의 이견 없는 공개적인 국경담판은 역사적인 미해결 과제로 남겨져 있다고 보아야 한다.

국제법적 해결론과 현상유지

넷째는 국제법적 해결론이다. 중국은 간도문제에 대해 현상유지를 고집하겠지만 동북프로젝트를 통해 국제법적인 검토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현재 연구 중이기 때문에 최종적인 논리가 나온 것은 아니지만, 근현대 변경분쟁을 해결할 법리원칙을 5가지로 제시하였다. 중국의 5가지 법리원칙 (①관습선 존중 ②비밀협약 불승인 ③일방적 변경선 불인정 ④중앙 전권대사 체결 조약만 인정 ⑤미해결 문제는 양국이 협상)은 한국이 간도문제에 적용하여 새로운 논리를 개발할 필요가 있다.

① 중국은 압록강과 두만강이 한·중간의 전통적인 관습선이라고 주장하지만 양국 사이에 어떠한 분쟁도 없으려면 중국의 일방적인 주장이 아니라 역사와 현실적인 각종 요인을 고려하여 양국이 협상으로 해결해야 한다.

② 조선은 간도지역에 행정기구 설치, 관리 파견, 부세 징수 등을 하였는데 중국이 그 지역을 전부 중국의 영토로 주장하며 국경선을 획정하는 것에 대해 한국(통일한국)은 동의할 수 없다. 또한 ③ 일본이 불법적으로 행사한 외교권에 의해 한·중간의 국경문제를 제3자인 일본이 1909년 중국과 체결한 간도협약을 한국은 승인할 수 없다.

④ 양국 중앙정부의 전권대사가 체결한 것이 아닌 변경선 조약은 인정할 수 없다면 1712년 설정된 백두산정계비는 재논의의 여지가 있다. ⑤간도문제가 제기되는 것으로만 보아도 이는 역사적으로 미해결된 영토문제이자 변경문제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중국은 평화5원칙에 입각하여 양국이 평화롭게 국경분쟁을 해결할 수 있도록 협상해야 할 것이다.

중국은 여러 국가와 변경을 접하고 있어서 개별적인 사안에 따라 서로 다른 국제법적 논리를 적용하고 있으므로 중국의 모순을 잘 활용하면 간도문제에 대해서도 좋은 방법을 제공받을 수 있다.

우리는 지금 한·중간의 영유권 분쟁인 간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종합적이고 학제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특히 영유권 분쟁의 최종 결정이 '영토 취득 및 상실과 관련한 국제법의 일반 원칙'에 따른다는 점을 감안할 때 제3자 중재기관이나 국제사법기관의 시각에서 사안을 접근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영유권 분쟁의 판결을 받은 유사 판례를 비교 검토하여 간도문제에 대비한 전략적 적용을 고민해야 하고 국제사법기관의 법리를 극복할 수 있는 법리 개발에 주력해야 한다.

중국의 영토 취득 관행을 분석하여 중국 논리를 재활용 하고 1962년 북한과 중국의 비밀 변경 조약이 한반도 통일 이후 '현상유지·정유물 유보 원칙(uti possidetis 원칙)'에 어떻게 적용될 것인지를 검토하여야 한다.

중국의 영토문제 경험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

중국은 과거 변경 문제의 경험을 통해 되새겨야 할 교훈을 제시하고 있다.

중국은 과거 대부분 피동적으로 변경연구를 하면서 구체적인 경계지점의 고증을 경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변경조약으로부터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고 문헌 중심의 연구에서 탈피하지 못하였다. 또 새로운 자료의 개척이나 발굴도 부족하였으며 전문기구를 설치하여 전문연구가들이 체계적으로 연구하지 못했던 것을 교훈으로 삼고 있다.

중국의 교훈을 대면하고 있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국경 영토 문제는 국가 민족의 근본 이익과 관계있는 것이기 때문에 주동적·계획적으로 국가의 장기적 발전을 전면적으로 고려하여 연구 성과의 수준과 질에 신경 써야지 임기응변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연구는 문헌자료의 연구뿐만 아니라 전문가들이 실질적으로 개별적인 국경비, 설립지점, 변경선 문제 등을 명확하게 확인하는 답사를 거쳐야 한다. 새로운 자료의 개척이나 발굴과 더불어 국경비 등의 실물이나 문자 기록 및 기타 학문의 활용, 외국 자료나 연구성과 등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상대국이 변경문제에 대해 철저하게 조직화하고 공식화한 후에 피동적인 위치에 있지 않으려면, 전문 기구를 설치하고 전문연구자가 제대로 연구할 수 있도록 이에 상응하는 시설과 조건을 제공하여야 한다.

전문가들이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전략을 세운 바탕위에 정부가 효율적인 실무를 구체화하지 못한다면 후환은 매우 클 수 있다. 간도문제는 변경조약이나 협약 등의 연구로부터 문제를 제기하고 변경조약과 협약에 근거하여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지금 우리는 연구의 중복도 많고 중요하고 민감한 영토문제에 대해 논리적 모순이 심각하다. 이러한 것을 해결하고 좀더 수준 있고 영향력 있는 학술 성과를 바탕으로 국가적인 장기 전략을 세우려면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연구가 필요하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중국의 죠우언라이 총리는 두만강·요하·송화강 유역에 조선인이 오랫동안 거주하였는데, 이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가 직접 그곳에 가서 조사하고 비문을 찾고 문물을 출토하여 역사의 흔적을 연구할 권리와 책임이 있으며, 중국은 이런 일을 도와줄 책임이 있다고 하였다.

우리는 우리의 권리를 찾고 책임을 다해야 할 뿐만 아니라 중국으로 하여금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촉구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명확한 역사 사실의 규명이 진정한 한·중관계의 평화와 동아시아 평화, 더 나아가 세계의 평화에 이바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분쟁을 생산하기 위한 적극적인 연구가 아니라 평화를 창출하기 위한 적극적인 연구가 우리의 목적임을 되새겨야 할 것이다.


(오마이뉴스 기자 2004-10-15)